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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6)-정신의 동물적 왕국 또는 편집증자의 세계
이병창 2019.11.13 28
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6)-정신의 동물적 왕국 또는 편집증자의 세계


1)

앞에서 헤겔은 순수의식의 두 측면을 비교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고 이는 라신느의 비극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신앙은 곧 이 세상을 절대 신이 지배한다는 운명론이죠. 다른 하나는 순수 통찰이고 이것은 모든 것이 자기의 반대로 전도된다는 인식이며, 몰리에르의 희극 가운데 잘 드러납니다.


이어서 헤겔은 이런 신앙과 순수 통찰을 기독교의 3가지 차원에서 나누어서 분석합니다. 그 3 가지 차원이란 ① 개념, ② 이 개념과 현상과의 관계 ③ 신앙과 순수 통찰 사이의 관계입니다. 먼저 신앙의 3 차원을 보도록 하죠.


2)

신앙의 경우 그 개념은 실재 세계의 배후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실재 세계에서 서로 대립하면서 자기의 반대로 전도하는 두 부분 국가권력과 부, 귀족과 부르주아는 이런 신의 세계에서는 신을 이루는 두 요소로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실재 세계의 구분은 신앙 세계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신앙 세계의 부분들은 그 정신에서 소외되지 않으며, 즉자 대자적인 본질이며, 자기 내로 복귀되어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정신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우리가 보기에는 이 두 가지는 소외된 형태지만 신앙의 눈에는 “그 차이는 고요한 상이성이며, 그 운동은 역사 Geschehen”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이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면 이는 그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전지전능한 외부의 힘이 전제될 겁니다. 그래서 헤겔은 여기서 운동이 일어난다면 그 운동을 ‘역사’라 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현실 세계의 두 구분 즉 국가권력과 부, 일반성과 개별성은 그 위계에서 차이가 납니다. 국가권력은 신의 대행자이고, 개인의 행복, 즉 부는 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라신느의 비극에서 보듯이 개인은 항상 스스로 몰락하면서 신의 영광을 입증하죠. 신의 영광이란 곧 절대적 권력의 정당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 번째로 이런 소외된 자기 Selbst의 복귀, 전락한 실체가 최초의 단순성으로의 복귀하는 것이다. 비로소 이런 방식으로 실체는 정신으로 표상된다.”


여기서 실체는 즉 국가권력이며 표상된 정신이란 절대적 존재 곧 신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신의 지배 아래 즉 표상 속에서는 고요하게 머무르던 이런 요소들은 아직 자각적인 자기의식에서 파악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요소들에 대한 자기의식이 출현하게 됩니다. 헤겔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죠.


“부분적으로 신앙은 이런 자기의 실현태[국가권력과 부]를 공허한 것으로 보면서 이에 대립하면서 이를 지양하는 운동이 된다. 이 운동은 현실의 전도에 대한 총명한[geistreich] 의식을 갖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의식이 오히려 총명한 것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산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총명하다는 것은 여전히 실제 세계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유의 고요한 왕국에 대립한 현실은 하나의 무의미한[geistloses] 현존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외적인 방식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헤겔은 여기서 총명함과 무의미함[멍창함]을 대립시킵니다.

총명함은 교양에서 나옵니다. 교양은 현실의 변전을 재빠르게 눈치채죠. 그것이 총명함이라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런 현실의 변전에 눈길을 돌리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라는 겁니다. 그런 총명함이란 결국 자기의 개인적인 생존을 위한 것이니까요. 신의 왕국에 뜻을 둔 신앙으로서는 현실이 이러나저러나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4)

결국 신앙이 택하는 것은 절대적 존재에 대한 “봉사와 희생이고 이를 통한 복종[Gehorsam des Dienstes und des Preisses] 입니다. 그는 ”감각적 활동이나 감각적 인식“도 거부하죠. 그 모든 것은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감각적 세계는 절대적 존재에 비해 무의미한 세계이므로 이 세계의 본질은 현상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본질은 다만 내적으로만 존재하며 결코 그 대로 나타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개인은 그런 현실의 진정한 본질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되겠죠. 그는 그저 그런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념은 즉 스스로 현재적으로 실현하는 정신은 신앙하는 의식에서는 핵심에 해당하는 내면이고, 작용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출현하지 않는 것이다.”


내면에서 작용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운명,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열정 속에 있는 운명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앞에서 라신느의 연극 페드라에서 주인공 페드라가 열정 속에서 겪은 운명이 아닐까요. 결국 이런 운명은 모든 것이 신이 지배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갈 뿐입니다.


5)

이에 반해서 이제 순수 통찰은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죠.


우선 순수 통찰의 개념은 모든 것이 전도되는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이런 부정성은 사실은 실제 자체의 이행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행의 원인은 내적인 것에 머무르고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순수 통찰은 그 이행을 표면적으로만 보아서 우연한 이행으로 간주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순수 통찰은 이런 우연한 이행을 타인이 고의로 수행하는 기만으로 간주합니다.


신앙에게서 현실은 신이 숨어서 작용하는 현실이듯, 그 결과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 통찰은 모든 것이 타인의 기만으로 간주됩니다. 그는 타인의 기만을 벗겨내고 그 속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려 합니다. 그 의미란 곧 타인이 여기에 부여한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순수 통찰은 본질을 본질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주체로 안다. 순수 통찰은 자기의식과 다른 자립적 존재를 .....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실제의 운동이고 타인 역시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의 운동을 타인의 의도가 개입한 기만으로 이해하는 오해가 순수 통찰을 지배합니다.


