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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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17 쾌락과 필연성-쾌락주의
이병창 2015.12.03 143
다시 헤겔로 17 쾌락과 필연성-아타락시아

1)에피쿠로스 철학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 가운데 첫 번째 다루어지는 항의 제목은 ‘쾌락과 필연성’입니다. 이 제목을 보면, 헤겔이 여기서 다루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쾌락’이라든가, ‘필연성(운명)’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주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헤겔이 그의 <철학사>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헤겔은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한 그의 시대의 몰이해에 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습니다. 헤겔은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가를 인용합니다. 후일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 것도 헤겔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헤겔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이 서로 대립되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인 결론은 같았다고 합니다.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 원리(로고스)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원리는 목적론적 원리이고, 이 원리의 실현이 스토아 철학의 이상이죠. 그런 가운데 스토아 철학은 원리에 충실하려 하면서, 결과나 현실을 무시합니다. 반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이상은 개체성을 원리로 합니다. 즉 개인의 만족 즉 쾌락이 출발점이죠.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어떤 동기, 과정이든 간에 그 결과가 중요하므로 현실을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의 이상은 아파테이아(평정심)입니다. 그것은 원리에 충실하면서 외적인 유혹, 감염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반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이상은 아타락시아(부동심)입니다. 이는 욕망 자체가 사라진 상태 즉 고요한 마음입니다. 쾌락의 추구를 출발점으로 해서 그와 정반대되는 아타락시아로 이행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현실이 맹목적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이니,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가 최선의 쾌락이 됩니다. 모든 욕망이 사라진 고요한 마음의 상태 즉 부동심이 최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동심과 평정심은 유사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부동심은 욕망이 없는 상태이고, 평정심은 원리를 지키는 상태이니, 표면은 비슷하지만 그 내면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죠. 스토아의 철학이 유교의 철학에 거의 홉사하다면, 반면 쾌락주의는 오히려 노자의 무위사상과 유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만년에 아테네 근처에서 정원을 하나 구해 제자들과 함께 공동적으로 생활했다고 알려집니다. 그는 철저한 평등주의자여서, 노예나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했고 매우 관대한 삶을 살아 그의 제자들로부터 무척이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진보적 철학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종교나 정치를 철저하게 회피했는데 그게 사회적 마찰을 일으켜 아타락시아를 방해할 것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마치 피타고라스 학파처럼 단체를 만들까 시도했다고 하는데 에피쿠로스는 그런 시도를 막았다고 합니다.

헤겔은 <철학사>에서
는 스토아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로 헬레니즘이 전개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에서는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가 자기의식에서 형식적 이성으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 출현한 것이라면, 쾌락주의는 형식적 이성에서 시작하는 최초의 자기의식의 형태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는 중세 이전 즉 고대에 속합니다만, 쾌락주의는 중세 이후에 속하게 되죠.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사실 고대 말과 중세 초는 서로 뒤섞여 있어서 시간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세 가지 철학을 왜 같은 계열 속에 다루지 않았는지는 충분히 의심할 만한 문제입니다. 헤겔의 철학이 시기적으로 서로 달랐기 때문일까요? <정신현상학>은 초기 작품이고, <철학사>는 후기 작품입니다. 아니면 <정신현상학>과 <철학사>의 서술방식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철학사>는 사실 연대기적인 시간의 순서로 철학을 다룹니다. 반면 <정신현상학>은 역사적 생성의 시간에 속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아직까지 명확한 대답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2)중세 사회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형식적인 자기의식이 구체적 내용을 얻는 방식 가운데 첫 번째 방식은 ‘점유’의 방식입니다. 이는 자신을 충족시킬 대상을 타자에 의해 인정받지 않고 힘에 의해 자기의 것으로 만들죠. 헤겔은 이런 ‘점유’를 “그 자신에게서an ihm selbst 대상을 소유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전치사 ‘an’을 사용한 겁니다. 자주 헤겔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이런 전치사로 표현합니다.

이런 점유의 경우에 개인은 그의 눈앞에 있는 것, 설혹 타자가 가진 것이라 해도 이미 본래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모든 장난감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아이가 항상 그렇듯이, 그는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에서 이런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죠. 그는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남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자기의 것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죠. 무한한 지배욕은 이처럼 ‘본래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대자존재를 수행함을 통해서 자신을 다른 자립적인 본질로 직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최초의 목적은 개별적인 본질로서 자신을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 의식하거나 이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것이다.”(198쪽)

이 점유가 중세를 지배하는 소유의 방식이었죠. 이 점유에서 성공하는 자가 영주로 되었으며, 이런 점유를 박탈당하는 자는 농노가 되었습니다. 중세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마르크스가 잘 말한 것처럼 고대의 노예 관계와는 상이합니다. 왜냐하면 영주나 농노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기 때문이죠. 여기서는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삶을 충족시키는 대상 즉 소유의 대상과 관련해서 서로 힘으로 투쟁합니다.

