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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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19 덕과 세속의 투쟁
이병창 2015.12.19 84
다시 헤겔로 19 덕과 세속
1)덕
이 절에 들어가면서 먼저 헤겔은 지금까지 이성적 자기의식이 걸어온 길을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이전의 자기의식의 형태들과 비교하여 ‘덕의 (자기)의식’이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우선 a에서는 ‘쾌락주의’를 다루었고, 이어 b에서는 ‘심정의 법칙(공리주의)’를 다루었습니다. 쾌락주의는 운명의 힘(‘공허한 일반성’) 앞에 굴복했습니다. 이어 등장한 ‘공리주의(심정의 법칙)’에서 개인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인 법칙이며 따라서 이를 ‘심정의 법칙’이라 했죠. 이런 공리주의는 자신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공리주의에서 심정은 법칙과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요. 이 법칙 즉 다수의 행복은 주관적으로 생각한 행복이니까요. 반면 냉혹한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은 강자가 승리하는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현실과 그 법칙은 상호 대립 속에 있습니다.

“두 번째 형태에서 대립의 양편들은 각각 법칙과 개별성이라는 두 계기를 갖는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 심정은 법칙과 직접적인 통일일 이루고 있으며 다른 하나 즉 현실은 그 법칙과 대립 속에 있다.”(208)

이제 공리주의는 ‘덕의 (자기)의식’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덕은 주관적인 선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를 주관적인 선과 대비하여 정의라 하죠-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덕에서 개체적 쾌락(개체성)은 지양되고 일반적 정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반면 이런 덕의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하 투쟁이 벌어지고 이 가운데서 무언가 이루려했던 사람들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지 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또 무언가를 추구하려 하면서 악다구니처럼 살아가는 세상이죠. 이런 허망한 하지만 악다구니 같은 세계의 모습을 우리는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흔히 ‘이 풍진 세상’이라 하죠. 헤겔은 이를 ‘세속Weltlauf’라고 말합니다. 이런 세속은 이미 공리주의의 끝에서 등장했습니다. 이런 세속이 등장하면서, 이 현실은 우연도 아니고, 강한 자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고유한 법칙에 의해 움직여 나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덕과 세속의 이런 관계를 헤겔은 앞의 심정의 법칙과 구분하면서 단적으로 이렇게 규정합니다.

“덕의 의식에서 법칙이 본질적인 것이며 개체성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덕의 의식 자체에서도 그렇고, 세속에서도 그렇다.”(208쪽)

“여기 덕과 세속의 관계에서 두 항은 각각 두 계기[법칙과 개체성]의 통일이면서 동시에 대립이며 또는 각각은 법칙과 개체성이 서로에게로 이행하는 운동이지만 각각에서 그 방향은 서로 대립적이다.”(208쪽)

이런 규정을 앞의 공리주의와 비교해보죠. 공리주의에서 심정은 두 계기의 통일이며, 현실은 두 계기의 대립이었습니다. 이제 덕과 세속은 두 계기가 동시에 통일이며 대립이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런 말을 통해 헤겔이 말하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2)추상적인 정의
우선 덕을 보죠. 덕은 객관적 선 즉 정의를 추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덕의 경우 개체는 자기의 개체성을 훈육하여(“in die Zucht unter das Allgemeine”) 정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개체는 덕을 본질로 삼고 있어요.
그러나 이런 덕이 추구하는 객관적 정의는 아직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인륜이 아니고,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정의입니다. 즉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정의라는 것이죠. 헤겔은 덕이 이런 추상적 정의를 추구하는 한 덕에게 아직 ‘인격적 의식persoenliches Bewusstsein’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인격적 의식이란 자기가 정의를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덕을 수행하는 자는 영웅의식 또는 엘리트적 의식을 가지고 있죠.

이런 덕에게서 일어나는 훈육은 진정한 훈육, 즉 ‘인격성 전체의 지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런 지양이 일어났다면 “덕의 의식이 더 이상 개체성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208쪽) 줄 텐데, 아직은 그렇지는 못합니다.

