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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정 작가 네 눈물을 믿지마를 읽고
이병창 2021.06.30 90
김이정 작가 네 눈물을 믿지마를 읽고


1)
김이정 작가의 신간 ‘네 눈물을 믿지마’(21년 5월, 강)를 읽었다. 단편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특이하게 한편만 제외하고는 모두 일종의 여행기였다.

여행기라면, 로맨틱한 경험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곧 이 글들이 여행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가 찾아간 곳은 사람들이 기꺼이 여행가지는 않을 곳 같기 때문이다.

1755년 11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 폐허가 되었던 리스본, 북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화장터, 1968년 한국군에 의해 135명의 마을 주민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난 퐁니. 1937년 4월 26일 히틀러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게르니카, 황량한 벌판에 히스 꽃만 만발한 영국 다트무어 지방의 구릉지대 등이다.

작가는 왜 이런 곳을 찾아갔을까? 질문이 잘못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작가가 찾아 간 속은 대부분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룸 미러 속엔 내 얼굴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홉사 데드마스크 같았다. ...불행을 피부이식이라도 한 얼굴이었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그런 머나먼 이국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여행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성찰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시간은 곧 유령의 시간이다. 이 현실 속에 살지만 이 현실을 떠나있는 존재, 그게 유령이다.

2)
그러기에 여행 속에 우리는 작가 자신의 기억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때로 기억이 아니라 기억 속에 머물렀던 어머니와 남편,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아니면 여행에서 누군가를 새로 만나기도 한다.

작가와 작가의 기억 속 인물, 작가가 만난 인물들은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작가의 분신이다. 마치 꿈속에서 만나는 인물이 서로 대립하지만 모두 꿈꾸는 자 자신의 분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분신들의 모습은 현실을 보는 다양한 모습을 아니 서로 중첩되어 있는 다양한 현실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런 기억과 만남을 통해 동시에 중첩되어 있는 다양한 현실을 그려낸다. 우리는 대표적으로 퐁니라는 작품에서 작가의 이런 기법을 만날 수 있다. 하미연꽃이라는 작품은 학살에서 희생당하면서 그 학살을 이해하지 못하는 탐과 학살을 자행하면서 스스로 미쳐가는 서하사 그리고 서하사의 딸로 학살 현장을 찾은 작가의 분신 광희이다. 이 작품은 세 관점이 나란히 제시한다.

3)
작가가 그려낸 이런 모습을 통해 작가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드러난다. 현실은 이유 없는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다. 역사가 마치 군화발처럼 개인의 삶을 짓밟고 지나간다. 이런 역사의 모습이 작가의 아름다운 필치로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달빛이 훤한 장터는 아이들 하나 보이지 않고 기괴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동쪽 하늘 어디선가 이 작은 마을로 스물네 대나 몰려왔다는 폭격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이어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가가 그려낸 최초의 인물은 바로 희생자이다. 그런 희생자의 모습은 사업에서 실패하여 위장 이혼을 하고 고시원에 사는 인물을 통해 잘 그려져 있다. 그의 모습은 곧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인물을 연상시킨다. 벌레가 된 모습 말이다.

이런 희생자의 모습은 작가에게는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작가에게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작가의 전작 장편 소설 유령의 시간에서 잘 나온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방직후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이상을 추구하였으나 현실 속에서 패배하면서 자포자기와 회한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4)
작가는 현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본다. 작가는 단순히 패배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을 더 부각한다. 이런 인물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역사에서 학살자의 편에 선 인물이다.

이런 죄책감은 서하사나 아버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서하사는 학살에 가담한 죄책감 때문에 미쳐간다. 아버지는 자신이 구 시대 지배자에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광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학살에 죄의식을 느낀다.

그보다 더 더 강한 죄책감은 작가 자신(작가를 대변하는 작중 인물이라는 의미이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작가는 게르니카에서 학살을 떠올리면서 어느덧 자신이 본의 아니게 버리게 된 남편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그날 밤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나 무서워 그가 끝내 울먹이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함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떠난 후부터 나를 짓누른 물음이었다.적어도 그의 곁에 있었다면 ....노 파사란, 두려움의 노래라도 함께 불렀다면..."

5)
우리는 역사 앞에서 피해자, 또는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우리들, 이 우리들에게 남은 책임은 무엇일까? 이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도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런 죽음은 여행을 떠난 대부분의 주인공이 죽음의 질병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책임은 무엇인가. 작가가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면서 묻고 있는 물음은 이런 것일 것이다.

그 성찰에 대한 답은 작가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작가를 따라 여행에 나선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작가는 작가 나름의 성찰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이 소설집 처음가 끝 장식하는 단편은 모두 인도 여행을 담고 있다. 첫 단편 프리페이드 라이프의 마지막을 보자.

“자신을 잃는 삶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한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쓸거야.
꽃불 두 개가 검은 강 위로 나란히 흔들리며 떠가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저기 모여든 배에서 떠내려 보낸 꽃불로 강물은 붉은 꽃밭과 같았다. 오른편 가트에선 여전히 화장장의 장작불이 축제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강물에 시체와 함께 떠도는 꽃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의 가호를 바라는 염원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이제 더는 신의 가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지막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마지막 작품 붉은 길에서 주인공은 숙소인 스와미 아쉬람을 찾고 있다. 산책 삼아 걸어나왔으나 붉은 길에 취해 하염없이 걷다가 작가는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평원 한 가운데 어느 편으로 가야할지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은 인도인 남자 집단에게 길을 묻는다. 주인공은 그들을 의심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차를 얻어 탄다. 다행히 주인공은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공은 아쉬람을 떠나 인도 요가 승원 마이소르로 갈 예정이었다. 거기에 그녀를 기다리는 연인이 있다. 그녀는 이별을 고지하고 마이소르로 떠났다. 주인공은 숙소로 돌아온 다음 새벽에 다시 붉은 길을 따라 나선다. 달빛이 밝은 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린다.

이 마지막 글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작가의 홀로 서기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작가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녀를 이 가혹한 현실에서 보호해줄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두렵지만 이 초원에서 홀로 서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홀로선 촛불, 강물에 시체와 함께 흘러가면서 잠시 타고 언젠가는 꺼지겠지만 그래도 타는 동안 어둠을 밝히는 꽃불,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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