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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7)- 유용성의 개념
이병창 2020.01.09 26
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7)- 유용성의 개념


1) 탈성화

헤겔이 보기에 근대 세계는 서로의 생산이 시장에서 교환되는 사회입니다. 이 속에서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교환을 통해 작동합니다. 그래서 개인은 자기를 위해 행동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전체에 의해 지배됩니다.


신앙은 이런 보이지 않는 전체 즉 절대적 존재를 믿음 즉 순수의식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이 절대적 존재가 감각적인 것을 통해 상징된다고 봅니다. 반면 계몽은 타인의 주관성을 비판합니다. 계몽은 보편적 자아이지만 이 보편 자아는 경험적 자아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나뭇조각이나 성서에 적힌 글자 또 고행[대타적 존재]을 보면서 그 너머에서 있는 존재[절대적 존재, 즉자 존재]를 믿습니다. 계몽의 진실은 앞에서 데카르트적 자아로 설명했습니다. 보편적 자아가 경험적 자아에 실려 있는 거죠. 비유하자면 카메라의 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의 시선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원근법적으로 파악합니다. 이런 시선은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시선의 중심은 카메라라는 어떤 물체에 실려 있습니다.


계몽은 신앙을 비판하면서 조각이나 성서, 고행은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지 절대적 존재가 거기 현현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런 감각적 사물 너머 있는 절대적 존재는 어떤 규정도 없는 것, 즉 공허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감각적 사물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감각적 사물 자체를 절대화하는 것이죠. 다른 의미에서 감각적 사물은 절대자에 비해 무의미한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은 신앙적 대상을 탈 성화합니다.


그런 탈성화는 마치 인간의 신체가 근대에 들어와서 더는 신비한 의미를 지니지 않고 그저 해부의 대상이 되는 육체로 전락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또 여성이 신비를 상실하고 하나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유용성의 세계

이상이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한 겁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이어서 오늘은 304:23에서 307: 19까지를 읽어보기로 하죠.


우선 헤겔은 계몽의 결과로 유용성의 세계가 등장한고 합니다. 이 유용성이란 개념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요? 계몽주의를 유용성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헤겔의 특징인데, 이 유용성의 개념은 실용주의와는 구분됩니다.


유용성의 세계는 모두가 서로 수단이 되는 세계인데, 사드의 법칙이 아마도 이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타인의 육체를 이용하도록 하자. 이는 누구나 자기를 목적으로 삼는 목적의 왕국이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뒤집어서 사드가 만든 원리이죠. 헤겔은 바로 이런 사드의 원리가 근대 계몽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헤겔에게서 이런 유용성의 세계는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죠. 앞에서 계몽의 긍정적 결과를 말하면서 계몽은 신앙의 대상인 나무, 성서, 고행 등이 하나의 감각적 사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 너머에 있는 절대적 존재는 공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한편으로 감각적 사물은 그 자체가 절대적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무의미한 존재인데, 헤겔은 전자를 즉자의 측면으로 그리고 후자는 대타적 존재라는 측면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계몽의 세계를 이제 유용성의 세계로 규정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은 자기가 목적이며 다른 것은 자기를 위한 수단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며 거기에 완강하게 저항해 자신을 목적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대타적이며 그에 못지않게 즉자적이다. 또는 모든 것은 유용한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를 타자에게 희생하며 자신을 타자가 사용하도록 허용하며,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은 다시 완강하게 저항하며, 타자에 대해 냉담해지고,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타자를 자기 편에서 사용한다.”


3) 인식의 열매

이렇게 해서 서로 이용하고 이용되는 계몽의 세계가 열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용할 뿐만 아니라 이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계몽은 처음에는 자신이 순수한 보편적 자아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경험적 자아라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계몽은 신앙과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도 하나의 경험적 자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이제 그는 자신도 다른 존재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계몽은 이런 인식을 통해 마침내 자신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 점과 연관해 헤겔은 성서에서 인식의 열매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를 따서 먹었어야 했다. 인간은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은 자기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추론합니다: 만일 인간을 자연적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한없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만든다. 반면 이성은 여기에 일정한 제한을 부여하여 자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인식의 열매 따먹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이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유지하면서 다른 자기 파괴적 존재로부터 구분됩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자신도 하나의 대타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신만이 보편적 자아라는 자기도취를 벗어나게 되었던 거죠.