개체성이 이런 객관적 선 즉 정의에 이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훈육에 의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속에서 쾌락을 추구하다가 좌절된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현실은 만인의 싸움이 벌어지고 모든 개체의 투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허망한 현실 즉 세속에 불과하죠. 그러므로 개체성은 현실로부터 물러나서 자기의 개체성을 지양한 것이죠.

객관적 선이 추상적인 것에 그치므로 이런 덕은 마음속에서와 실제에서로 양분됩니다. 세상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마음속으로는 추상적인 선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덕은 실제로 행위할 때는 자기의 개체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속 속에서 덕은 전도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즉 덕은 “자신을 본질로 삼고, 그 자체적인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게”(208쪽) 됩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앞에서 덕에 있어서 두 계기 즉 법칙과 개체성은 상호적인 운동을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에서는 법칙적 정의가 현실에서는 개체적 쾌락이 우위에 있습니다.

3)세속의 두 측면
이번에는 세속을 살펴보기로 하죠. 앞의 심정의 법칙에서도 나타났던 현실도 개별성과 그 법칙이라는 두 계기로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여기서 법칙은 개별성과 동열에 있는 법칙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 중의 제일의 강자로서 왕이 그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제 덕의 현실이라고 할 세속에서 왕은 만인의 투쟁 끝에 출현한 존재입니다. 이 존재는 다른 개체들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가 되죠. 즉 절대적 존재의 출현입니다.
그런데 이 절대적 존재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한편에서 이런 절대왕으로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체성입니다. 이런 자기이익을 위해 다른 모든 개체들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고 있죠. 세속 가운데 이런 개체성의 측면을 헤겔은 “개체성을 통해 전도된 일반성 diss durch Individualitaet verkehrte Allgemeine”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속은 각자가 악다구니처럼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이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속에서 모든 개체가 몰락하게 되고, 그 결과 절대적 존재로서 왕이 출현하게 됩니다. 이런 절대적 존재로서 왕은 모든 개별자의 내적 본질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죠. 이것이 세속으 지배하는 법칙의 측면입니다. 절대적 존재의 이런 측면을 헤겔은 ‘절대적 질서’라고 말하면서, 세속적 현실에 ‘내재하는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절대적 존재의 산출은 모든 개체성의 지양을 통해서 산출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헤겔이 말하는 소외의 과정인데, 그 때문에 이런 산출이 왜곡되죠. 그래서 절대적 존재는 오히려 초월적 존재의 현현으로 간주됩니다.

“개체성의 지양은 세속의 본래적 존재das An sich에게 마치 즉자 대자적으로 등장하는 공간이 열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208쪽)

4)절대적 존재의 자기 모순
이상에서 간단히 말했듯이 절대적 존재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겔은 이를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한편으로 세속의 현실은 악다구니처럼 싸우는 개체들의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개체들은 이 세속 속에서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결국 몰락하죠. 절대적 존재는 이런 몰락의 이면이 됩니다. 거꾸로 이런 현실의 모습은 “일반자가 전도되어 나타나는 형태이며 운동”(209쪽)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절대적 존재란 고유한 내용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모든 개체성을 다만 파괴하기만 하는 것 즉 ‘부정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것’, 또는 ‘아무 내용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행위’라는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각 개체성의 투쟁 속에서 왕이 세워졌을 때 이 절대왕은 개체를 지배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깁니다. 그런 점에서 왕은 고유한 내용 즉 이기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존재이죠.

