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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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 1-이성에서 정신으로
이병창 2019.06.25 41
정신장 주석 1-이성에서 정신으로

1)
헤겔 정신현상학 정신 장 주석을 시작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이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그동안 번역했던 책을 출판하는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생각을 일반인에게 쉽게 전달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 뿐 아니다. 헤겔의 말을 과연 구슬 꿰듯 해석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한 해석은 많다. 내가 그런 해석을 버리고 주석을 시작한 것은 물론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해 보자는 뜻에서였다. 그 이상의 뜻이 있었다. 기왕의 헤겔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독일과 한국에서 떠돌아다니는 주류 해석의 문제점을 언젠가 지적한 적이 있다.) 헤겔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을까? 주석을 통해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두 개의 점을 지나는 선은 수백 개 그릴 수 있지만 수십 개 점을 동시에 지나는 선을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해석자가 두 개의 점을 지나는 선을 긋는 자라면 주석자는 수십 개 점을 지나는 선을 그려내려 한다. 그러니 주석을 통해 주관적 해석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주석은 너무 힘들다. 헤겔의 모든 말을 구슬 꿰듯 꿰어 찬다는 일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대한 주석을 언제 다 달까, 까마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때문에 주석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해놓고도 오래 망설였다.

최근 예수의 말이 생각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면서 예수는 하나님께 제발 그 잔을 치워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았고, 예수는 그렇다면 기꺼이 그 잔을 들겠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 든다. 내게는 나에게 명령할 하나님은 없지만 이 주석을 나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헤겔의 비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다시 그 잔을 들기로 했다.

2)
정신현상학 정신 장의 서론은(빨간 책, 238쪽에서240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에서(238:3-238:28) 헤겔은 이성에서 정신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둘 째 부분에서(238:29-240:7) 정신 장에서 정신적인 발전의 기본적인 목표가 제시된다. 셋째 부분에서(240:9-240:26) 정신 장의 이행과정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면 이성은 왜 정신으로 이행했는가? 이성을 헤겔이 어떻게 정의하는가 보자.

“이성은 정신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이 진리로 고양했기.... 때문이다.”

“정신의 생성은 직전의 운동이 보여준다. 거기서 의식의 대상 즉 순수 범주가 이성의 개념으로 고양한다.”

이 두 글을 함께 읽으면 여기서 핵심되는 것이 ‘순수 범주’와 ‘모든 실재성’이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수 범주’가 ‘모든 실재성’으로 되는 것이 이성이 정신에 이르는 과정이다.

3) 칸트 선험철학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의 철학의 원천으로 돌아가 보자. 헤겔 철학의 원천은 칸트의 선험철학이다. 칸트는 그의 선험철학에서 사유의 범주가 대상을 규정한다고 주장했다(여기서 범주란 말이 중요하다. 범주란 개별 개념과 달리 하나의 체계 속에 존재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은 세계를 항상 인과성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바라본다. 순수한 경험이란 없다. 모든 경험은 경험되는 순간 이미 인과성의 틀에 의해 규정된다.

칸트는 이런 사유의 범주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라 보았다. 범주가 보편적이므로, 칸트는 범주적으로 인식된 세계도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것이라 보았다. 그런 보편적 세계가 곧 현상이다. 반면 실재 그 자체는 현상을 넘어선 물 자체이다.

칸트에서 선험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헤겔이 ‘순수 범주’와 ‘모든 실재성’이라는 말도 거기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헤겔이 ‘순수 범주’라 했던 것은 곧 칸트가 말한 인식의 선험적 범주를 말한다. 헤겔이 ‘모든 실재성’이라 한 것은 실재 그 자체 즉 물 자체, 객관성을 말한다.

그런데 칸트는 현상과 물 자체를 단적으로 분리했다. 이것이 칸트 선험철학의 아포리아였다. 칸트 이후 헤겔에 이르기 까지 독일 고전철학은 그런 분열에 머무를 수 없었다. ‘순수 범주’가 ‘실재 그 자체’가 되는 것, 즉 보편적 현상 세계를 넘어서 객관적인 실재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독일 고전철학자의 소망이었다.

이런 소망 가운데 셸링 등 낭만주의는 칸트의 선험철학 자체를 벗어난다. 낭만주의는 직접지, 순수 직관 개념을 도입하면서 물자체를 만나는 어떤 인식 수단을 가정한다. 하지만 헤겔은 그들과 다르다. 오히려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칙을 고수한다. 헤겔은 칸트가 물 자체를 현상과 단적으로 분리한 것은 과잉적인 문제 제기였다고 생각한다.

4)
오히려 문제는 칸트가 인식의 범주를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가정했다는 데 있다고 헤겔은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인식의 현상계와 물 자체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선천적 범주라는 개념에 머무르면, 외부적 경험은 어디서 주어지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헤겔은 칸트가 제기한 외부적 경험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면서 인식의 범주를 역사적으로 보았다. 인식의 범주는 모순에 부딪히는 제한적 범주에서 모순이 사라지는 포괄적 범주를 향해 나간다. 그것을 매개하는 과정이 인식의 모순(모순의 경험)이다.

무모순적 포괄적 범주에 이르게 되면 그런 인식의 세계가 객관적 실재, 물 자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현상 세계가 물 자체가 아닐 수도 있으나 적어도 역사적 과정에서 주어진 외부적 경험, 모순의 경험을 통해 물 자체의 세계와 수많은 통로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그런 역사적 통로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순수한 물 자체라는 문제는 무의미한 문제가 된다.