편집증 환자는 평범한 사건도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적이 숨어서 조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주 소위 음모론에서 이런 편집증을 만나는데, 헤겔은 순수 통찰이 바로 그런 자라고 말합니다.


6) 정신의 동물 왕국

이런 편집증 속에서 각자는 타인의 기만을 벗기고 자신의 관점을 타인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일반화하죠.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이런 것을 “폭력을 행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려고 합니다.


“순수 통찰의 의식은 처음에 순수 통찰을 일반화하려는 즉 현실적인 모든 것을 개념으로, 모든 자기의식 속에 인정되는 개념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런 기만은 사실 그 개인의 고의적인 기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외된 현실 자체가 만드는 것일 뿐이죠. 하지만 그는 타인의 고의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부여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죠.


내가 타인을 기만하는 자로 보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타인 역시 스스로 기만하면서 나를 기만자로 보겠지요. 우리는 서로가 기만하면서 상대를 기만하는 자로 보게 되는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은 실제의 운동이지 우리의 기만과는 무관합니다. 헤겔은 이것을 정신의 동물 왕국이라 말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편집증자인 세계입니다.


“모든 천재, 재능, 특수한 능력은 무엇이든지 현실 세계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에서 정신적 동물 왕국이라는 측면을 여전히 갖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적 동물 왕국은 상호 폭력을 행사하고 혼란 속에서 실재 세계의 본질을 위해 투쟁을 하면서 기만한다.”


7) 소외된 현실의 필연성

그런데 서로가 기만으로 보는 것 자체는 동물의 왕국이지만 결국 이것은 실제의 운동이니, 이를 통해 그들은 실제 운동 자체를 보게 됩니다. 실제 자체로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반대로 전환합니다.


모든 사람이 편집증자인 세계는 거꾸로 모든 사람이 진실을 바라보게 되는 세계입니다. 다만 그런 진실을 편집증적으로 해석할 뿐이죠. 그러므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의도는 순수하다. 왜냐하면 그런 의도는 순수 통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통찰은 마찬가지로 순수하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다만 절대적 개념이어서 어떤 대상에 대립하지도 않으며, 그 자체에서 제약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앞에서 의도가 ‘순수하다’고 한 이유는 세상의 기만을 넘어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통찰이 ‘순수하다’고 한 이유는 이미 현실 자체가 스스로 자기의 반대로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교양의 세계 끝에서 국가권력이 부로, 부가 국가권력으로 이행하는 것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입니다.


“무제약적인 개념 속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직접적으로 들어 있다. 즉 모든 대상적인 것은 다만 대자 존재, 자기의식[주관성]의 의미를 가질 뿐이며 또한 이 대상적인 것은 보편적인 대자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순수 통찰은 모든 자기의식이 지닌 재산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적 대자 존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의 인식이 모든 자기의식이 수용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8)

각자 자신의 관점을 일반화하는 이런 편집증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관점을 헤겔은 크기의 차이로 이해합니다. 즉 현실은 관점이 좌우, 상하, 전후로 달라지면서 세상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위상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겔은 이런 세상의 모습을 크기의 차이로 규정합니다.


“개체는 다만 일반적인 존재로서만 도야된 존재로서만 타당성을 가지며, 차이는 이제 더 크고, 더 적고 하는 활력의 차이로 환원된다.-크기의 차이라는 이 상이성은 의식의 완전한 분열 속에서 그 차이가 절대적인 질적인 차이[absolutequalitative]로 전환한다는 것을 통해 몰락한다."


여기서 ‘절대적 질적 차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차이이지만 더는 차이가 아닌 것, 하나의 무의미한 차이를 의미하죠. 이런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차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자체 의미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 피부색은 서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차이였습니다. 전 세계적인 교류가 발전하면서 이제 피부색이 차이이지만 무의미한 차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만 극복한다면 이제 동일한 세상, 감추어져 있는 진리에 이르게 되죠. 이런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 그것이 곧 일반적인 관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차이는 더는 차이가 아니게 된다는 거죠.


이제 이런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게 되면 여기서는 이제 주체가 곧 객체가 되는 양자의 근본적인 통일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아에 대해 타자인 것은 다만 자아 자체이다. 이런 무한한 판단 속에서 근원적인 대자 존재의 모든 일면적이고 고유한 측면이 제거된다.”


“자아는 자기를 순수한 자아로서 자신의 대상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의 절대적 동일성이 순수 통찰의 지반이다.”


보편적 자아=즉 현실의 본질이라는 이 원리는 나중에 칸트의 선험철학에 의해 비로소 밝혀지는 원리입니다. 헤겔은 이미 순수 통찰이 이런 선험적인 원리를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선험 철학의 원리를 헤겔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서 [an] 존재하는 것이 당신들 자신에 대해서[Fuer] 존재하게 하라. 즉 이성적으로 되라.”


그런데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운동이 계몽주의입니다. 이런 계몽주의 운동은 자기의 관점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진리로 만들려는 투쟁이니, 편집증자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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