그런데 이런 절대왕이 지배하는 질서가 정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정의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유한 질서는 ‘즉자 대자적인 법칙’즉 정의의 구현이라고 상상됩니다. 헤겔은 절대왕의 이런 상상을 ‘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공리주의가 주관적으로 파악한 심정의 법칙을 객관적 법칙으로 간주하는 ‘자만’이듯이, 이런 왕은 자기를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 또한 하나의 ‘자만’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속의 현실은 이런 절대왕의 상상을 넘어 자기의 법칙 즉 부정성의 원리를 관철시키죠. 심지어 절대왕조차 또 다시 몰락하고 다른 절대왕으로 대체되죠. 절대왕의 몰락을 통해서 부정적 존재로서 절대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일반적 법칙은 이런 자만에 대립하여 자기를 유지하며 더 이상 의식에 대립하는 공허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또한 죽은 필연성으로서가 아니라, 의식 자체 속에 있는 필연성으로서 등장한다.”(209쪽)

모든 개체성을 부정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운명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운명이 “죽은 필연성”, “의식에 대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세속에서 나타나는 부정성은 절대왕의 몰락을 통해 나타나니, 이는 의식에 대해 대상적인 존재를 갖습니다. 즉 “의식되는 필연성Notwendigkeit im Bewusstsein”이죠.

그러므로 헤겔은 절대적 존재를 절대왕으로서 즉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다시 말해서 헤겔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절대적으로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의식적 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절대왕의 자만은 ‘광기’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모든 개체성을 몰락시키는 “대상적 현실”로서 본다면, 이런 몰락하는 현실은 이런 필연성의 이면Verkhrtheit ueberhaupt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운동을 지배하는 위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위력이 현존하게 되는 것은 사실 일반적인 전도의 결과이다.”(209)

즉 세속의 두 모습 즉 현실을 몰락시키는 필연성과 자기이익적인 절대존재는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이지만, 사실 이런 두 모습은 모두 개체성의 상호투쟁의 결과가 소외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를 ‘일반적 전도’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에서 덕과 세속을 각각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덕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덕이 개체성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행위에서는 개체성이 덕을 지배하죠. 이런 점에서 덕은 통일과 대립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속도 그렇습니다. 세속은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필연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왕의 자기이익입니다. 그 각각이 세속을 지배하는 법칙과 개체성이죠. 개체성이 몰락하는 세속의 모습이 통일이라면 절대왕의 지배는 대립이 되죠. 그런데 덕의 의식은 정의가 중심입니다. 반면 세속적 현실은 절대 왕이 중심이죠. 이런 점에서 헤겔은 덕과 세속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 한 것으로 보입니다.

5)추상적 정의와 행위의 개체성
덕과 세속의 이런 측면들을 전제로 하고서, 이제 덕이 세속과 어떻게 싸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죠. 우선 덕은 자신의 개체성을 지양하여 객관적인 선 즉 정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키려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체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악다구니로 싸우는 세속 즉 “전도된 세속을 다시 전도시켜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의가 객관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세속의 진정한 본질은 이런 정의라는 믿음을(Glauben)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고 있지 않을 뿐이죠. 그가 하려는 것은 정의가 사라진 세속의 곁가지를 쳐서 세속의 본질인 정의가 스스로 실현되도록 거드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그가 세속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현하게 된다면 이제 덕의 의식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천상의 세계에서 천사는 도덕을 모른다고 하죠. 마찬가지로 성인도 도덕을 모른다고 합니다. 자기가 도덕적이라는 의식은 어디까지나 도덕을 현실 속에 실현하는 투쟁 속에서만 존재하니까요.

“그러나 덕의 목적과 본질은 세속의 현실을 정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 선의 현존이 성취된다면, 그의 활동도 그치게 되고 자기가 개체적 존재라는 의식도 사라진다.”(209쪽)

