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쾌락주의에서 공리주의로
쾌락주의는 개체의 행복Lust을 최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운명의 필연성에 부딪히죠. 그는 행운을 얻을 수 있으나 대부분 불운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런 운명 앞에서 개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된다면 불운보다는 행운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이렇게 해서 쾌락주의는 그보다 발전된 형태인 공리주의라는 도덕에 이르게 됩니다.
헤겔은 이런 공리주의적 도덕을 “자기 내에서 일반적인 것이나 법칙을 직접적으로(an ihm Selbst) 가질 줄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렇게 자기 내에서 법칙이 존재하므로, 헤겔은 이를 ‘심정의 법칙’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반적 행복이 결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일반적 법칙은 개체가 주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죠. 만일 전자라면 개체는 그것이 자기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추구해야 되는 당위가 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개체가 일반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그 스스로의 행복에 직결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법칙이 ‘심정적’이며 ‘직접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비록 일반적인 행복이 추구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 일차적이므로 헤겔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런 자기의식의 형태는 이전의 자기의식의 형태[쾌락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체성으로서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대자성:Fuer sich)이 본질이며, 이런 필연적인 것이거나 일반적인 것으로서 대자존재가 그에게 타당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형태보다 더 풍부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202쪽)
2)근대 공리주의와 중세 공리주의
도덕에 있어서 공리주의란 사실 19세기 후반에 성립되는 이론이고 이차 대전 직후까지 대중의 도덕관으로서 진보적인 관점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공리주의 도덕관이 중세시대에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겠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중세 공리주의와 근대 공리주의는 서로 다르다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근대 공리주의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반적인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객관적 기준은 자본주의적인 시장에 의한 가치의 결정 등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가치가 객관적으로 결정되므로, 각 개인이 마음대로 부여하는 주관적 가치를 넘어설 수 있으니, 이른바 공리주의적인 합리적 계산이 가능하게 되죠.
시장이야 어떤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 어떤 사회적 제도와 정책이나 개인의 태도나 행위의 가치까지 결정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간접적으로 결정해 줍니다. 심지어 사람의 인격의 가치조차도 시장이 결정해주는 마당이니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헤겔이 다루는 중세 시대 공리주의의 경우는 이런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니, 객관적 가치의 결정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모든 것의 가치는 각 개인이 그것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행복의 느낌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죠. 각자는 일반적인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각자 주관적으로 판단하죠.
이런 가치를 결정하는 시장이 없는 경우라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쾌락을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심각하게 문제 삼아야 할 것인 바로 사회적으로 합의된 일반적 쾌락이 실질적으로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쾌락과 전혀 상이한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게 사회를 보는 헤겔의 입장과 일반적인 입장이 지니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개체가 주장한다면, 그게 사회적 현실로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역사에 대한 주관주의적 오류도 출현하죠. 대중이 합의하여 단결된 행동을 한다면 역사는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런 생각이죠.
하지만 헤겔적인 관점에서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어떤 관계를 말합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어떤 구조를 가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보는 사회 즉 생산관계, 상하부구조 등의 개념이 이런 구조적인 관계를 보여주죠. 하지만 헤겔의 경우 사회적 구조는 끊임없는 역동적인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성립합니다. 이 역동적 관계는 타자가 그에게 외적인 존재이며, 그 타자와 맺는 외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그건 기계적이지, 역동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역동적 관계는 <자신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자기는 이미 타자로 넘어 들어가 있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헤겔의 이런 역동적 사회관계라는 개념을 수학적인 게임이론의 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또는 최근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자리는 이런 역동적 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군요.
어떻든 이런 역동적 관계 속에 있으므로 개인의 주관적 결정이 아무리 더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행위는 주관적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키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사회적 합의에 의한 다수의 선택이 결코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결과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의를 통해 객관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심정의 법칙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자기의식에게 고유한 것인 법칙 또는 그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법칙성을 따르는 심정은 실현되어야 하는 목적이다. 그가 실현하는 것이 자기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또는 그가 실현하는 가운데서 이런 법칙을 자신의 본질로 경험하게 되는지를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202쪽)
3)공리주의의 전도
이런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 ‘심정Herz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 출현하게 됩니다. 개체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게 되죠. 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현실의 고유한 개념 즉 현실의 법칙입니다. 개체에게 이 법칙은 “개체가 억압당하는 폭력적인 질서”입니다. 개체는 인류가 이런 폭력적 법칙 아래 신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심정의 법칙을 실현하려 하죠. 하지만 개체는 주관적인 심정의 법칙을 실현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의 행복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런 주관적인 심정의 법칙은 주관적인 것인 한, 결코 실현되지 않습니다. 실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항상 개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니까요.
