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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장 주석 12- 범법과 책임
이병창 2019.08.20 25
정신현상학 정신장 주석 12- 범법과 책임

1)단순성
앞에서 헤겔은 클레온과 안티고네의 성격적인 단순성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그들은 자율적 개인이 아니죠. 그들은 일반자를 대행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마치 자신의 사명과 운명처럼 확고하게 믿고 실행합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주저함도 없고 흔들림도 없습니다. 그 결과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이 되죠. 따라서 자신이 옹호하려는 인륜적 본질 그 자체를 해치게 됩니다. 클레온은 그가 옹호했던 국가를 위태롭게 하며 안티고네는 결국 그가 옹호했던 가족을 파괴합니다.

안티고네와 클레온이 이런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국가와 가족은 인륜적 세계 전체를 이루는 두 요소입니다. 양자는 균형 속에서 인륜적 세계가 완성되죠.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이 중 하나의 법칙만 택한 것이죠. 이는 동시에 다른 법칙을 배제한 것이 됩니다. 이제 그에게서 반대되는 원리는 폭력이 되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실이 됩니다.

“신의 법칙에 속하는 자는 다른 편에서 인간의 우연적인 폭력성을 본다. 그러나 인간의 법칙에 할당된 자는 다른 편에서 내적 대자존재의 오만과 불복종을 본다.”(252:28-30)

즉 안티고네는 오빠를 장사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이 신의 법칙에 배치되는 폭력으로 간주하고 클레온은 안티고네가 국법을 범한 행위에서 개인의 오만과 불복종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2)시민과 국가
이어서 헤겔은 252: 35-256:30까지 한 페이지에 걸쳐서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논합니다.

이 관계에서 국가는 ‘대상으로서 실체’ 또는 ‘대상적 현실’로, 시민은 ‘의식으로서 자기의식’이라는 말로 지칭됩니다. ‘의식으로서 자기의식’이라는 말이 좀 웃기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헤겔적 표현이지요. 그러면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죠.

“인륜적 자기의식은 실체를 의식한다. 자기의식[의 의식]에 대립된 것으로서 대상[실체]은 그러므로 그 스스로 본질을 갖는다는 의미를 상실한다. ...의식이 어떤 것을 자기 밖에 고정하던 영역은 이제 ...사라진다.”

“그런 [의식의 ]일면성에 대립하여 [대상적] 현실은 자기의 힘을 갖는다. 현실은 진리와 더불어 동맹을 맺고 의식에 대립하면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의식에게 드러낸다. 인륜적 의식은 절대적 실체의 잔으로부터 대자존재 그 자신의 목적, 그 자신의 본래 개념의 일면성의 망각을 들이마신다.”

이상 표현된 헤겔의 말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민은 처음에는 국가를 본질로 삼습니다. 처음에는 국가의 명령을 말없이 수행하죠. 그러나 점차 자기 개인의 목적에 눈을 뜨게 되고 자기 이익을 챙기기 시작하죠. 그는 이제 자기를 본질로 삼으면서 국가를 자기의 수단으로 삼으려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국가는 자기가 진리임을 입증하는데, 그 방식은 개인을 전쟁으로 내모는 것이죠. 외적의 침입이라는 전쟁을 통해서 개인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자기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다시 국가 전체의 의지에 복종하게 되죠.

3)시민의 단순성
그런데 외적 앞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그 앞에서 국가 의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인륜적 의식은 모든 개인적인 본성과 대상적인 현실의 자립적인 의미를 망각의 강물에 빠뜨리고 만다.”

여기서 헤겔은 대상적 현실[국가] 자체도 이제 그에게 대상으로서 의식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이런 복종 상태는 이제 대상을 자기의 내적 목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인식은 자각적 인식은 아닙니다. 온몸에 마치 공포나 냉기가 스며들어오듯이 스며들어오는 인식이죠. 막연한 내적 합일이라 할까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왜 옳은지는 스스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마치 부모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제 개인의 자립성은 상실되고 개인은 국가의 의지를 행위하는 단순한 통로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런 통일성 때문에 개인은 실체의 순수한 형식이고 실체가 그 내용으로 된다. 행위는 사상을 현실로 이행하는 것이며, 본질을 결여한 대립의 운동에 불과하다. 인륜적 의식의 절대적 권리는 따라서 행위, 현실의 형태가 그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행동하는 국가의 전사가 등장합니다. 그리스 국가와 시민의 이런 관계는 아무래도 헤겔이 스파르타의 전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행위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헤겔의 표현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대군과 대결했던 300인 스파르타 전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파르타의 전사는 국가의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노예는 아닙니다. 그들에게 국가의 의지는 마치 공포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4)범법과 책임
이런 단순성에 따라 자아는 행동합니다. 자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법칙을 수행하죠. 하지만 하나의 법칙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그것에 반대되는 법칙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인륜적 본질은 전체적으로 대립된 것의 통일체이니까요. 결과적으로 그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법칙과 대립하는 법칙을 해치게 됩니다. 불법을 범하게 되는 거죠.

헤겔은 이를 범법이라 합니다.

“자기의식은 .... 행위로 나가면서 단순한 직접성에서 벗어나서 분열된다. 즉 행위를 통해서 직접적 진리를 단순히 확신한다는 인륜성의 규정을 포기하며 자기 자신을 행위하는 자로서 자신과 자기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현실로 분리한다. 따라서 행위를 통해 죄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 부정적 현실은 자기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단순한 인륜적 의식으로서 자기의식은 하나의 법칙에 자신을 할당하면서 다른 법칙을 거부하면서 그의 행위를 통해 이것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이런 범법은 그가 의도적으로 수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직 자기가 옳다고 단순하게 믿은 그 법칙을 수행했을 뿐이지, 그 반대편을 해칠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인륜적 본질 자체가 이런 대립된 것의 통일체이므로 자동적으로 그는 범법을 수행하게 된 거죠.

“내용상 인륜적 행위는 범법의 계기를 그 자체에서 갖는다. ..그의 행위는 인륜적 본질의 다만 한 가지 측면만을 파악하고 다른 측면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한 이런 일면성 때문에 죄가 된다.”

헤겔은 이런 범법을 외적이거나 우연적 사건이 개입하여 일어난 사건과 구분합니다. 이런 범법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인륜적 본질 자체가 그런 대립의 통일체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기에 반대되는 것을 정립하는 분열이다. 그런 분열이 있다는 것은 행위 자체에 속하며 행위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이런 범법에 대하여 ‘책임Schuld’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원래 책임은 그가 의도적으로 행위했을 때 제기되는 겁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행위의 결과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과실이 되겠죠. 그런데도 헤겔은 책임이라는 말을 씁니다.

5)책임의 주체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죄와 범법의 책임을 행위자 개인에게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륜적 행위에서 행위한 자는 독립적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륜적 법칙을 대변하는 자로서 행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위하고 책임이 있는 자는 이 개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개별적 자아로서 행위자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일반적 자아를 대항하는 자일 뿐이다. 개체성은 순전히 행위의 형식적 계기일 뿐이다. 그가 행위한 내용은 법칙이며 인륜이고 각 개인에게 이미 정해진 것이며, 그의 신분에 속하는 것이다. ”

“개인은 류로서 실체이며, 그 규정성 때문에 종이 되지만 그 종은 류의 일반성 내에 머무르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종이란 남자와 여자를 말하며, 유란 곧 인륜적 본질을 말합니다. 개인은 인륜적 본질이 원하는 것을 자기에게 자연적으로 할당된 부분에 한정하여 행위했다는 의미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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