이런 덕과 세속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헤겔은 각자가 들고 있는 무기를 살펴본다면 누가 이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정의는 덕에게 있어서나 객관적인 것이지만, 추상적인 것입니다. 덕에게 이 정의는 실현해야할 ‘목표’로 존재합니다. 덕은 이런 정의를 수행하려는 의욕(Will)을 내보이면서 그것이 아직 현실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정의가 가능적인 것이므로 이런 정의를 실현하려는 힘은 ‘자질’나 ‘능력’, ‘힘’이라고 말합니다. 모두다 잠재성, 가능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보입니다. 그런데 추상적 정의는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잠재적 능력을 넘어서 구체적 개체성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이 개체성은 욕망이라는 힘을 그 원리로 삼고 있으니, 추상적인 정의와는 대립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과 일반자는 자질과 능력 힘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 존재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지만 이 가운데서 일반자로 표상되는 것은 자기를 활성화하고 운동시키기 위해서는 개체성의 원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런 개체성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210쪽)

그 결과 역설이 벌어지게 되죠. 추상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체성이 필요하지만 개체성이 개입하는 한 추상적 정의 자체가 위협받게 됩니다.

덕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때, 이 정의는 완결(‘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에 충실하려면 개체성을 버려야 하는데, 정의의 실현을 위해 개체성이 필요하죠. 결국 그가 실현한 것은 개체성의 개입에 의해 손상된 정의이니, 이는 완전한 정의에 못 미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다시 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정의는 영원히 완결될 수 없습니다. 이미 실현된 것이지만 이런 부정되어야할 한계를 지닌 정의를 헤겔은 ‘대타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선은 세속과의 투쟁에서 등장하므로 이 때문에 대타적인 존재로서 나타난다. 즉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면 정의는 자신의 반대인 부정의에 대한 압박을 통해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10)

나는 이런 추상적 정의와 개체성의 사이의 관계를 정치 현실 속에 뛰어들었던 운동가의 입장에 비해보려 합니다. 처음 이들이 정치 현실에 참여할 때 그들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현실이니까 그들은 현실을 배우게 됩니다. 정의라는 목적을 위하여 수단적으로 현실을 택한 것이죠. 하지만 현실 속에 투쟁하는 가운데 수단인 현실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는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정의의 실현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죠.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하고, 이제는 수단인 현실 자체가 목적으로 바뀌게 되죠. 그에게 정의란 머나먼 꿈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는 언젠가는 선택해야 하겠죠. 그의 정의를 위한다면 현실을 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그는 현실을 위해 정의를 버려야 하겠죠.

6)그림자 전투
a)한 개인에게서 이런 정의는 잠재적인 것인데, 추상적인 정의는 현실 속에 잘 적용될 수도 있고 잘못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적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실현하는 ‘개체성’이죠. 이때 정의는 그저 개체성이 사용하는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개체성의 개입 때문에 정의 자체가 손상되기도 하죠. 어떤 경우에는 이 개체성 덕분에 정의가 실현되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정의는 이제 “무기력한, 고유한 자립성이 없는 재료로서, 이렇게 저렇게 형성되면서 심지어 손상시키기에 이르는 재료(210쪽)”에 불과하다고 말해집니다.

b)헤겔은 덕의 기사가 세속과 벌이는 싸움은 그저 “거울 속 그림자와의 전투Spiegelfechterei”라고 말합니다. 덕은 이 그림자 전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의 본질이 그런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죠. 이 본질은 세속 속에서 저절로 실현될 것이니, 그는 제대로 싸울 필요도 없이 그저 손 놓고 팔짱 끼고 보기만 하면 자기가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런 그림자 전투를 진지하게 여길 수 없으니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진정한 강점이라고 보는 것은 선은 즉자 대자적인 것 자체이며,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210쪽)

c)또는 그는 이 싸움을 진지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울 속의 적을 향하여 자기가 내던지는 것 또는 공격하고자 하는 적의 표적”은 ‘정의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적어도 정의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덕의 기사가 싸우는 표적은 무엇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체성입니다. 덕의 기사는 자기 자신의 실현능력을 파괴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패배하고 맙니다.

d)정의의 실현은 그러므로 이 정의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에서 이미 정의가 실현된 거죠. 그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 자신의 개체성을 극복했습니다. 거기서 이미 정의는 실현된 거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가 현실적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실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개체성을 극복하여 정의감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대해 기쁨을 느낍니다.