<개체의 행복과 심정의 법칙> 짝은 <인류의 현실과 현실의 객관적 법칙>의 짝과 맞물려 있으며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잡으면 어느새 저것이 잡히죠. 그 과정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정의 법칙을 따라가면 인류가 억압당하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힌다. 그러나 이 냉혹한 현실의 배후에는 사회를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이 있다. 이제 이 법칙을 따라가면 개인의 행복을 지향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행복은 그러나 운명에 달려 있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심정의 법칙에 이른다.> 이런 끝없는 자기 전도의 게임이 여기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메비우스의 띠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냉혹한 현실’의 관계(쾌락주의)과 ‘심정의 법칙’과 ‘사회적 법칙’의 관계(공리주의)는 서로 교차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또는 양자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공리주의가 개체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는 인류의 행복 속에 자기의 행복을 감추어 놓은 것이죠. 따라서 쾌락주의에서 공리주의로 이행했다고 해서 개체의 행복이라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직 개체는 자기 자신의 교육(Zucht)를 겪지 않은 ‘직접적으로 미개한ungezogenen 존재’입니다.
심정의 법칙이 이런 공리주의를 실현하는 가운데 부딪히는 현실의 저항은 고유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여기서는 ‘심정과 법칙의 행복한 통일die beglueckenden Einheit des Gesetzes mit dem Herzen)’은 출현하지 않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의 법칙을 따르면서 행복을 결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바라는 개체에게 이 냉혹한 현실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니, 그에게서 이 현실은 오히려 그림자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의 뜨거운 머리 앞에서 현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니 간단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죠.
“그런 폭력적인 신적이거나 인간적인 질서는 심정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질서는 심정에게는 가상Schein이 된다. 왜냐하면 이 질서는 심정에게 여실하게 전달되는 현실의 힘과 폭력성을 상실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203쪽)
이렇게 심정의 법칙과 현실의 법칙 사이의 관계에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만일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라면, 방금 말한 것처럼 이런 현실은 가치가 없는 현실 즉 가상이고, “심정의 법칙이 곧 이를 대체하고 말 것으로 muss dem Gesetz des Herzens weichen” 그는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심정의 법칙이 객관적 사회의 법칙과 우연하게 일치하게 되는 경우, 그 경우 심정은 객관적 법칙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 자신의 주관적 법칙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4)두 가지 전도
심정의 법칙과 현실의 법칙이 일치하는가 아닌가는 다른 관점에서 살펴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심정의 법칙을 실현하지 못하죠. 그에게 주어지는 현실은 어떤 고유한 법칙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 현실은 그에게 “현존하는 것이라는 형식die Form des Seins”을 가지며, “적대적인 위력을 지닌 것eine feindliche Uebermacht”이 됩니다. 그런 현실은 그에게 낯선 것이니, 그는 “현실적 질서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다는 것in die wirkliche Ordnung sich zu verwickeln”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소외를 겪게 되죠. 그는 이런 소외를 통해 자신의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죠(“스스로를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킨다hat es sich von sich frei gelassen”).
이렇게 그의 마음속에서 의도했던 것과 행위의 결과 얻은 것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일반적 법칙을 추구했으니 “특정한 법칙(ein bestimmtes Gesetz)”을 추구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일반적이라 생각했던 그 법칙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체의 심정이 법칙과 직접적인 통일”에 머물렀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인식의 과정이 문제입니다. 그런 인식이 직접적, 주관적이므로 그 결과는 형식적으로는 일반적이지만 실제 내용은 개별적인 것이 되죠.