결국 이런 관계는 관습법, 습속을 형성시킵니다만, 이 습속은 항상 불안정하죠. 이는 누가 힘으로 깨뜨리려 한다면 항상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습속이란 “회색의, 생기자 말자 곧 소멸하는 그림자einen grauen, eben schwindenden Schatten”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유는 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은 그 대상을 필연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힘이란 자연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스스로 한계를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유는 그에게 항상 일종의 행운으로 주어집니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우연한 행운을 얻어 그에게 속하는 점유를 획득하게 된 거죠.

“그는 스스로 그런 행복을 만들기보다 그런 행복을 직접적으로 취하면서 즐긴다. ....학문과 법칙 근본법이라는 그림자는 생기 없는 안개처럼 사라지니 왜냐하면 이런 그림자는 자기의식에게 그 자신의 실재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가능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은 익은 열매를 따듯이 자기의 삶을 돌보니, 그런 열매는 그가 얻은 것인 만큼 동시에 그에게 우연히 떨어졌다고entgegen 하겠다.” (199쪽)

3)욕망과 점유
점유의 기초는 욕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의식의 원초적 형식에서 나타났던 욕망과는 구별됩니다. 그때 욕망은 생명체에 필요한 자연을 직접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는 행위(“전적으로 대상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를 절멸시키는 것die Vertilgung des ganzen gegenstaendlichen Wesens”)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욕망은 대상적 존재의 자립성 즉 ‘생동적인 현존(das lebendige Dasein)’의 저항에 부딪히죠. 그 결과 자립적인 대상의 저항을 파괴하는 수고스러운 노동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성적 자기의식에서 점유의 행위는 이런 욕망의 부정적인 행위와 구분됩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개체는 형식적으로 볼 때 타자가 자기와 동일한 인격이고, 자율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율적 존재를 인정한다면, 결국 소유는 그 자율성의 표현인 노동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내적으로는 소유의 내용과 관련해서 상호 인정의 지반 위에 있는 셈이죠. 물론 가능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동을 기준으로 하는 상호인정의 지반은 아직 자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고, 그래서 점유에서는 힘이 기준이 되고, 힘이 닿는 한계 내에 있는 것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됩니다. 이런 현실적 측면에서 각자는 타자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 즉 내면적으로 상호인정의 지반 위에 있지만 표면적으로 아직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기에 헤겔은 이런 관계를 표현하면서 개체와 타자 사이의 공동의 지반은 ‘범주’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이 ‘범주’라는 개념은 헤겔이 자주 사용하는데, 항상 칸트가 <논리학에서 일반적 범주는 추상을 통해 획득되지만, 사실은 사유의 범주가 대상을 이미 구성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적으로 추상화될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사유에게 대상적인 존재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이미 내적으로 사유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때> 헤겔은 이를 항상 ‘범주’라는 개념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번 경우에도 헤겔은 이 ‘범주’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본질적으로 표상된 것Vorgestelltes인 존재”라고 말하거나, 또는 “자립성Selbststaendigkeit을 의식하지만” “이런 구분은....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an sich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범주의 단계를 넘어서, 진정한 자기의식의 단계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개체는 점유의 단계를 넘어서 서로의 소유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하겠죠. 이를 위해서는 타자의 것도 자기의 것이라고 보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의 것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노동이라는 기준이 필요한 거죠.

“자기의식은 자신을 이런 개별적으로 대자존재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로서 파악하지만, 이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는 이런 목적의 지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이 스스로에게 대상으로 되는 것은 이런 개별자로서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다른 자기의식이 통일을 이룸으로써 따라서 개체성을 지양하거나 일반자가 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199쪽)

5)운명의 힘
그런데 자기의식이 이렇게 자기를 지양해서 진정한 통일에 이르지 않는 경우, 자기의식은 힘을 통해 쾌락의 향락을 경험하는 가운데 오히려 모순을 겪기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우연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언젠가 그 우연의 힘에 의해 그의 실현이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이 우연의 힘을 헤겔은 ‘부정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das negativen Wesen)’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개체성이 획득한 현실은 부정적 존재에 의해 부정되는 것을 본다. 이런 부정적 존재는 ‘비현실적인 것das Wirklichkeitslos’을 개체성의 현실에 공허하게leer 대립시키지만 그러나 자기의식의 자기만족 즉 쾌락을 잠식해 들어가는 위력을 가진 것이다”(200쪽)

사실 이런 우연이 가능한 것은 이미 내적으로 개체와 타자가 통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자각되지 않고 힘에 의한 지배가 여전히 횡행하는 가운데 이 통일이 오히려 외적인· 힘 즉 우연으로 나타나게 된 거죠.