“선의 실현이란 다만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선이 동시에 대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210쪽)

e)이런 세속과의 투쟁 속에서 그는 처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체성을 택했습니다만 이제 점차 개체성 자체가 목적으로 되고, 정의란 도달해야 할 머나먼 목표지점에 놓인 꿈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실현한 것은 한계를 지닌 것이니 부정되어야 마땅한 것이죠.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대타적으로 존재하는’ 정의입니다.

“세속이 이런 정의를 실현하려는 투쟁 속에서 덕의 의식에게 드러낸 것은 다만 추상적인 일반자로서 정의는 아니며, 개체성에 의해 활성화되고 대타적으로 존재하는 정의 즉 현실적인 정의이다.”211쪽)

f) 세속의 모든 지점이 덕이 정의를 위해 자기를 내던졌던 지점이고 그가 자신의 개체성을 극복했던 지점이고 그 때문에 덕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실현된 지점 됩니다. 그러니 이제 세속은 덕이 볼 때 ‘상처를 입힐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는 결국 모든 싸움을 포기하고 그저 주어지는 현실에 만족하게 됩니다. 물론 그는 한편으로는 투쟁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를 희생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미 현실이 어느 정도 정의라고 생각하고 안주하게 되죠. 이제 덕에게서는 세속과의 투쟁이란 “보존(안주)과 희생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죠. 마음속으로는 투쟁이지만 몸은 늘 안주를 택합니다.

결국 그는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마음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싸움을 하게 되면 개체성이 개입하고 지저분하게 되니까요. 그는 “그저 칼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싸움의 목표가 된 기사”와 닮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기를 지켰기에” 싸움에 승리했다고 찬양받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적의 무기를 손상시켜도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정의의 고귀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211쪽)

7)절대왕
세속의 절대왕은 덕의 기사와 싸움에서 추상적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이용합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왕은 “개체성”을 자신의 본질로 삼지요. 이 개체성의 힘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그리고 그 어떤 상실하는 것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는 것”(211쪽)이죠.

이런 개체성을 원리로 하는 것이니만큼 덕의 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는 확실합니다. 먼저 그의 승리는 덕의 기사는 스스로 모순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의 승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원인은 그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덕의 기사는 항상 객관적 정의라는 추상적 원리에 묶여 있으니, 이 싸움은 한마디로 손이 묶인 자와 자유로운 자의 싸움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덕의 본질은 세속이 볼 때 다만 세속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은 덕에게 고정되어 있고 덕이 묶여 있는 모든 계기로부터 자유롭다. 세속은 어떤 계기도 자신이 지양할 수 있기도 하고 보존할 수 있는 한에서만 받아들이므로, 그런 계기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세속은 그런 계기에 묶여 있는 덕의 기사도 장악한다.”(211쪽)

그렇다면 덕의 기사가 믿었던 것은 어떻게 되나요? 덕의 기사는 세속의 본질은 정의이므로, 이 정의가 언젠가는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한 자기의 승리는 떼다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죠. 이게 세속 속에 잠복하여 덕의 기사가 믿었던 힘이었지요. 하지만 헤겔은 이런 기대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합니다.

“세속은 스스로를 확신하는 깨어나 있는 의식이므로, 등 뒤에서 누가 다가오도록 하지 않으며, 전면적으로 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211쪽)

이런 세속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모든 것을 주시합니다. 이런 세속에게 비록 추상적인 정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이런 정의는 그저 잠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절대왕은 자기의 이익을 이런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게 되죠. 추상적 정의가 그저 잠재적인 것이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동적인 것이고 현실성이 없는 재료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잠자고 있으며 저 멀리 머물러 있는 의식”에 불과할 것이겠죠.

8)세속의 승리
지금까지 덕과 세속 사이의 싸움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덕은 추상적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개체성이 필요한데, 이 개체성 때문에 정의 자체가 손상당하죠.

