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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의 용도
이병창 2019.08.18 54

만년필의 용도

오늘 만년필을 후배로부터 선물 받았다. 내가 대학 들어간 이후 47년 만에 마침내 원하던 만년필을 받았으니 너무 기쁘다. 내가 만년필을 갖고 싶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다. 누가 시인이 되려면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해서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철학과에 지원했다. 철학과에 들어가서 철학을 열심히 배웠다. 그런데도 시가 쓰이지 않았다.

내심 초조해 나는 원인이 무얼까 고민했다. 그때 여러 진단이 나왔다. 누구 얘기론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렇다 한다. 오랜 세월이 지닌 지금에 보면 이 말이 옳다. 그때는 이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누구 얘기로 술을 덜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술이 취해야 새로운 시적인 눈이 뜬다고 하니, 그때부터 줄곧 술을 먹었다. 하지만 이 말은 엉터리였다.

그때 내가 내린 진단 중의 하나는 내게 만년필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만년필로 백지에 사각 사각대며 시를 써야 된다. 동이 트는 새벽에 말이다. 가끔 잉크가 흘러 흰 와이셔츠를 푸르게 물드는 볼펜으로 그때는 화장지로 쓰던 신문지에 꾹꾹 눌러써서야 어찌 시가 되겠는가?

그때부터 오매불망 만년필이 눈 앞에 떠올랐다. 당시로서는 만년필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함께 문학 습작 활동을 했던 친구가 갖고 있던 만년필이 너무 부러워 어느 날에는 저걸 훔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만년필은 갖지 못했다. 그 덕분에 시를 안 써도 변명이 생겼다. 만년필이 없으니 시를 쓸 수 없다고 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침내 시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뒤 교수가 된 후에 만년필을 살 정도 여유는 있었으나 그때는 더는 만년필이 필요 없었다. 시를 쓰는 것도 아닌데.... 시를 쓰는 것 외에 만년필이 필요한 경우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무려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 4년 후배지만 30년 동안 내가 모셔온 후배가 내게 만년필을 선물했다. 아주 예쁘게 내 이름까지 새겨서 엄청 호사스러운 케이스에 넣어주었다. 내가 마르크스의 책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한다고 했다. 이걸로 책에 사인을 하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 만년필로 온통 사인하고 돌아다니려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책이나 노트에나 안 되면 팔에도 사인해서 주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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