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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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만주기행4
이병창 2013.07.18 256
7월 1일 월요일, 왕청현에서 아침이 밝았다. 왕청현은 우리나라 읍정도 크기이다. 아침에 운동삼아 동네 전체를 한 바퀴 돌았을 정도이다. 도시의 건물들이 전부새롭게 지어진 것이라서 갑자기 땅 속에서 솟아난 듯하다. 간판이 한글로 적혀 있는게, 우리나라 어느 시골 땅에 온 듯하다.



역사기행 3일째, 모두들 말없이 아침을 먹는다. 무거운 분위기이다. 하지만 다들 눈만은 그윽하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떠났다. 왕청현의 소왕청 유격구로 향하여.



지도를 보면 목단강이 흐르는 북만과 연변 주변의 동만 사이에 상당히 긴 산맥이 있다. 높이는 눈으로 어림짐작에 1000미터 정도 될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다시 남쪽으로는 장백산맥이 우람하게 뻗어있다. 그 사이에 왕청현이 있다. 그리고 왕청현의 동쪽, 두 산맥 사이의 대협곡 지역에 소왕청 유격구가 있다.



역사를 잘 모르지만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30년대 초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중국 공산당이 중국 남부 정강산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할 즈음 만주에도 소비에트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급진 좌경 노선(이입삼 노선)을 따라 소비에트라 하였으나 곧 좌경 노선의 한계를 깨닫고 인민혁명 정부라 하면서, 반만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유격전의 주축은 역시 한인이었다. 동만은 거의 대부분이 한인이었고 남만이나 북만도 상당수가 한인이었다. 물론 당시 국제공산당의 지시로 일국일당원칙에 따라서 지휘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만주성위는 중국 본토의 당 조직과는 독립되어 국제공산당에서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가 담당했다고 한다.



나는 만주에서 항일 유격전의 역사는 잘 모른다. 나중에 연변대학 도서관에 가서 ‘연변인민항일투쟁사’(최성춘 저, 민족출판사)를 구해 읽고 안 바에 따르면 동만의 유격구는 여러 개 있었으나 그 가운데 중공당 동만특위가 위치했던 소왕청 유격구가 가장 중심이 되는 유격구였다고 한다. 처음 안도현에 세워진 김일성의 유격대 역시 후일 왕청현으로 이동하여 소왕청 유격구를 옹호하는데 선두에 섰다고 한다.



우리는 왕청현에서 안내자를 구했다. 그는 조선족이었으며, 당 간부로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후대를 위해 역사를 보존하고 설명하는 후대사업을 주로 한다고 한다. 새까맣게 얼굴이 탄 그 분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형형한 눈빛과 걸직한 목소리는 한때 그의 당 활동가로서의 명성을 암시해주었다.



버스가 소왕청 유격구를 향해 다가가지 처음 눈에 뜨이는 것은 협곡 사이를 막아 만든 상당히 큰 댐이었다. 그 댐에 앞에서 안내자가 버스를 세웠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우리보고 저 산을 보라고 한다. 저 산이 바로 뾰쪽산이라 한다. 바라보니 정말 산이 삼각형처럼 뾰쪽하게 생겼다. 드디어 그의 말문이 터졌다.



1933년 초, 일제는 3,000명의 병력에 비행기와 대포까지 끌고 동만의 유격구를 습격했다. 그 해 3월 그 가운데 2,000명이 소왕청 유격구에 집중하여 공격했다. 유격대는 이 뾰쬭산에서 적을 방어하기로 계획하고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3월 30일 동틀 무렵 적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유격대는 지형을 이용한 매복전에 의해 퇴치할 수 있었다. 일단 물러난 적이 이튿날 그리고 사흗날 다시 이차로 공격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적을 소왕청 유격구의 한 가운데인 마촌까지 깊숙이 끌어들여 격파하였다고 한다.



필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일제를 퇴치하는 항일 유격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안내자의 말을 여기 옮겨놓을 자신이 없다. 다만 일제에 대한 유격대의 승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뾰쪽산의 모습과 마천 근거지 기념비를 사진으로 찍은 것이 있으니 여기 게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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