“이런 부정적 존재는 ‘개체성이 그 자체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개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체성은 여전히 자기를 실현하는 정신의 가장 궁핍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체성은 겨우 추상적인 이성에 지나지 않거나 대자와 즉자의 직접적인 통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00쪽)

이제 그는 이런 모순의 경험 속에서 우연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개체성이 획득한 현실은 자기의 힘에 의해 성취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자기도 모른 채 주어진 것(das Element des Fuer es seins)’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는 우연의 힘의 지배 아래 떨어지게 되죠. 모든 것은 곧 ‘우연의 확산(das Element der gegensaendlichen Ausbreitung)’에 불과합니다.

헤겔이 이처럼 우연을 이중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이중적 측면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본다면 우선 한편으로 헤겔은 이 우연의 힘을 ‘단순한 본질체들Wesenheiten의 순수한 관계가 전개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연의 힘은 개체들의 내적인 통일이 토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통일은 아직 자각되고 있지 않으므로 순수한 통일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단순한 본질체들’라고 헤겔이 규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을 향락하는 속에서 자기의식에게 그의 본질로서 대상화된 것은 공허한 본질체들의 확산이다. 즉 순수한 통일이며, 순수한 구별 그리고 그 관계의 확산에 불과하다.”(200쪽)

“통일, 구별, 관계란 그 개념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순수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관계와 절대적 운동이 필연성을 이룬다.”(200쪽)

그러나 헤겔은 다른 한편 이중적 측면 가운데 다른 측면을 또한 강조합니다. 사실은 이런 본질적인 통일의 출현입니다만, 이는 자각하지 못하는 개체에게는 외적인 필연성, 우연의 힘으로 받아들여지며, 이것이 바로 운명의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나아가서 개체성이 자신을 지배하는 본질이라고 경험하는 대상적인 힘은 어떤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 대상이란 필연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성, 운명 등등이란 사람이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특정한 법칙이나 실정적인 내용을 지닌 것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런 운명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개념이 존재로서 직관된 것이고, 단순하고 공허하지만 그럼에도 중단함이 없으며 교란할 수 없는 관계이고 그 산물은 개체성의 무화일 뿐이라는 것이다.”(200쪽)

6)운명의 극복
자기의식은 모든 것을 힘으로 소유하려는 점유의 투쟁 속에서 오히려 이런 내적으로 이미 내재하고 있는 통일성을 깨닫게 되죠. 정확하게 말한다면 깨닫는다는 것보다는 몸으로 느끼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통일성은 자기의식에게 항상 운명적 필연성으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운명을 몸으로 느끼는 것을 헤겔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성이 박탈되는 것에 대한 의식das Bewusstsein der eignen Leblosigkeit”이라든가, “죽은 현실성이며 공허하고 낯선 필연성als die leere und fremde Notwendigkeit, als die tote Wirklichkeit”이라고 말합니다.

개체의 행복, 운명의 필연성 이 두 가지는 모두 추상적이며, 순수하다는 점에서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이행에는 아무런 매개가 없습니다. 개체는 단적으로 몰락하고, “완고하고 그러나 끈질긴 현실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zerstaeubt” 셈이죠. 자기의식적 이성은 이런 가운데서 이중적인 의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그는 “삶을 돌보려 했으나, 오히려 죽음을 붙잡았을 뿐”입니다.

그에게 그의 삶이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됩니다. 즉 그의 행위의 결과는 그가 행위한 것이 아니며, 그거 겪는 것은 그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 아니죠.

이런 모순 속에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가 자신의 행복을 행운에 의해 얻는 경우이죠. 이게 지금까지 쾌락주의가 갔던 길입니다. 이제 다른 하나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운명의 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 즉 고해가 되죠.

“그런데 만약 이때 매개자가 있다고 한다면 ...자기의 목적과 행위를 다름 아닌 운명 속에서 인지하거나 자기의 운명을 바로 그 자신의 목적과 행위 속에서 인지하는 것이다.”(201쪽)

이런 고해 속에서는 어떤 쾌락도 항상 고통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성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일반적인 행복을 추구하려 하죠. 개별적인 행복은 실현되지 않지만 일반적인 행복이라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쾌락주의 다음에 다루는 심정의 법칙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걸 공리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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