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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1)-계몽의 개념
이병창 2019.11.19 30
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1)-계몽의 개념


1) 전체적 윤곽

이제부터가 5-B 장[근대정신 장]의 2절입니다. 전체적으로 우선 윤곽을 잡아보죠.


5-B 장의 1절에서 소외된 세계[일반화된 상품교환 사회]와 그것을 파악하는 교양의 정신이 설명됐습니다. 2절에서는 신앙을 비판하는 계몽주의를 다룹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계몽주의의 자기 파괴로서 절대적 공포[자코뱅 공포정치]를 다룹니다.


5-B 장자기 소외된 정신[근대정신] 앞에서 5-A 장은 그리스 로마 정신을 다루었죠. 5-C 장은 칸트 이후 독일 정신의 발전을 다룹니다.


이 2절의 제목은 계몽주의입니다. 이 절은 다시 2개 소절로 구분되어 있죠. 첫째 소절(a)은 ‘계몽과 미신의 투쟁’입니다. 둘째 소절(b)는 ‘계몽의 진리’입니다. 전자는 계몽주의의 승리를 후자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다루죠.


그럼 대략 윤곽이 잡혔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우선 본론 앞에 서문에서(292:13-293:20) 약 한 페이지에 걸쳐 헤겔은 순수 통찰의 일반화로서 계몽주의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2) 순수 통찰

순수 통찰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어떤 개인의 고유한 기만으로 간주합니다. tnstn 통찰은 그런 기만을 폭로합니다. 그래서 순수 통찰이죠.


순수 통찰은 이 세계를 전전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어디서나 그런 기만이 존재하죠. 그는 이 세계의 기만을 마음껏 조롱하죠. 그런 순수 통찰의 모습은 아마도 헤겔이 몰리에르의 희극에서 찾았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순수 통찰은 다른 모든 사람의 기만을 폭로하지만, 그 자신만은 순수하고 성실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세계에 대한 조롱은 세계를 비난하고 한탄하는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과 결합합니다. 비장한 인식 영웅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그 자신도 남들 못지않게 기만적이라는 점에서] 좀 웃기는 모습입니다. 헤겔은 이런 순수 통찰의 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순수 통찰은 오히려 스스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이며 자기 자신에 관한 가장 진정한 똥칠이다. - 이 감정은 모든 고정된 존재가 해소되고, 현존의 모든 계기를 전전하고 뼈의 마디마디마다 스며드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된다.”


순수 통찰은 이런 세계의 전도에 대해 그리고 그 앞에 선 자신의 감정에 대해 기지에 찬 언표를 하니 그는 무척이나 재치 있는[geistreich] 인간입니다.


3) 계몽주의

이런 존재, 즉 순수한 자아로서 모든 타인의 기만을 폭로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일반화하죠. 동시에 그는 그런 일반적 상을 모든 타인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만이 진리이니까요. 바로 이것이 계몽주의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의식은 보편적 자아Ich 즉 데카르트적인 에고 고기토입니다.


“이 제3의 의식[계몽주의]는 그 스스로 순수 통찰이지만, 분산되어 있는 특징을 일반적인 상으로 결합하고 그것을 모든 타인의 통찰로 만들려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런데 이런 일반화된 순수 통찰 즉 계몽주의는 데카르트적인 순수 의식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고유한 활동이나 내용을 가질 수 없다"라고 합니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순수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반화된 순수 통찰은 세계 전체에 대해서 “형식적으로 충실하게 파악하는 존재” 또는 오직 “판단하고 평가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심지어 이런 순수 통찰이 세계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런 “추론하고 잡담하기 위해 내용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하죠.


이런 말속에서 헤겔은 그 시대 귀부인의 살롱에 모여 세계의 기만을 폭로하면서 웃고 즐기는 지식인과 예술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도 기만을 수행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4) 보편적 자아

그러나 비록 순수 통찰이 계몽주의로 발전하면서 자신을 순수하고 보편적 에고로 간주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 역시 기만적 존재입니다.


몰리에르의 희극, 수전노를 보면, 수전노 자신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죠.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 아첨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귀족이라는 작위를 몹시도 탐내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수전노를 둘러싼 여러 지식인 예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아첨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아첨하는 것은 알지 못하죠.

헤겔은 이런 자아의 인식은 공허하다고 합니다. 그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도를 다른 주관이 만들어낸 기만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또한 헤겔은 그런 순수한 자아도 공허한 자아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 자신도 현실 속에서 전도된 삶을 살고 있고 남들은 그의 자아 역시 기만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5) 신앙과 계몽의 투쟁

헤겔은 이처럼 계몽주의의 일반화가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제 그것을 넘어서는 진정한 일반화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 속에서 등장합니다.

“이제 고요하게 파악하는 의식[신앙]은 전체 재치 있지만 공허한 잡담에서부터 가장 탁월한 견해를 그리고 사태를 관통하는 견해를 합일한다. 그러므로 전체 잡담을 유지하는 영혼, 재치 있지만 공허한 평가는 몰락하면서 현존은 잉여적인 공허한 존재로 된다.”


따라서 이 자아와 타인의 상호 기만이라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신앙을 통해서 제시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이 세계를 초월한 신의 관점에 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합일적인 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 나은 견해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그 자신의 것보다 더 다면적인 위트가 되며, 일반적인 것 그리고 이제 일반적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더 잘 아는 것이며 평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순수 통찰이 실제의 운동을 주관의 기만으로 보듯 신앙 역시 실제의 운동을 신이라는 주관적 존재의 뜻으로 파악하죠. 신앙의 진실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의 이면이나 초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죠.


여기서 신앙과 계몽의 상호 투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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