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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8)- 계몽주의 결론
이병창 2020.01.17 25
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8)- 계몽주의 결론


1) 개념의 위력

이제 2절 계몽주의 절에서 계몽과 신앙의 투쟁을 다루는 a 항을 마무리하고 이어서 b 항 즉 계몽의 진리로 이행할 단계입니다.


이 마무리 부분에서 우선 헤겔은 ‘개념의 위력[die Macht des Begriff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헤겔에게서 가상과 이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감각적인 것은 그 스스로 부정되는 가상이고 이를 통해 이념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 즉 개념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통찰은 모두 두 계기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감각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통찰은 주관적인 자아와 보편적 자아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사실은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 작용하죠. 하지만 신앙과 통찰은 아직 개념적 관계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자각되지는 못하지만 이미 작용하는 개념의 위력은 신앙이나 계몽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출현합니다.


신앙에서 감각적 존재는 절대적 존재의 현현, 또는 그 현상으로 간주됩니다. 마찬가지로 계몽도 감각적 존재를 절대적 공허와 결합합니다. 이런 관계는 모두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 아니라, 감각적 존재와 절대적 존재가 서로 접합해 있는 방식입니다.


신앙에서 절대적 존재가 감각적 존재에 접합된다면 계몽에서는 절대적 공허가 감각적 존재에 접합됩니다.

2) 신앙과 계몽의 투쟁

이제 a 항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신앙의 3 계기가 언급됩니다. 헤겔은 이미 앞에서(299:16-302:28) 신앙의 3 계기 즉 조각상, 성서, 성사에 대한 계몽의 비판을 설명했습니다. 내용은 대개 동일합니다.


신앙에게서 이 감각적 계기는 핵심이 아니고 부차적인 것일 뿐인데, 계몽은 마치 이 계기가 신앙의 핵심이라고 오해하고 이를 비판합니다. 이런 오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반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복이기는 하지만 헤겔의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기로 하죠.


a) 신앙은 조각상을 신뢰합니다. 이 신뢰 속에 이미 그것이 그의 행위를 통해 산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죠.


계몽은 신앙의 감각적 계기를 비판하면서 그것은 유한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신앙이 위에 말한 신뢰를 통해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b) 신앙은 성서에 나오는 지식을 우연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동시에 절대적 존재에 대한 정신적으로 직접적인 지식을 주장하죠. 계몽은 이런 신앙에게 성서는 우연적이라고 비판합니다.


c) 계몽은 성사에서 향락과 소유의 포기를 비판합니다. 그것은 부당하고 또 합목적적이지 않다는 거죠.


우선 부당한 이유는 그런 포기가 향락과 소유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소유와 향락에 집착할수록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더욱 성스러운 것으로 인정될 테니까요. 결국 신앙의 포기는 다만 소유나 향락의 일부에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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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합목적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와 향락의 일부분을 포기한다고 소유나 향락 그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목적은 일반적인데 행위는 개별적이니 그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거죠.


3) 계몽의 비판 방법

최종적으로 헤겔은 신앙에 대한 계몽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 비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계몽이 신앙을 비판하는 태도는 신뢰와 직접적 확실성이 지닌 아름다운 통일성을 분열하는 것이며, 정신적인 의식을 감각적 현실에 대한 비열한 사상으로 더럽히고, 신에 대한 순종 속에서 고요히 머물고 확신을 느끼던 심정을 지성과 자만적인 의지와 실행이 지닌 공허함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앙이 지닌 감각적 계기를 폭로하는 겁니다. 사실 신앙의 이 감각적 계기는 신앙에게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계몽은 신앙의 실상이 그 감각적 계기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계몽은 오히려 신앙 속에 현전하고 있는 분열 즉 사상이 결여된 또는 오히려 개념이 결여된 분열을 지양하도록 이끈다. 신앙하는 의식은 두 개의 척도와 저울추를 운행하며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 두 개의 혀,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모든 표상을 이원화하면서 그 이원성을 비교도 하지 않는다.”


계몽의 비판은 신앙으로서는 억울하지만 오히려 긍정적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앙은 사실 감각적 존재와 절대적 존재 사이에 분열에 처해 있고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죠. 계몽의 비판을 통해 양자 사이의 분열을 자각하게 됩니다.


4) 프랑스 혁명

이제 개념적인 근본적인 통일에 이르는 운동이 일어나지만 아직은 멀리 있고, 그리로 향한 운동은 아직도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일단 신앙은 감각적 계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 지녔던 감각적 계기는 약탈당하죠. 그 감각적 계기는 다시 지상의 왕국으로 반환됩니다. 헤겔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신 신앙은 절대적 존재에 대한 직접적 만남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것은 언어로 되지 않고 몸으로 느껴지는 감정적 만남이죠. 헤겔의 이런 말은 개신교적 신앙에 적절한 말입니다. 헤겔은 이를 “정신이 둔중하게 자기 내에서 거미줄을 치는 상태”로 침몰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감각적 계기를 박탈당한 신앙에게는 절대적 존재는 공허하며, 피안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곳이니, 따라서 신앙은 ‘순수한 동경’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내용이 없으며 이런 공허 속에 머무를 수 없으므로, 또는 신앙은 유한성을 넘어서 다만 공허만을 발견하니, 신앙은 이제 순수한 동경이 된다.”


계몽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몽은 감각적 존재를 절대화하니, 그것은 공허와 마주 대해 있습니다. 감각적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도 동시에 공허한 존재입니다. 양자의 통일체가 곧 앞에서 설명한 유용성의 세계이죠.


그런데 계몽 역시 이런 공허한 세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제 계몽은 이런 오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계몽 자신도 만족하지 못하는 동경이라는 오점을 그 자체에서 지니고 있으니, 그 오점이란 곧 공허한 절대적 존재에 매달린 순수 대상이며, .... 피안을 향한 초월에 매달린 행위와 운동이며, 자아를 상실한 유용성에 매달린 충족된 대상이다.


그래서 공허한 절대적 존재에 매달린 순수 대상, 그것이 곧 유용성의 세계인데, 이 유용성이 벌이는 투쟁이 곧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입니다. 이 소용돌이는 끝내 절대적 공포를 낳으면서 마침내 새로운 정신 즉 칸트의 도덕 정신을 탄생시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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