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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마드랜드를 보고
이병창 2021.06.27 61
영화 노마드랜드를 보고
1)
이 영화는 2020년 작품이다. 이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아카데미 감독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비평가 상의 거의 휩쓸었다 나는 보통 이런 유명한 영화는 보지 않는다. 다만 이번만은 예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방랑하는 삶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면 서울 역을 돌아 다시 우리 집으로 온다. 당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버스의 맨 앞줄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대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60년대 초 서울의 풍경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초등학생의 눈에는 마치 신기한 영화를 보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후 실제 방랑한 적은 없다. 정신적인 방랑이라면 몰라도.
노마드라는 말은 후일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개념화해서 유명해졌다. 뜻은 유목민이지만 우리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질서와 체제 안에 안주하는 농경민의 삶과 대비되는 유목민의 삶은 자본주의 사회를 탈주하려는 몸부림을 상징하는 듯한 개념이어서 좋아한다.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원작 방랑자[Biegumi]도 열심히 읽었다. 이 원작에는 모스크바 지하철 속에 들어가 끝없이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는 어떤 여인이 그려져 있다. 올가는 현실 세계가 무너지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이 현실 세계를 빠져나온다.
2)
방랑자에 대한 이런 관심 때문에 노마드랜드라는 영화를 예외적으로 보게되었다는 말이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영화는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차라리 제시카 부르더의 원작이 내게는 더 아름답다. 감독이 원전에 충실해야 할 의무는 없다. 원전과 달리 영화는 독자적인 생명을 지닌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원작자와 영화 감독의 차이를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쓰인 글이다.
원작자 제시카 부르더의 말과 감독 클로이 차오의 말은 어떤 면에서 중첩되기는 하지만 초점은 서로 어긋난다.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인 면은 히피적 삶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삶과 대비된다.
자본주의적 부와 탐욕, 이기적 삶과 경쟁, 타인의 지배, 가족의 파괴, 자연의 파괴와 신성모독 등으로 점철된다고 한다면 히피적 삶은 미니멀한 삶, 성실한 노동, 독립적인 생활, 사랑, 자연과 더불어 살며, 초월을 향상 동경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이런 삶은 거슬러 올라가면 1830년대 낭만주의자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밀레의 그림으로 그려진 삶이다. 하루 내내 땀흘려 일하고 나서 저녁이 오면 신의 선물인 곡식을 앞에 두고 함께 일한 아내와 더불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19세기 말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에서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런 모습이 1960년대 히피의 삶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동일한 모습을 그리더라도 작가와 감독은 서로 핀트가 어긋난다. 이제 그 차이점을 서술해 보기로 하자.
3)
영화에서 주인공 펀은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를 종합하고 무엇보다도 작가 제시카 부르더를 대변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인물이 펀이다. 영화에서 펀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노마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전달해주는 매개자 즉 화자가 된다.
영화에서 펀은 가부장적 아버지를 피해 일찍 남편과 결혼해 떠난다. 그들은 2008년 직전까지는 엠파이어라는 광산 도시 석고보드 공장에서 일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택경기가 꺼지자 공장과 광산은 문을 닫는다. 펀의 남편은 아마 죽은 것으로 보인다. 펀은 사택에 살다가 짐을 모두 창고에 집어넣은 후 밴을 타고 노마드가 된다.
펀은 캠핑장 관리를 맡기도 하는데 워캠퍼로서 노마드가 자연 속에 자유롭게 살아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을 미화하는 영화의 모습은 특히 아마존 창고와 사탕무우 공장의 모습에서 뚜렷하다.
영화는 펀의 여정을 따라서 대자연의 웅장한 모습을 그려내면서 신을 향한 동경을 표현한다. 격렬한 타도가 치는 바닷가, 선인장이나 거친 풀들만이 자라나는 황량한 사막, 끝없는 평원에 펼쳐지는 설산 등은 자연을 통해 신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관심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후반부는 펀을 좋아하는 노마드 데비스가 나온다. 원작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되고 말았는데 영화는 펀과 대비스 사이의 사랑을 상당히 비중 있게 그려낸다. 개리는 노마드 생활을 청산하고 아들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펀을 초대한다. 펀은 대비스의 집에 들러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 개리는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기와 함께 머물자고 하지만 펀은 새벽에 떠나고 만다.
