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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주석(17)-아름다운 영혼
이병창 2020.03.23 66
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17)-아름다운 영혼

1) 낭만주의자의 신 개념

앞에서 양심은 말을 통해 서로의 양심을 확인하면서 양심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습니다.


헤겔은 여기서 낭만주의자의 신의 개념이 출현하는 단서를 발견합니다. 낭만주의자는 심정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왜 이런 양심 또는 심정에서 신이란 존재가 출현하는 걸까요?


“신은 직접적으로 자아의 정신과 심정에 그의 자아에 현현한다.”


“의식은 본질이 그의 자아 속에 직접적으로 현현하는 것을 본질과 그의 자아의 통일로서 인식한다. 또한 의식은 그의 자아를 생동적인 즉자로서 인식하며, 이런 그의 인식을 종교로 인식한다. 이 종교란 직관된 또는 현존하는 인식으로서 공동체의 정신에 관한 공동체의 언어이다.”


헤겔은 그런 낭만주의자의 신관을 양심의 개념으로부터 설명하려 합니다. 양심은 즉자와 자아의 통일인데 이 통일은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것입니다. 통일이 직접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자아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자아에 초월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통일이 내재한다면 그것이 곧 양심입니다. 이 통일이 이렇게 초월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이 곧 신이죠. (내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기의식 즉 양심이고,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종교, 추상적 의식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양심의 개념과 신의 개념이 동전의 양면이고, 낭만주의 신관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나중에 이런 낭만주의자의 신 개념을 비판적으로 보죠. 헤겔에게서 신은 일반의지의 구체적 현존, 즉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자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메시아라는 계시종교가 출현합니다. 종교는 이런 공동체의 정신이며, 메시아의 말 즉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자신이 말하는 언어입니다.


낭만주의자가 이런 종교를 양심, 또는 심정에 두는 것은 사실 종교를 지극히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헤겔은 개인의 양심이 왜 메시아라는 개념을 요구하게 되는가를 설명하면서 양심에서 종교의 장으로 이행하게 되죠. 이 과정은 양심 절의 뒷부분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이 과정은 곧 양심에서 출발하는 낭만주의의 오만과 한계를 비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 양심의 빈곤

양심, 종교의 지반인 심정, 이 속에 이제 모든 대립적인 요소는 해소됩니다. 의무라는 도덕 법칙[즉자]도, 이를 실행하는 자아[욕망]도, 이를 통해 일어난 행위라는 결과[현존]도 모두 고유한 규정을 잃어버리고 심정의 무규정적인 깊이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런 심정은 모든 것이 해소되어 있으므로 가장 풍부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빈곤한 것이기도 하죠.


“이런 순수성으로 순화되면서 의식은 그의 가장 빈곤한 형태가 된다. 의식이 유일하게 소유하는 것은 가난 즉 소멸이다. 실체가 해소되는 절대적 확실성은 자체 내로 수축된 존재라는 절대적 비진리이다. 의식은 절대적 자기의식 속에 침몰한다.”


낭만주의자는 실제로 자신은 아주 깊고 그 속에서 모든 풍요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무게와 깊이를 갖춘 존재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는 아무런 깊이도 무게도 없습니다. 그는 마치 무엇인가가 있는 듯이 어떤 물음에 대해서도 하나의 아주 모호하고 모든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말, 예를 들어 ‘아!’이나, ‘음!’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죠.


3) 아름다운 영혼

양심은 이런 모든 것이 사라진 순수 심정 속에 살아갑니다. 헤겔은 이런 양심을 불행한 의식과 비교합니다. 불행한 의식은 자신의 자유를 꿈꾸죠.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자유를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는 피안의 세계, 사유의 세계에 그런 자유를 건설합니다. 현실의 자유를 그는 피안의 자유와 교체하죠.


“그것은 불행한 의식에서 일어나는 자기 교체이다. 불행한 의식에게 이 자기 교체는 자기 내부에서 일어난다. 불행한 의식은 자기가 이성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의식한다. 불행한 의식은 즉자적으로는 이미 이런 이성의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양심, 순수 심정은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해 그저 말에 머무릅니다. 만일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심정의 순수성을 해치게 되겠죠. 왜냐하면 행동은 구체적 현실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는 현실과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그는 심정의 순수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나, 행동을 할 힘은 없습니다. 양심은 자기의 확신을 오직 말로만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실제 현실은 되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되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은 의식으로서의 확실성을 말의 울림[Austoenen]으로 즉 그의 대자 존재의 대상성으로 직접적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렇게 창조된 세계는 그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이해되며, 그 말의 메아리는 다만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양심은 실제 행동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은 구체적 현실, 더러운 현실에 몸을 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이런 양심은 실제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외화를 견딜 힘, 자신을 사물로 만들 힘, 존재를 견딜 힘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순수 심정, 자기 확신의 공허함이며, 그렇기에 그는 동경에 빠집니다. 앞에서 불행한 의식이 자신의 자유를 피안에서 꿈꾸듯이, 양심은 자신의 정의를 즉 도덕 법칙의 실행을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 조건이 갖추어진 세계를 꿈꿉니다. 그는 현실을 그런 이상 세계와 대체하죠. 헤겔은 이를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위는 동경이다. 이는 자기가 비본질적인 대상으로 되는 것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릴 뿐이며, 자기의 상실을 넘어서 자기로 되돌아와서 자신을 다만 상실된 것으로 발견한다. 이 투명한 순수성 속에서 불행한 소위 아름다운 영혼이 자기 내에서 가물거리며, 공중으로 해소되는 형체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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