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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16)-양심의 공동체
이병창 2020.03.23 33
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16)-양심의 공동체

1) 양심의 언어

앞에서 양심이 지닌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양심은 우선 사건의 인식에서 포괄적 인식이 가능한지, 법칙의 인식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지 의문이었습니다. 또한 양심은 도덕성을 자아의 자기 확신에서 끌어내는데, 그게 과연 누구나 인정하는 것인지 문제 됩니다.


하지만 양심 자신은 이런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양심은 의무와 자아의 통일이므로, 양심은 개별 자아가 이런 의무를 직접적으로 인식한다고 믿어 마지않죠.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가 그의 인식을 확신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는 그의 의도의 순수성을 믿습니다.


그의 의도의 순수성은 그가 자신의 의도를 말로 표현한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진실로 믿고 또 그의 말에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하죠.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그게 그가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자기 확신하는 자아가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곧 법칙이고 의무이다. 그의 의도는 그가 의도한 것이므로 곧 올바른 것이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그가 이것을 안다는 것이며, 그가 자기의 인식과 의욕이 올바른 것이라는 것에 대한 그런 것에 대한 확신을 말로 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이렇게 말을 중시하는 것은 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행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위는 구체적 상황에 제약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반면 말의 현존은 구체적 상황에 무관한 일반성을 지닌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는 이런 양심을 본질적으로 말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자아는 동시에 일반적인 자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행위가 지닌 내용 속에서 이런 일반적 자아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행위의 내용은 그 규정성 때문에 본래 무차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일반성은 오히려 행위가 지닌 형식에 있다... 그 형식이 자아이며, 이 자아는 언어 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실화되며, 자신을 진실된 것으로 말하며 바로 말하는 가운데 모든 자아를 인정하며, 그들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2) 양심의 보편성

실제로 헤겔이 말하듯이 우리는 이런 양심적 인간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는 사실 자기가 확신을 가지기 전에는 자기를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 가운데 자신이 확신을 얻기까지 기다리죠. 그는 고민하면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어느 새벽에 그는 문득 거의 근거도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을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하죠. 그는 결의에 차서 자신의 확신을 발표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그 누구라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로 할 때 그런 결의로 말했기 때문이며, 그런 결의는 자신의 내적 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순수한 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다른 사람이 그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가 순수한 양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되죠.


헤겔은 이런 양심적 인간의 결의에 찬 말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양심은 자신을 양심이라 부르므로, 자신은 순수한 자기 인식이며, 순수한 추상적인 의욕이라 부르며, 즉 자신이 일반적인 인식이며 의욕이라 부른다. 다른 사람도 이를 인정한다. 다른 사람이 바로 순수한 자기 인식이며 의욕이기 때문에 그런 인식과 의욕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며, 그러므로 그들에 의해 인정된다.”


3) 시인 잔트의 코제부 살해 사건

양심은 자신의 확신을 도덕성의 근거로 삼기에 이제 이렇게 확신하는 자아 즉 양심이 객관적인 도덕 법칙보다 더 탁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이제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 들어오면 무엇이나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죠. 이런 점에서 헤겔은 양심을 ‘도덕적 천재 die moralische Genialitaet’라 말합니다.


“이런 도덕적 천재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내적인 소리를 신의 소리로 인식한다. 이런 내적 목소리는 그렇게 인식이 되는 순간 직접적으로 현존을 인식하기에, 이 도덕적 천재는 개념을 통해 생명을 얻는 신적인 창조력을 지닌다. 이 도덕적 천재는 자기 내에 존재하는 신의 역사[役事]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자기의 고유한 신성에 대한 직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양심은 신적인 창조력을 지닌다 합니다. 즉 자기가 생각만 하면 바로 현존하게 된다는 거죠. 마치 신의 현존이 그 개념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헤겔이 양심을 그렇게 풍자하는 이유는 양심이 내적 확신을 말로 하기만 하며, 그것이 곧바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일반적인 것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양심의 문제는 헤겔 당시에 하나의 사건으로 출현했습니다. 시인 잔트가 러시아 스파이로 알려진 코제부를 살해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낭만주의적인 학자들은 특히 사비니가 양심에서 나오는 일은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이런 사비니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은 1807년 작성되었으니, 이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입니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미 그런 사건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4) 양심의 공동체

양심은 이처럼 내적인 확신이 곧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서 낭만주의자의 공동체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제 그의 양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같은 양심적 존재이며 만일 그의 양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비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비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양심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반은 내적 확신이 말로, 즉 결의에 찬 말로 표현되었을 때입니다. 타인 역시 자신의 양심을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말과 말이 서로 어울리면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죠.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말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실천으로 나가는 한 그것은 현실의 제약을 받아, 양심의 순수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말이 그 공동체의 기반이며 또 모든 것입니다.


“이 고독한 신의 역사는 동시에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신의 역사가 된다.”


“이런 언표를 통해 자아는 타당한 것으로 되며, 행위는 수행된 행위로 된다. 그의 행위의 현실과 존립은 일반적인 자기의식[의무, 도덕법칙]이다. 그러나 양심의 언표는 자기 자신의 확신을 순수한 자아로 따라서 일반적인 자아로 설정한다. 다른 사람은 .... 이 말 때문에 그 행위를 인정한다. 그들을 결합하는 정신과 실체는 서로의 양심성과 선한 의도에 대한 상호의 확신이며, 상호의 순수성에 대한 경탄이며, 인식과 언표의 진정성에서 나타나는 생기이며, 그와 같은 탁월성을 간직하고 육성한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생기이다.”


대체로 이들은 주로 술자리를 이용합니다. 왜냐하면 술은 자신의 내면의 말을 곧바로 표현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술은 사람을 단순하게 해서 그의 말을 결의와 확신으로 가득 차게 하죠. 이렇게 술자리에서 낭만주의적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술에 깨어난 아침이 되면 이들은 자신의 결의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면 그는 다시 저녁에 술자리를 가집니다. 그러면서 어제보다 더 확신에 찬 결의를 하게 되죠. 그러므로 대부분의 낭만적 공동체는 술자리에서 형성되는 술자리에 머무르는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술자리는 대체로 서로의 양심성을 확인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타인을 비판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타인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비양심적인 존재가 됩니다. 서로의 양심성의 확인, 타인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들은 마치 진정한 우정을 지닌, 어떤 힘도 그 결속을 깨뜨릴 수 없는 형제로 선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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