4) 종교의 유용성

계몽이 보기에 모든 것은 유용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종교가 가장 유용한 것이지요.


“종교야말로 모든 유용한 것 가운데 가장 유용한 것이니, 왜냐하면 종교는 순수한 유용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유한한 존재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를 통해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보편적 자아일 뿐만 아니라 자신도 역시 타자에게 유용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자가 종교를 부정하면서도 종교가 도덕을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헤겔이 풍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 신앙의 오해

신앙이 볼 때 계몽은 자기에 대한 왜곡이며 계몽이 볼 때 신앙은 기만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순수 사유의 신성한 권리를 주장하고 반면 계몽은 자기의식의 인간적 권리를 주장합니다. 두 권리는 서로 절대적 권리로 주장합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볼 때 이런 계몽의 주장은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앙은 모든 것에 신이 현현한다고 보는데, 계몽은 이런 사물에서 신을 추방하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존재는 공허에 불과하다거나, 종교는 도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계몽주의자의 주장은 신앙이 보기에 혐오스러운 주장입니다.


“계몽의 고유한 지혜는 신앙에게는 필연적으로 진부함 자체로 그리고 또한 진부함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란 절대적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지혜는 절대적 본질은 다만 절대적 본질이라는 아주 쉬운 진리만을 알뿐이다. 또한 그런 지혜는 그에 반해서 유한적 존재에 대해서만 알며 그것도 이 유한적 존재를 진리로 알면서 이런 유한적 존재를 진리로 아는 인식을 최고의 인식으로 안다.”


신앙은 계몽의 권리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개념의 부정성이므로”, 이 부정성은 이미 신앙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지니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계몽은 신앙이 지닌 두 계기 가운데 하나의 계기를 다른 계기에 보여줍니다. 신앙 자신은 자기의 이면에 다른 계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그런데 계몽이 이를 드러내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발하지만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죠.


“계몽은 신앙에게서 신앙의 계기로부터 신앙 속에 있던 것과는 어떤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타자란 마찬가지로 본질적이며 사실상 신앙 속에 이미 현존하는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런 타자는 신앙에게 낯선 것도 아니고 그 신앙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 계몽의 오해

그러나 그런 점은 계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몽은 ... 자기 자신에 관해 계몽되지 못한다.”


사실 신앙이 지녔던 계기는 계몽 역시 동일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이 감각적 존재를 절대적 존재로 본다면, 계몽은 경험적 자아 위에 보편적 자아가 실려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헤겔은 계몽의 신앙에 대한 비판은 곧 자기비판이라고 했지요. 그런데도 계몽은 이것이 자기비판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계몽은 유용성의 세계 속에서 자기도 타자가 이용할 대상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것은 생각뿐이고 실제로는 항상 타자를 이용하려고만 들지요.


“[통일의] 개념은 계몽에게 대자적으로 발생하지만 계몽은 그 개념을 단지 눈앞에 있는 것으로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본래 순수 통찰의 실현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몽의 본질은 개념이지만 계몽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 타자로 되며 자신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개념의 대립은 절대적인 대립이며, 이 타다 태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또는 개념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계몽은 여전히 순수 개념이 전개하는 의식이 결여된 활동이다. 이 활동은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에 이르지만 이 대상을 타자로 간주하며 또한 개념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구분되지 않은 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위의 두 구절에서 헤겔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가 자신의 절대적 타자로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실현이지만 그것이 자기의 실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계몽은 신앙의 절대적 존재를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사실 자신의 자아가 보편적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만 계몽은 이를 알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신앙을 비판하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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