“덕은 개체성을 희생하여 선을 실현하는 데 있으려 하지만, 현실의 측면은 개체성의 측면에 다름이 없다.”(212쪽)

결국 이런 개체성이 추상적 정의를 훼손하므로, 가능한 것으로서 추상적인 정의는 항상 한계를 지닌 것 즉 대타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만 실현됩니다.

반면 세속의 절대왕은 개체성을 원리로 하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개체성이 곧 현실화의 원리이므로, 세속은 사회적 질서를 현실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요.

“세속은 불변자를 전도시키지만 행위 속에서 이 불변자를 추상이라는 비존재를 실재성이라는 존재로 전도시키는 것이다.”(212쪽)

결국 세속이 덕에 대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승리는 진정한 덕에 대한 승리는 아니지요. 그 승리는 “본질이 결여된 추상을 본질로 하는 덕”에 대한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류의 선과 인류의 억압, 선을 위한 희생이나 자질의 오용과 같은 허황된 말에 대한 승리”(212쪽)입니다. 다.

헤겔은 덕이 쏟아내는 이런 말들이야 “사람을 도취시키는 하지만 아무 것도 건설함이 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사람을 믿는 것은 “탁월한 말을 하는 개인이 자기를 탁월한 존재라고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덕의 의식은 고대의 덕과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고대의 덕은 사회적 실체에 기반을 두고, “현실적으로 이미 현존하는 선”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고대의 덕은 세속과 대립되는 영원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에 반해서 지금까지 다루어온 덕의 의식은 실체로부터 벗어난 추상적 정의를 추구하는 덕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표상과 말에 불과한 덕”이라고 헤겔은 말합니다.

“세속과 투쟁하는 미사여구의 공허함은 그 미사여구가 지닌 의미가 밝혀지는 순간 곧 폭로되고 말 것이다.”(213쪽)

10)세속의 패배
그러나 세속은 이렇게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절대왕의 측면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세속은 심지어 절대적 존재인 왕조차도 다시 무너뜨리는 절대적 부정성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요. 한마디로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 속에 오히려 감추어진 일반자 즉 정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속의 절대왕은 세속의 이런 부정적 필연성인 일반적 정의를 통해서 패배하고 상실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나는 정의는 아직 구체적인 정의는 아닙니다. 다만 모든 자기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개체성의 몰락이라는 측면에서 정의이죠.

“전도는 선의 전도로 간주되기를 중지한다. 왜냐하면 이 전도는 오히려 단순한 목적이 현실로 전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체성의 운동은 일반자의 실재하는 모습이다.”

“개체성의 대자존재는 세속에서 본질이거나 일반자에 대립하고, 즉자적인 존재와 구별된 현실성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일반자와 불가분리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세속의 대자존재(즉 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임이 입증된다. 이것은 덕에서 본래적인 것An sich이 다만 마음 속에 있는 것An sich이라는 점과 같다.”(213쪽)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속 속에서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지만 이런 투쟁을 통해서 오히려 일반적인 정의를 실현하죠.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로 즉 자기의 개인적인 이기적 투쟁이 실상 사회적인 일반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행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속의 개체성의 행위는 동시에 즉자적이며 일반적인 행위이다. 세속의 개체성은 다만 자기를 위해 또는 이기적으로 행위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일반적으로 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확신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기가 정말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세속의 개체성이 자기를 위해 행위한다면 이것은 처음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현실로 산출하는 행위이다.”(232쪽)

결과적으로는 추상적인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덕이 몰락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이익을 위해 세속을 지배하는 세속의 개체성 즉 왕도 몰락하게 되죠. 결국 이런 몰락과 더불어 대자적 존재의 상호 체계인 사회적 분업의 세계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힘에 의한 점유의 원리가 사라지고 객관적으로 정의가 세워지는 소유권이 확립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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