나는 언젠가 헤겔의 세계관을 동굴의 천장에 매달린 모기장에 비유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기장 안에서 모기장을 바라보고 그것을 세계라 한다. 우리는 그 모기장을 밖을 벗어나서 동굴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모기장이 동굴과 전혀 다른 현상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못을 통해서 모기장은 동굴 벽에 접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기장이 천장에 매달린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동굴 천장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어쩌면 신은 동굴을 밖에서 본 모습을 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동굴 밖의 모습은 불필요하다. 모기장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한 그 속에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선험 철학적 사유를 자아와 대상의 통일 즉 객관적 인식이라는 철학적 목표를 통해 제시한다. 유한한 범주를 통한 인식에서 나와 대상은 분리한다. 이때 나의 범주는 주관적이며(즉자) 그러기에 대상은 다만 자아에 대립하는 대상(존재)이다. 반면 나의 범주가 포괄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객관적이며 그러기에 대상은 곧 내가 실현된 존재가 된다. 대상과 나는 일치한다. 헤겔은 이런 선험철학적 믿음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이성의] 확신은 자신을 그의 세계로, 그의 세계를 자신으로 의식하면서 이성은 정신이 된다.”

이 구절 자체는 자아와 대상의 통일이라는 객관적 인식의 상태를 설명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통일을 어떻게 도달하려 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식의 무모순성(포괄성)이다.

4) 관찰하는 이성
헤겔은 근대 자연과학을 ‘관찰하는 이성’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인식의 통일성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식은 이성을 추구한다. 이성이란 누구나 인정하는 일반적 인식을 말한다. 상호 주관성 또는 대화적 이성 개념과 어울린다.

관찰하는 이성은 경험주의이지만 근대 경험론과는 구분된다. 근대 경험론은 경험의 개별성과 순수성을 고집한다. 그 때문에 근대 경험론은 지각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 다시 원초적 감각으로 이행한다. 이 원초적 감각이야 말로 가장 개별적이고 가장 순수하다. 근대 경험론은 이런 원초적 감각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반면 관찰하는 이성은 이성적 경험론이다. 우선 이 경험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에 따라 경험이 범주적 경험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범주적 경험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성적인 경험이 되기를 요구한다.

흔히 근대 경험론은 경험적 자연과학을 정당화하는 철학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실천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경험과 근대 경험론적 경험 개념은 다르다. 오히려 자연과학적 경험 개념은 헤겔이 말하는 관찰하는 이성 개념이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

관찰하는 이성은 진정으로 자아와 대상의 통일 즉 순수 범주의 실현에 도달하는가? 헤겔은 관찰하는 이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관찰하는 이성에서 자아와 세계....의 순수한 통일은 ‘즉자 또는 존재’로서 규정된다.”

여기서 ‘즉자 또는 존재’라는 말은 헤겔에서 주관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실현되지 않는 이상이라는 의미이다. 관찰하는 이성이 이런 주관적 가능성에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편적 경험과 무모순성은 서로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유명한 베이컨의 4대 우상론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동굴의 우상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즉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은 모두 보편적 경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모순성,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5)
관찰하는 이성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관찰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은 인식적 이성 즉 주어진 자연 속에서 자신의 범주를 발견하려 했다. 이런 한계 앞에서 관찰하는 이성을 넘어서 새로운 이성 개념이 출현한다.

이 이성 개념을 헤겔은 인식하는 이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성 속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여기서 헤겔이 얼마나 칸트의 철학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발견한다. 우리는 칸트가 이론이성에 대해 실천이성을 대립시킨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을 헤겔에서 다시 발견한다. 헤겔은 이런 실천 이성을 “이성적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간단히 실현하는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식하는 이성(즉 관찰하는 이성)이 대상을 전제하고 보편적 범주를 거기서 발견하고자 한다면, 실현하는 이성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이성이 실현한 대상이 곧 ‘사태 자체die Sache Selbst’이다.

이런 사태 자체는 단순히 내가 개인적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라면 나한테는 진리이지만 타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헤겔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사태 자체를 사회적 생산 속에서 발견한다.

사회적 생산이란 곧 상품 생산 사회를 말한다. 이런 상품 생산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생산한다. 이런 이성의 실현은 근대 민주주의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대표에게 자연권을 이양한다.

헤겔은 근대 상품 생산 사회나 민주주의 사회는 사태 자체라는 개념의 출발점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운명, 필연성 개념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품 생산을 보자. 나는 생산하지만 나의 상품은 판매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열심히 일했지만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나는 생산하기 이전에는 그런 판매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후일 마르크스는 이런 필연성을 인간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헤겔은 필연성 개념을 통해 그런 소외 개념을 선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개인을 지배하는 필연성 개념은 근대 민주주의라는 형식 속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도 개인은 자신이 선출한 대표자에 의해 오히려 지배당한다. 그 메커니즘은 상품 생산의 매커니즘과 동일하다.

헤겔은 이런 소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태 자체를 구성하는 이런 추상적 규정을 통해 처음으로 정신적 본질이 출현한다. 그러나 그 의식[개체적 의식]은 아직까지는 정신에 대한 형식적인 인식일 뿐이다.”

헤겔은 이런 소외를 더 구체적으로 자아와 세계 두 측면에서 살펴본다.

“그런 인식은 실체로부터 사실상 여전히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있으며, 자의적인 법칙을 주거나 ....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실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사태 자체의] 추상적 규정은 ...정신적 본질이면서도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즉 외적인 필연성으로 주어진다].”

상품 생산 사회나 근대 민주주의 속에서 이성은 마침내 보편적 범주가 ‘모든 실재성’이 된 것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이성의 최종단계가 된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의 소외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소외를 극복하려는 운동이 새로 펼쳐지게 되니, 그것이 곧 우리가 들어가려는 정신 장의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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