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새 장을 열기 위하여
계간 진보평론
40호(2009년 여름호)를 발간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한국사회와 운동 진영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갈구하는 소리들을 듣는다. 무언가가 막힌 것이다. 이 막힌 무엇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진보라고 자처했던 그룹들이 하나씩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 소리는 속삭임에서 더 큰 소리로 바뀌고 있다. 이 속삭임을 큰 소리로 바꾸는데 신자유주의와 경제 지상주의를 표방한 신개발주의적 이명박 정부의 출현이 한 몫을 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운동과 7월 노동자대투쟁의 연장선에서 20년 동안 다양한 운동이 진행되어 왔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사회운동 진영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방향 설정을 고심하고 있다. 여성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진보평론 40호는 특집으로 적·녹·보라의 자체 평가에 기반한 연대를 기획하였다. 이 기획은 과거 10년 간 진행되어 온 고립을 벗어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번 특집에서는 총 8편의 글을 싣고 있다. 이 글들은 모두 꼼꼼히 추적하고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부문운동에 대한 자체 평가 속에 타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8편의 글들에서 분명 공동의 연대 지반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독자들은 오히려 소통의 어려움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작업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위의 글들이 보여주듯이 오랜 세월 동안의 ‘소통의 단절’은 많은 불신과 오해를 낳았으며 언어 사용의 차이들을 가져왔다. 우선은 이런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 때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입장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더 밀고 나아가 확장할 때인 것처럼 느껴진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좌절과 절망이 깊어지는 곳에서 ‘원한과 복수의 감정’이 자라난다. 그것은 저항과 투쟁을 생산한다. 그러나 저항과 투쟁은 ‘부정적 파괴성’, ‘죽음의 본능’을 생산할 뿐이지 ‘자기 긍정’을 생산하지 못한다. 문제는 ‘희망의 정치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희망’은 저항과 투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항과 투쟁을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좌파만이 아니다. 그것은 파시즘의 토양이자 파시즘적 권력을 만들어낸 추동력이었다. 따라서 자본 지배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정치는 ‘현실 극복’의 자기 긍정적 권력의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한국의 진보운동이 지닌 역사적 책무가 있다.
진보운동이 ‘희망의 정치학’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 현장뿐만 아니라 생존과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까지도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지역 맹주로서의 고립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난 ‘연대’가 모색되어야 한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세계 경제 위기와 이명박정권의 출범은 오늘날 ‘자본 지배’에 대한 적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만들고 있다. 특집에 실린 모든 글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을 오늘날 삶의 파괴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범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어쩌면 다양화되어 있는 운동들이 만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맑스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이 함께 작동한다면 이론과 현장 운동의 지형이 달라질 것”이라는 고정갑희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런 동의지점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입장이나 활동 공간에 따른 시각의 편차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비판의 지점 또한 상이하기 때문이다. 고정갑희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진보와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적색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제로’를, 녹색에 대해 ‘인간주의에서 가부장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적색’은 생산중심에 빠져 있으며 ‘녹색’은 ‘인류의 보편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종 내부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녀는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며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성관계-성노동-성장치’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반면 홍성태는 “사회운동의 생태적 전환과 연대”에서 “자연은 노동자와 자본가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생태적 전환은 환경운동의 특수한 과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의 보편적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갑희에 의해, ‘인류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강조한다고 비판받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사회에서 “토건국가는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병”이라고 하면서 “신자유주의나 한미FTA보다 토건국가가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토건국가의 개혁을 가장 핵심적인 연대의 목표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토건국가와 학벌주의’를 개혁하고 ‘생태복지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녹색개혁론은 “시장과 국가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고 서영표에 의해 비판되고 있다.