“그의 현실은 오직 일반성의 형식만을 가지며, 그 특수한 내용이 그 자체로서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204쪽)
심정이 추구하는 일반적 법칙이 사실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타인은 이런 법칙이 실현된 현실을 자기의 현실이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개체가 타인이 실현한 현실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가운데 각자는 타인이 위선이라 생각합니다. 타인이 주장하는 심정의 법칙은 “그의 탁월한 의도에 반하는 것이거나 혐오할 만한 것”(204쪽)이라 생각하죠.
다른 한편 우연하게도 개인의 심정의 법칙이 현실의 법칙과 일치된다고 해보죠. 현실의 법칙은 쾌락주의자에게서 등장했던 운명과는 구분됩니다. 그때 운명은 개인이 행위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죠. 그것은 ‘죽은 필연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자에게 이 현실은 자기를 지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든 자기의 행위의 결과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그 필연성은 일반적인 개체성에 의해서 활성화된 것(die Notwendigkeit als belebt durch die allgemeine Individualitaet)”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활성화된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미묘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출현한 현실이 실제로 객관적이라는 뜻은 아니죠. 오히려 그는 착각을 범하고 있습니다. 현실이 고유한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노력을 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저 놈 벼락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벼락이 쳐서 그 놈이 죽은 겁니다. 이때 그는 마치 자신의 기도가 실현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자주 일어납니다. 아이가 자기의 작은 기도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고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자주 소설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마술적 사고’라고 한다면 헤겔이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사고라고 말할 수 있겠죠.
“개체는 현실이 활성화된 질서이며 동시에 개체가 자신의 심정의 법칙을 실현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활성화된 것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체성이 자신을 일반적인 것으로 대상화하고, 그러나 그 속에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205쪽)
단순한 쾌락주의보다 공리주의에서 이런 착각이 잘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자기가 일반적 행복을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자기의 결과라고 착각하기가 싶죠.
이런 마술적인 사고는 실제 현실적인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이성의 간지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이 경우는 개인은 자기의 권력을 추구했는데, 결과적으로 현실을 개혁하게 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현실 자체의 발전인데, 마치 그 개인의 업적으로 간주되는 경우입니다. 단적인 예가 박정희의 경제발전이 아닐까요? 객관적으로 당시 경제 성장이 일어날 충분한 힘이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거기에 자기 숟가락을 얹은 것이고, 마치 박정희가 이 모든 일을 한 것처럼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이게 마술적인 사고에 속하죠.
5)자만의 광기와 왕의 평화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길, 두 가지 측면에 따라서 결과 개체는 현실을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산물로 보는 이중적인 사유에 빠지게 되죠. 따라서 개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 모순적이며 가장 내적인 차원에서 분열된zerruettet 존재”입니다. 이런 분열은 <개체의 행복과 심정의 법칙>/그리고 <현실의 법칙과 적대적 현실> 사이의 메비우스 띠를 통한 순환을 전제로 해서 출현합니다. 이 분열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고(주관적 법칙) 그러기에 각자가 자기 자신의 단적인 대립물(적대적 현실)로의 직접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통해 출현합니다.
헤겔은 지금까지 설명한 전도를 종합하면서 이런 전도가 결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한 사람이 본질이나 필연으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이 비본질적인 것이나 비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이런 전도는 의도(또는 대자fuer sich)로 보느냐, 행위의 결과로 보느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도라 합니다. 그래서 의도에서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것(즉 심정의 법칙)이 행위 결과 또는 현실에서는 부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도에서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만 행위에서는 자기 자신의 무의미성nichtigkeit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자기를 현실로 의식하는 것과 자신을 비현실로 의식하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열된 존재에서 출현하는 것이 곧 광기Wahnsinn이죠.
“인류의 행복을 향해 두근거리는 가슴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친 듯한 자만의 광란으로 이행한다. 즉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 저항하여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의식의 분노로 이행한다. 이런 분노는 의식이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전도를 추방하려고 하면서, 이런 전도가 어떤 타자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언표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출현하게 된다.”(206쪽)
이런 분노, 자만의 광기는 만일 니체가 이를 보았다면 이게 바로 종말인의 모습이라 하였을 겁니다. 여기서 헤겔은 자만에 빠진 자는 심정의 법칙에서 나타나는 이런 전도가 외적인 힘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런 전도는 ‘광신적인 사제’와 ‘도취한 전제군주’ 그리고 자기의 굴욕을 다른 이에 전가하려는 ‘신하’가 고안한 것이라 간주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지배자들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일반적 행복을 말하지만 실제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이런 전도가 일어난다는 거죠.
