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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20 시장교환과 개인
이병창 2015.12.31 95

다시 헤겔로 20 시장의 교환과 개인
1)왕의 평화
‘이성’ 장의 A절이 ‘관찰하는 이성’이었습니다. B절이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이고 이제 마지막 절 C절에 이르렀군요. 이 절의 제목은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적인 개체성’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흐름을 잠시 다시 검토해 보죠. <타자와 자신의 일치>가 ‘자기의식’ 장을 통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완성되면서, 이어지는 ‘이성’ 장의 전체는 이런 일치가 내용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전개되는 운동입니다. 이런 목표에 이르는 과정으로 일단 ‘관찰하는 이성’의 절에서는 <의식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문제로 되었습니다. 의식과 대상은 형식적 차원에서는 이미 일치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의식의 구체적 규정성이 대상의 구체적 규정성과 일치하는가가 문제로 대두되죠. 그 정점에 ‘골상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골상학에서 이런 일치는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성은 관찰하는 이성을 넘어 이성적인 자기의식에 이르게 되죠. 여기서는 <개체와 일반성(사회, 또는 타자)> 사이의 관계가 문제됩니다. 이 관계 속에서도 이미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개체는 사회와 일치하면서, 개체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게 이성장의 출발점에 언급되었던 ‘법적 인격’의 개념이었죠. 그런데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은 이런 일치를 개인의 구체적 내용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살펴봅니다.

이 단계에서 개인은 힘을 통해 자신의 구체적 내용을 확보하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점유’가 지배하는 원리이었죠. 이런 관계는 ‘쾌락과 필연성’의 수준에서 우연을 통해 행운을 얻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심정의 법칙’의 수준에서는 다수의 행복을 주관적으로 설정합니다. 전자는 우연에 의해 실패하는 운명에 부딪히며 후자는 결국 강자의 지배로 끝나게 되죠. 이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 ‘덕’의 수준입니다.

덕은 스스로 객관적인 일반성을 위해 헌신합니다만, 이런 덕의 의식은 다만 마음속으로만 머무릅니다. 세속적 현실은 여전히 강자에 의해 지배됩니다. 하지만 세속에서 강자는 서로간의 투쟁을 통해 모두 몰락하면서 모든 강자를 초월하는 필연적 존재가 드러납니다. 이 필연성이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의 결과로 성립하게 되는 절대적 존재로 대변됩니다. 역사에서는 흔히 이를 ‘왕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덕이 이제 이런 필연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신이 출현하죠. 그것이 바로 C절에서 등장하는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입니다.

여기까지 전개되는 개체성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중세 사회에서 등장했던 개인의 모습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 농민은 법적 인격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전적인 자유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자유로왔죠. 그래서 자유농민이라 합니다. 이런 자유농민 가운데 행운을 얻거나 힘을 통해 넓은 영지를 점유하게 된 자가 바로 귀족이죠. 왕이라고 해도 이런 귀족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어요.

중세 말기에 이르면 이제 귀족들이 몰락하고, 절대 왕이 출현합니다. 이 절대왕에 의해 소위 왕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사회적으로는 상업적 교환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상업적 교환을 기초로 새로운 개인이 등장하는데, 헤겔이 지금 다루려는 개체성이 바로 그런 개인이죠.

이런 개체성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주관적으로 선택합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이 목적이 객관적으로 규정된 목적이 됩니다. 또한 그 자신은 항상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만 실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행동하게 됩니다.

“세속의 개체성이 단지 자기를 위해서만 또는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으며, 그의 행위는 동시에 즉자적인 행위, 일반적인 행위가 된다. 개체성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할 뿐이며, 그가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확신하는 경우 그가 주장하는 것은 다만 모든 인간이 자기가 행위하는 것에 대해 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213쪽)

2)일반성과 개체성의 상호 침투
C절의 출발점에 등장하는 개인 즉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은 말 그대로 형식적으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인정받는 개체를 의미합니다.

형식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인격이 인정되었을 때 헤겔은 이를 “모든 것이 실재라는(alle Realitaet zu sein) 확신gewissheit’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실재성이란 단순히 주관적 의식에 대해 대상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이성의 출발점이었던 원리이었습니다.

