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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장 주석-그리스 정신의 이해- 가족과 집안의 신
이병창 2019.07.25 24
정신현상학 정신장 주석 5-가족과 가족혼

1)
앞에서 그리스 사회를 규정하면서 헤겔이 메미우스의 띠라는 관계를 이용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인과 사회는 각기 이원적이며, 양자는 표면과 이면이라는 두 측면에서 관계합니다. 헤겔은 이 두 측면의 관계를 각각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이라 했어요. 헤겔은 이 관계를 지각론에서 성질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관점과 비교했어요.

우선 인간의 법칙을 보죠. 지각론에서 사물과 성질의 관계 가운데 유물론의 관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가운데 표면적인 관계로서 자립적인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사회의 관계가 그리스에서 시민과 국가 사이의 관계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번에 말한 내용입니다. 이어서 헤겔은 신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신의 법칙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가운데 이면의 측면입니다. 지각론에서 관념론에 대응합니다.

관념론은 사물의 내면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매체가 있으며 각 성질은 그 자체 초월적인 일반성을 지닌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인륜적 실체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볼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륜적 실체는 모든 개인이 살아가는 어머니의 품 곧 자연[자연적인 씨족/부족=종족, 가족]과 같은 것이 됩니다. 개인은 여기서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를 넘어 존재하는 보편자의 구현체에 불과합니다. 이 보편자가 곧 가족의 혼입니다.

2)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헤겔의 설명을 따라가 보죠. 우선 헤겔은 국가와 시민의 관계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륜적 국가권력은 자기를 의식하는 운동이지만 인륜성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본질에서 자기의 대립물을 갖는다.”

여기서 ‘인륜성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본질’은 ‘직접적으로 또는 존재하는 실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둘 다 ‘직접성’을 강조하는데, 자연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인륜성의 내적 개념, 일반적 가능성’이라고도 표현하죠.

직접적인 자연, 내적인 가능성이란 모두 인간 사회의 원형이라는 의미에 해당되며, 씨족과 부족과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직 개인은 분화되지 않았고 공동체적으로 살아가죠.

이런 공동체는 국가와 달리 개인에 대립하는 법, 명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그런 공동체의 품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 공동체의 습속을 태어나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지킬 뿐입니다. 만일 개인이 그 습속을 거부한다면 공동체에는 이를 강제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개인은 그 습속을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직접적’이고 ‘가능적’인 것이죠.

이런 직접적이고 가능적인 인륜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직접성 또는 존재의 지반에서 인륜성을 표현하는 것 또는 자기를 타자 즉 자연적인 인륜적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본질이며 그것의 자아라는 의식이 가족이다.”

3)
여기서 가족 즉 Familie는 개념에 주목해야 합니다. 가족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인류학적으로 본다면 패미리는 씨족/부족이 해체되면서 고대 국가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이 패미리는 그 이전 시대의 씨족/부족의 원리를 보존하는 것 그 잔재라 할 수 있죠.

헤겔은 아직 인류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사 시대 씨족과 부족을 가족의 확대로 잘못 이해하죠. 그러므로 그가 가족이라고 말한 것은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패미리가 아니라 고대 국가 이전에 존재했던 씨족과 부족의 원리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헤겔은 이런 가족이 근대에 등장하는 가족과는 다르다는 점만은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대의 가족이 개인이 심리적으로 맺는 관계, 즉 사랑의 관계라면 고대 국가에서 등장한 가족은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인륜성은 즉자[가능]적으로 일반적인 것이므로 가족 구성원의 인륜적 관계는 감정의 관계나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인륜적인 것이 놓여 있어야 하는 지반은 이제 개별 가족 구성원이 전체 가족을 하나의 실체로 관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의 행위와 현실은 이런 실체를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다.”

여기서 헤겔이 주장하려는 뜻은 가족이 ‘실체’라는 것인데, 즉 개인의 삶의 토대라는 말입니다. 이는 고대 가족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을 말로 보입니다. 고대 국가에서 등장한 가족은 가부장을 중심으로 가족 경영을 통해 살아가는 체제입니다.

4)
가족 속에서 각 개인은 국가 속에서 개인과 다릅니다. 후자는 자립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이죠. 그러나 전자는 자립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가족 속에서 개인은 어디까지나 전체 가족 공동체를 담지하는 개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비자립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 존재도 아닙니다.

가족은 한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을 넘어선 비현실적 초월적 존재이죠. 가족 속에서 개인은 이런 초월적인 존재를 담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초현실적인 공동체적 존재가 흔히 가족의 영, 조상의 혼, 집안의 신이라고 말해지는 겁니다.

헤겔은 이점을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인륜적 행위의 내용은 실체적이거나 또는 전체적이고 일반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륜적 행위는 다만 전체적 개인 또는 일반자로서 개인에게만 관계할 수 있다.”

여기서 ‘전체적 개인’, ‘일반자로서 개인’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본질인 가족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다음의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죠.

“행위는 ... 가족에 속하는 개인을, 감각적인 즉 개별적인 현실성으로부터 탈피한 일반적 본질로서 개인을 따라서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를 그 대상과 내용으로 삼는다. 그 죽은 자는 일련의 긴 계열을 통해 점점이 현존해 왔던 것으로부터 완전한 한 개의 형체로 집약되며, 우연적 삶의 동요로부터 벗어나 단순한 일반성의 고요로 고양한다.”

여기서 ‘죽은 자’이란 개인을 넘어 존재하는 가족공동체, 영적인 존재로만 존재하는 집안의 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일반성의 고요’라는 말로 다시 표현됩니다. 이런 말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5)
이렇게 해서 개인과 사회의 두 측면의 관계가 성립합니다. 자립적 시민과 현실적 국가/ 자연적 가족과 영혼의 담지자로서 개인이라는 관계이죠. 전자가 표면의 관계라면 후자는 이면의 관계가 되죠. 이 두 관계는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관계합니다.

헤겔의 사회론은 근본적으로 민족과 국가라는 양면적 존재입니다. 민족은 자연적인 공동체를 계승합니다. 국가는 시민의 합의에 의해 생겨나죠. 국가는 강제적 존재입니다. 민족은 내적인 공동체이죠. 국가는 민족이 없다면 강제성에 그칩니다. 민족은 국가가 없다면 현실성을 얻지 못하죠. 양자의 통일체가 곧 민족국가이죠.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는 두 개의 원리가 아직 이행기 가운데 있던 시대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두 개의 원리가 대립하는 서로 몰락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사회란 두 원리의 통일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죠. 이어서 헤겔은 두 원리의 상호 충돌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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