헤겔은 이런 ‘자만의 광기’를 비판합니다. 헤겔은 심정의 법칙, 즉 공리주의의 원리 자체 내에 그런 전도가 들어있다는 거죠. 자만에 빠진 자는 자신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믿기에 이런 전도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런 자는 이렇게 타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면서 이를 “기만당하는 인류의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책임은 일반적 쾌락을 추구하는 개체성 자체에게 있죠. 그의 심정의 법칙은 다만 의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심정의 법칙이 마땅히 실현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에게 심정의 법칙은 실현을 통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됩니다. 현실은 ‘현실적으로 타당한 질서(geltende Ordnung)’입니다. 그에게 비현실적인 것(현실)이 이제 현실로 되고, 그에게 현실(심정)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됩니다.
이 점은 현실의 일반적 질서를 가지고 보아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타인은 “어떤 개인의 주관적인 심정의 법칙을 모든 사람의 객관적인 심정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항을 통해 현실은 심정의 법칙과 다른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이런 입장은 심정의 법칙을 거부하고 현존하는 실정법, 습속을 옹호하게 되죠.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역사적인 지속성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일정한 객관적인 일반성을 지닌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전적으로 심정의 법칙을 믿고 이런 현존하는 실체를 벗어나려 하거나, 그런 실체를 박탈당하게 된다면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공공적인 질서가 지닌 현실성과 위력이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이 질서는 자기 스스로와 동일하게 일반적으로 활성화된 본질로서 나타나며 개체성은 다만 그 질서의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질서는 마찬가지로 전도된 것이다.”(207쪽)
이게 바로 왕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중세 말기 각 영주들은 끝없는 전쟁상태에 있었죠. 이름해서 계승전쟁이라 합니다. 영불의 백년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계승 전쟁이죠. 하지만 이런 가운데 평화라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이런 평화를 위해 왕의 절대적 힘을 인정하게 되죠. 신하들은 자발적으로 왕의 신하, 관료가 되면서 중세가 근대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한 단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물론 이 왕의 평화란 모든 신민들의 노예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예 상태는 홉스가 말한 것처럼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성립된 노예상태이죠.
6)도덕성으로 이행
공리주의는 결국 쾌락주의로 환원됩니다. 각자가 일반적 쾌락을 추구하든, 개별적 쾌락을 추구하든 결과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무한한 대립과 투쟁입니다. 이게 바로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ein allgemeiner Widerstand und Bekaempfung aller gegenander’이죠.
이런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은 결코 동물의 끝없는 생존경쟁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은 이미 서로의 형식적인 자유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내용상의 자유입니다.
이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이 세계 속에는 진정으로 객관적인 현실이 출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투쟁이 세속적인 삶을 규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부딪히는 가운데 마침내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게 되죠.
쾌락주의서 이런 현실은 이미 필연성, 운명으로 등장했지요. 하지만 그때는 개인은 그런 객관적 현실을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운명이라고 보았던 거죠. 이제 쾌락주의를 통해 심정의 법칙을 알게 된 개체에게 이런 현실이 다시 출현하게 되면, 개체는 이를 주관적인 일반성 즉 심정의 법칙이 아니라 현실의 법칙, 실체, 객관적인 일반성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에 의해 자기 자신의 개체적 자아, 쾌락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일반적 질서를 수용하는 도덕성을 깨닫게 되죠.
“공공연한 질서처럼 보이는 것은 도처에 펼쳐지는 전쟁이다. 그 속에서 각자가 그 본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뺏으려 하며, 자기 개인의 정의를 타인에게 종용하고, 그 자신의 것을 확립하려 하지만 이렇게 얻은 그 자신의 것은 곧 타자에 의해 소멸되고 만다. 그게 세속적 삶이며, 인생살이의 지속적인 모습이다. 이 일반성은 다만 사념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내용은 오히려 개체성이 자기를 확립하려 하지만 결국 해소되고 마는 본질적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유희에 불과하다.”(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