이성의 원리가 여기서 아직 ‘확신’에 그치는 것은 단지 형식적 차원, 즉자적 차원에서 이성이 출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자적인 차원, 구체적 내용의 차원에서도 이런 이성이 출현해야 합니다. 즉 개체의 구체적인 규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음을 통해 ‘실재성’을 획득해야 하죠. 이 단계에 이르면 이성의 원리는 ‘확신’의 수준에서 ‘진리’의 수준으로 올라서며, 즉자적으로 실재적인 상태는 대자적으로 실재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죠. 헤겔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이성은 이제 즉자 대자적으로 자기의 실재성을 확신하며, 더 이상 자기를 직접적인 현실[사회]에 대립하는 목적으로 출현하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범주 자체를 자기의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214쪽)

여기서 “범주가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표현은 무슨 뜻인지 모호합니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라는 개념은 항상 칸트적인 선험적 범주를 의미합니다. 이런 선험적 범주는 이미 대상을 구성하는 범주이며 이런 구성을 통해 대상에 내재하게 되죠. 하지만 인식의 과정을 통해 이 대상에 내재하는 범주가 인식되고 그것이 바로 인식주관에 내재하는 범주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범주는 의식된다고 하겠습니다. 범주의 의식이 이런 의미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서 범주가 의식된다는 뜻은 곧 자아와 대상, 개인과 사회가 일치하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이런 일치는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을 넘어 구체적이고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자 대자적 실재성’, ‘범주의 의식’, ‘확신과 진리의 일치’ 등 여러 가지 표현이 나왔습니다만 모두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한 개인이 구체적으로 사회 속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죠.

3) 교환의 모델
이런 개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일반성과 개체성의 상호 운동하는 침투’가 일어나야 합니다. 즉 개체 자신의 자기 목적 수행과 사회 전체의 목적 수행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죠.

이런 <개체와 일반성의 상호침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은 사회적인 분업의 관계를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 분업의 모델은 각자는 자기가 맡은 부분에 충실합니다. 그는 이를 통하여 사회 전체를 위하여 행위하죠.

넓게 본다면 사회적인 분업의 관계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상품의 교환처럼 시장을 통해 매개되는 교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관리자나 계획을 통해서 분업이 일어나는 것이죠. 경제적인 영역에도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같은 것은 후자에 속합니다. 경제적 영역 외의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 사람들 사이의 분업은 시장보다는 오히려 계획을 통해 매개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델 가운데 우선 C절의 출발점에서 등장하는 모델은 시장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지는 상품교환의 모델입니다. 이런 시장을 통한 교환은 각자는 시장을 위해 생산하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시장에서 구하는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시장을 통한 교환의 경우, 생산하는 그 시점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것이 과연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죠. 생산하는 경우 주관적으로는 자기가 시장을 위해 생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가정일 뿐, 시장에서 실제로 교환을 해보야만 비로서 그의 주관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생산의 시점에서는 자기가 생산하는 것의 일반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생상물이 시장에서 교환이 되었을 때 비로서 그 가치가 객관적으로 결정되죠.

헤겔은 생산과 시장의 이런 차이를 각각 행위에서 ‘즉자적인 것’의 차원과 ‘현실적인 것’의 차원이라 규정합니다. 즉자적인 차원(즉 주관적 믿음이나, 가능적 차원, 시장에서 성공적인 교환이 일어나는 경우)에서는 ‘개체성’과 ‘일반성’은 통일됩니다. 여기서 일반성은 사회적 목적에 해당됩니다. 반면 개체성은 행위하는 개인을 지시하는 말이죠.

이런 즉자적인 차원에서 개인은 개인적인 목적을 충족시키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목적을 수행하죠. 이런 관계는 마치 사회적 목적이 개인의 행위를 매개로 해서 자기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헤겔이 역사철학에 ‘이성의 간지’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의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새로이 출발하여 타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 이른다. ...그러므로 행위는 순환하는 운동이라는 모습을 지닌다. 이 순환은 허공 속에 자유롭게 움직이듯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운동하며, 방해됨이 없이 한번은 확장되다가 다른 한번은 수축되고 완전한 만족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만 그리고 자기 자신만을 가지고 유희힌다.”(215쪽)

개인의 행위란 사회적 목적이 실현되는 이런 매개에 불과하므로, 감추어진 사회적 목적이 실현된 사회적인 목적으로 단순하게 ‘옮겨가는(번역)의 순수한 형식’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위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대립하지 않는다. 행위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이행시키는 순수한 형식이며, 출현하고 드러난 내용은 이 행위가 이미 즉자적으로 갖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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