이처럼 적·녹·보라의 연대는 결코 쉽지 않은 쟁점들을 가지고 있다. 녹·보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것은 ‘적(赤)’이다. 심지어 고정갑희는 ‘적’에 대해 만약 가부장제를 문제화하면 본인들 스스로 너무나 괴로운 그 어떤 것에 직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의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상품생산’에 중심이 가있다고 맑스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홍성태도 “노동운동을 핵심으로 하는 좌파-진보 전체가 사실상 토건국가와 학벌사회의 문제에 거의 완전히 무심하다.”고 하면서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그 저지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호간의 비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기본적으로 노동, 생태, 노동에 대한 자기비판을 동반하고 있다. ‘적색’의 입장에서 연대를 모색하는 박영균은 “오늘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적·녹·보라의 연대를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에서 계급환원적이고 생산중심적인 전통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노동과 자본은 이미 제도 안에서 협상 파트너로 존재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본의 한계지점으로 ‘자연’과 ‘노동’에 주목하고 반자본적 공통성에 근거한 적·녹·보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여기서 생산중심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메커니즘에서 제기되는 생산-소비(재생산)의 이원화와 ‘정서노동의 상품화’, ‘그린의 상품화’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광일은 “진보적 정당의 분화와 새로운 진보·좌파정치의 모색”에서 더 나아가 진보신당이 내걸었던 4대 가치가 구체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구호에 머무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인민민주주의 전통의 재구성, 코뮌주의, 역사적 사회주의의 배타적이지 않은 전유”를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지역”에 주목하면서 “진보의 재구성”과 연대의 문제가 “단지 기존 정당정치세력들 사이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그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운동정치의 재편을 포괄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구성”과 관련해서도 선 정당 건설 후, 다양한 사회운동들과 논의를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자기비판과 연대의 모색은 서영표의 글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서영표는 “한국의 녹색담론과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와 녹색담론의 관계를 4가지 유형, “실용적 녹색정치 담론, 녹색개혁론, 방어적 생태마르크스주의, 비판적 생태마르크스주의”로 구분하고 이 담론이 가진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비환원론적 유물론을 통한 생태사회주의 재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비환원론적 유물론은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로부터의 비판에 근거하여 구성되는 생태적 사회주의로서, 급진적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기획된 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적·녹·보라조차도 동일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홍성태의 글과 서영표의 글은 동일한 녹색을 공유하지만 서로 틀리며 이광일과 김원의 글은 노동에 주목하면서도 강조점은 약간 다르다. 김원은 “지역, 사회운동 그리고 대안노조: 지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평가하며”에서 “사회운동이나 대중운동을 동원하는 정당이 아닌 대중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인 지역에 터한 ‘사회운동을 위한 정당’ 혹은 ‘운동을 위한 정당’으로의 방향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광일과 김원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광일은 새로운 정당 구성과 ‘민중의 집’과 같은 프로그램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김원은 “‘당 운동의 상대화’ 내지, 운동을 지도하는 정당의 역할 조정”을 이야기하면서 “정당운동, 사회운동, 지역 주민운동 등을 포괄하는 ‘대안적인 노조 모델’”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엄은희는 “한국 환경운동사의 재조명과 공명(共鳴)의 과제”에서 주류 환경조직과 다른 “한살림”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는 한살림이 “가치나 이념 지향에서 산업주의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주류 환경운동 조직이 개발사업 반대나 정책 로비에 집중하는 반면 이들은 공동체 건설이나 교육 문제, 농산물 직거래 등의 일상의 변화를 추구”했다고 평가하면서 “풀뿌리 실험과 생태공동체”, “생협과 윤리적 소비”, 그리고 “녹-적 연대에 의한 지역에 뿌리 내리기”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단단히 움츠린 채 고립된 개개인의 마음과 공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공명’에 주목하는 논의 외에도 ‘정치’에 주목하는 논의도 있다. 김경희는 지난 10간의 국가페미니즘을 분석하는 글, “신자유주의와 국가페미니즘”에서 다른 어떤 논자들보다도 구체적인 역사를 들어 여성운동과 정치운동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10년간의 국가페미니즘이 “많은 성과를 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흐름의 의도하지 않은 용인 속”에서 “여성운동과 정부”가 “내부의 동맹세력”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여성운동이 “여성의 차이를 가르는 주요 축인 계급과 젠더 이슈를 운동에 담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젠더나 계급 어느 한쪽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젠더와 계급의 교차성을 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맥락에서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는 여성들의 차이를 의제화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자들에 따라 적·녹·보라의 연대를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공유하는 지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뒤섞임, 또는 복잡한 상호교차와 어긋남은 단순히 논자들의 이론적 입장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 입장은 현실의 반영이다. 그것은 곧 이들이 가진 관점의 다양성이 오늘날 적·녹·보라가 교차되는 현실의 다양성과 중첩성, 그리고 현실의 억압이 유발하는 긴박성을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제는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과 질곡들, 투쟁과 삶의 현실로 돌아가는 듯하다.