펀은 왜 떠났을까? 그 이유는 펀이 그 다음 밥이라는 노마드 생활의 지도자를 만났을 때 설명이 된다. 펀은 아직도 그녀의 남편이 입던 외투를 입고 있다. 그럴 정도로 그녀의 남편을 잊지 못한다. 밥 역시 죽은 자신의 아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다니면서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특히 환영받은 이유가 잘 설명된다. 마지막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많은 미국인을 울렸으리라.
4)
그러나 원작은 전혀 맥락이 다르다. 영화에서 보조적 인물로 나오는 린다가 원작에서는 원래 주인공이다. 원작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워캠퍼의 삶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음모임을 상세하게 밝히는 데 주력한다.
린다가 아마존 창고에서 워캠퍼로 일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특히 린다가 스캐너를 쓰다가 결국 손목근육이 손상된 사실을 말하면서 아마존 창고의 노동을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영화에서는 아마존 창고에서 일하는 펀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무척이나 모던한 분위기다. 거기서 노동하는 임시노동자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사탕무우 공장의 모습도 마찬가지다.원작은 이 공장의 모습을 사탕무우가 날아다녀 노동자를 치고받는 모습이 약간 코믹하게 그려졌지만 영화는 펀이 힘들지만 열심히 노동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미국의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비판은 원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미국은 지구상에 가장 부유한 국가이지만 국민들은 대체로 가난하며 가난한 미국인들을 자기 자신을 싫어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자신을 조롱하고 자신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예찬할 뿐이다.”
5)
영화가 기독교적 사랑을 향해 핀트를 맞추었다면 원작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의 탈출, 횡단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선 하우스리스와 홈리스의 차이에 대한 작가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아래의 정의를 들어보라.
“밴생활자는 망가지고 타락해가는 사회질서에서 빠져나온 양심 있는 이의 제기자들
반면 홈리스는 사회의 규칙이 싫어서 밴에 사는 건 아니예요.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목표가 있는데, 그건 그 폭압적인 규칙들 밑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서는 쾌적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지니까요.“
“그리하여 대공황의 바로 그 심장부에서 새로운 꿈이 태어났다. 탈출의 꿈이었다. 눈과 얼음으로부터, 높은 세금과 집세로부터,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는 경제체제로부터 탈출하는 꿈, 탈출하라. 겨울 위해, 주말을 위해, 당신의 남은 평생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약간의 용기와 600달라짜리 하우스 트레일러가 전부였다.”
이런 점에서 원작은 밴 생활자의 모임인 떠돌이 방랑자의 랑데부RTR의 모임을 상당히 활기 있게 그려낸다. 그들은 일년에 한 번 한 곳에 모여 함께 캠핑한다. 그들은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음악 속에서 함께 춤을 춘다. 그리고 밤이면 별빛 아래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빛에 취한다.
원작에는 노마드의 한 사람인 리베카 솔닛의 시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소개된다.
“견뎌내려는 우리의 의지를 뒤흔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별이 빛나는 광활한 하늘 아래 동려 워캠퍼들과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아 있을 때와 같은 공유의 순간들 속에 행복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하다.”
6)
원작은 마지막으로 린다가 지닌 꿈을 소개한다. 즉 어스쉽에 대한 이야기다. 어스쉽은 멕시코의 건축가 레이놀즈가 창안한 집이다. 타이어로 벽을 쌓고 유리병으로 창문을 낸 자연과 일체가 된 집이다. 빗물을 걸러 먹으며, 태양의 온기를 보존해 추위를 막는다.
영화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원작에서는 무려 한 장이 할애되는데 이것이 작가 제시카 부르더가 보여주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글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나는 이 땅이 린다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긴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무언가를, 빚도 저당도 없이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그 자신보다 오래 남을 무언가를 짓겠다는 꿈을 향한 진전이, 여기 손에 닿는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7)
나는 원작자의 꿈에 상당히 공감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꿈을 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꿈이 현실 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낭만적인 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런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좀 길지만 그래서 이 영화를 소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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