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친노의 전도
이병창 2013.01.04 344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의문을 품을 지도 모르겠다. 즉 비판적 지지와 친노는 다른 것이 아니냐? 전자에서 진보 지식인은 보수 야당에 종속적이었지만 후자에서 진보 지식인이 보수 야당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주체가 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런 식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친노의 경우 진보가 주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친노가 등장한 이후를 생각해 보자. 과거 노무현 대통령 초기에 친노와 민주당 구파 사이의 관계에서 보면 친노의 주도권은 극히 미약했으니, 주체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 이후(열린 우리당 시절) 그리고 약간의 부침이 있지만 현재 민주당까지를 보면 친노가 당내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주체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전히 당의 구성에 있어서 보수 야당 출신과 진보적 지식인이 하나의 당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적인 차원에서의 주도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책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친노의 정책들이 진보의 정책적 입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보수적인 측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진보적 지식인은 여전히 보수 야당의 입장에 종속적이며 따라서 비판적 지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들이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주체가 되었으면서도 정책은 이렇게 보수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보적 지식인들 즉 친노들이 기만적이었다는 말인가? 어떤 비평가는 그렇게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쉽게 말해서 친노가 보수 야당 쪽에 끌려 다녔다는 것이다. 친노는 주체였지만 스스로를 억제했다. 왜냐하면 보수 야당 지지 세력의 존재가 자신의 정치적인 목숨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참자 또 참자 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케이스이다. 노무현 사후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바에야, 속 시원하게 해보다가 죽었더라면 한이라도 없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오직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이런 것을 구조적 종속이라 할까? 예를 들어 미국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흑인을 위한 정책을 결코 펼 수 없는 이유와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구조 탓만 할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친노의 전도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친노에게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었다. 원래는 보수 야당을 진보적 정책 쪽으로 견인하기 위해 그들은 당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런데 당내 권력을 계속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그들은 오히려 보수 야당 세력에 목매달고 말았다.



모든 혁명이 이렇게 전도된다고 한다. 원래는 권력은 혁명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실천적인 과정에서 권력을 위해 혁명은 유보된다. 친노 역시 권력과 혁명의 이런 전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친노의 정치적 타락이 시작된다. 오해하지 말자. 이런 타락은 부패와 권력 남용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타락이란 곧 혁명의 전도라는 논리를 의미한다. 친노가 어느 정도로 정치적으로 타락했는가를 한 번 보자.



이제 거의 모든 친노는 이미 진보의 입장은 불가능한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비판적 지지는 자신의 지지가 일시적이고 곧 진보적 입장으로 되돌아간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물론 이는 자기기만에 불과했고 그들은 결코 되돌아 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친노는 아예 되돌아간다는 생각조차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친노는 노골적으로 진보의 입장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친노는 진보의 입장을 유토피아의 지위로 올렸다. 진보는 숭고한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진보는 궁정적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비판적 지지와 친노의 차이를 비유하자면, 내란 중인 자기 나라를 떠나 이웃의 나라에 세워놓은 임시수용소에 사는 사람들의 두 가지 태도에 대립된다. 하나는 아무렇게나 천막을 친다. 곧 돌아갈 텐데 뭐 하면서 말이다. 다른 하나는 견고하게 집을 세운다. 임시수용소이지만 앞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곳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느 편이든 임시수용소에 살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비판적 지지나 친노는 보수 야당과 관계해서 보수 야당에 의존하는 것은 동일하다. 비판적 지지는 세력상 보수 야당에 종속되었다. 친노는 그 스스로 주체였지만 정책적으로는 보수 야당에 매달려 구걸하는 존재가 되었다. 결국 비판적 지지이든, 친노이든 보수 야당의 들러리, 구조적 종속체였던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야기가 비판적 지지와 친노를 구분하는 쓸데없는 학자적인 문제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제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변화했고 이로부터 친노가 어떻게 권력화 되었는지 라는 본래의 문제로 되돌아 가보자.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