애초 진보평론은 40호 특집으로 적·녹·보라의 자체 평가에 기반한 연대를 기획하였다. 이 기획은 과거 10년 간 진행되어 온 고립을 벗어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진보평론편집위원회는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독자나 필자들은 이번 글을 보고 또 다른 절망감에 빠지거나 소통의 어려움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작업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위의 글들이 보여주듯이 오랜 세월 동안의 ‘소통의 단절’은 많은 불신과 오해를 낳았으며 언어 사용의 차이들을 가져왔다. 우선은 이런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 때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입장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더 밀고 나아가 확장할 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하면서 소통과 연대를 위해 꼭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태, 여성, 노동’, 또는 ‘적·녹·보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였다. 위의 글들이 보여주듯이 적/녹/보라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적 내부에도, 녹 내부에도, 보라 내부에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특권화하고 노동자는 마치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여성을 특권화하고, 생태는 자연을 특권화한다. 그러나 노동부, 여성부, 환경부가 이미 국가 장치의 중요한 부서라는 점에서 어느 하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 여성, 생태를 가지고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노동, 여성, 생태의 정체성이 노동과 여성, 생태 안에서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차이보다 큰 것일까? 그것이 의문스럽다. 만일 그것이 의문스러운 것이라면 애초 노동, 여성, 생태로 구분하고 있는 우리의 언어적 월권은 명백히 함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며 어떤 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며 소통을 전개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만일 우리가 이 내적 차이들을 주목하고 ‘적/녹/보라’의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균열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며 연대의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꿈꾸어 본다.
◈ 목차 ◈
편집자의글 희망의 정치 - 적·녹·보라의 연대
특 집 여성·환경·노동운동 평가를 넘어 연대를 향하여
특집Ⅰ여성운동 평가와 연대 모색
- 신자유주의와 국가페미니즘 김경희
-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진보와 패러다임의 전환 고정갑희
특집Ⅱ 환경운동 평가와 연대 모색
- 한국 환경운동사의 재조명과 공명(共鳴)의 과제 엄은희
- 한국의 녹색담론과 사회주의 서영표
- 사회운동의 생태적 전환과 연대 홍성태
특집Ⅲ 노동운동 평가와 연대 모색
- 지역, 사회운동 그리고 대안노조: 지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평가하며 김 원
- 진보적 정당의 분화와 새로운 진보·좌파정치의 모색: 이념의 재구성과 숙고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 이광일
- 오늘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적·녹·보라의 연대를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 박영균
정세 일중독, 성장 중독증, 중독 정치: 그 종말은 어디? 강수돌
국제 프랑스 반(反)자본주의신당(NPA)의 도전과 현실 오창룡
일반논문
-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 정성훈
-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대안적 모델과 ‘베이징 평화 프로세스’ 이유철
- 오르가즘과 성혁명: 빌헬름 라이히의 논의를 중심으로 윤수종
기획번역 : 실베레 로뜨링제· 안토니오 네그리 대담 혁명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 가격 : 13,000원/ 1년구독료 5만원/ 2년9만5천원/ 3년 13만5천원
매월 4,300원(계좌이체나 CMS 신청 가능)
◉ 문의 : 02) 2277-7950/ jbreview@jinbo.net/ FAX:02) 6008-5138
http://jbreview@jinbo.net
진보평론 사무실이나 서점(알라딘, 교보, 영풍, 풀무질, 그날이오면 등)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