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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개념이 없는 진보가 가능한가?
이병창 2013.01.29 356
통일 개념이 없는 진보가 가능한가?



언젠가부터 민중적 진보의 담론 속에서 통일이라는 말이 빠져 버렸다. 여전히 통일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시대착오적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통일이라는 말에 알레르기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심지어 누군가 통일을 조금이라도 열망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는 곧 종북이라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



60년대에는 통일이 먼저냐, 민주가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었다. 이런 논쟁은 80년대 들어 통일을 중심으로 하는가 아니면 민주를 중심으로 하는가 하는 논쟁으로 변화되었다. 이런 논쟁에서 선 민주화론자나 민주화 중심주의자들은 통일이란 문제를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생존권을 확보해야 할 절박한 민중적 삶 속에서 통일이란 문제는 아무래도 민중의 직접적인 이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이런 운동 이론적인 대립은 점차 해소되어나갔다. 이 결과로 이론적으로 통일과 민주는 함께 가거나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이 대두되었다. 특히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은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필연성에 대한 역설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민주화와 통일 지향적인 남북 대화를 병행한 것은 그런 논의의 산물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말이 결정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민족\ 담론의 영향이 크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 이론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합의라는 것을 사회관계의 기초로 삼고 있다. 그것이 발전하여 나타나는 것이 소위 참여 민주주의 이론이다. 미국의 공화주의자 마이클 샌델이 비판적인 관점에서 강조했듯이 이런 시민 민주주의 이론의 바탕에는 자유주의가 전제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은 자유롭게 결단하는 법적 인격 곧 시민이며, 이들 시민의 합의에 의해 사회의 기본적인 정의의 기준이 확립된다는 것이 참여 이론의 근본적인 생각이다. 미국에서는 롤즈와 같은 민주당 이론가,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유시민의 참여당 세력이 이런 이론의 대표라고 하겠다. 넓게 본다면 친노가 대부분 이런 참여 민주주의 이론을 자신의 기본 논리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참여 및 시민 민주주의자들은 민중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그들은 민중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어떤 객관적인 사회적 이해가 미리부터 그들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민중이나 민족이란 자유로운 결정이 가능한 개인 곧 시민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들이 민중의 이익이나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각 시민이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문제이지, 객관적으로 미리부터 존재하는 어떤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시대 비판적 지지 노선과 친노의 노선은 외형적으로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비판적 지지의 노선은 민중의 이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그러나 대중의 발전 속도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니 여기에는 약간의 엘리트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반면 친노의 노선은 그것과 다르다. 여기에서는 지금은 대중이 그런 것을 원하니까 그것을 하는 것뿐이며 만일 대중의 태도가 바뀐다면 하시라도 그런 민중의 이익이나 통일 지향이라는 노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것은 결코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친노 시대 참여 민주주의 이론이 대두하면서 점차 민중이라는 말도 뒷전에 밀려나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민족이나 통일이란 말이 배제, 억압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민족이란 말에 실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혈연이나 언어, 문화적 동질성을 그 기체로 삼는다는 민족이론을 비판하면서 민족이란 부르주아나 식민지 저항 지도자가 정치적인 동원을 위해 만든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남북 간의 민족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논의는 허망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 한다. 물론 지금처럼 심각한 대립 속에서 서로의 발목을 잡고 서로의 사회를 왜곡시키는 관계는 타파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또한 남북 간에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협력관계는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남북의 관계는 예를 들어 우리가 중국이나 미국과 더불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관계이지 민족이기 때문이 특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시민 민주주의 이론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민 민주주의 이론이 품고 있는 시민의 합의라는 개념이 민족 개념 그 이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시민 민주주의 이론의 원형인 근대 계약론이 어떻게 자기 도착증으로 빠지는 것인가를 정신현상학에서 분석한다. 헤겔에 따르면 결국 개인이 자신을 목적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타자를 자기를 유용한 도구로 만들고 ,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 유용한 도구에 불과한 끔찍한 근대사회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 최종적인 결말은 곧 개인이 자신의 사적이익을 보편적 이익으로 만들어, 스스로 인민의지가 되는 도착적인 사회이다. 이런 도착된 사회 속에서 합의가 존재한다면, 그 합의는 도착을 은폐하는 물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민적 합의가 도착에 빠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내적으로 이미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서 여기 저기에서 산발적으로 그 증후가 나타난다. 그러나 시민적 합의는 오늘날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원리이고 그 너머 다른 가능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시민적 합의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원리가 도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보완적인 원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시민적인 민주주의 원리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헤겔은 민족을 부족과 구분한다. 후자가 혈연에 기초하는 반면 전자는 문화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그 사회의 고유한 문화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민족이 문화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민족이 구성된 것이라는 포스트이론가의 이론을 선취하고 있다. 헤겔은 이런 민족 개념이 시민적 합의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서 그 결과 소위 민족-국가를 주장한다.



하나의 민족은 타 민족에 대립하므로 배타성을 지니고 이는 인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제한적이다. 때로 이런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타 민족에 대한 압제와 착취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에 대해 경각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민족이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있을까? 타 민족의 침략에 대해 공동으로 저항할 때 민족이 지니는 힘은 이루말 할 수 없이 강한 것이 아닌가? 그런 대외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민족은 다른 여타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서로 지역적 연고를 달리 하지만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기꺼이 협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민족이 이제 담론에서 다시 복권되어야 한다. 그부정성에 대해 경각성을 잊지 말더라도 그 긍정적인 측면을 다시 살려야 한다. 지금 내적으로 지연과 학연에 의해 분열되어 있고, 4 강대국의 포위 속에 위기에 처한 한반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민족 개념이 긍정적으로 요청되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진보 운동 속에서 통일의 담론이 다시 출현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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