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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10)- 계몽의 자가 당착
이병창 2020.01.24 29
정신현상학 정신 장 2절 계몽주의 주석(10)- 계몽의 자가 당착


1)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헤겔은 앞에서 신앙과 계몽의 투쟁에서 계몽이 승리하면서 계몽은 다시 두 분파 즉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분파로 분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두 분파가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절대적 본질입니다. 다만 사유가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것을 사유의 산물로 보느냐(자기의식) 아니면 사유의 대상으로 보느냐(의식)에 따라서 서로 대립하게 된 거죠.


헤겔은 순수 사상이나 순수 물질의 동일성을 이렇게 논증합니다.


“사유의 단순한 직접성은 순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의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의식 너머에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의식에 관련된다. .. 그러므로 외면적인 존재라는 규정 속에서 이 피안은 의식에 대하여 관계하는 일이 발생하니 따라서 순수 물질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계몽의 다른 분파는 .. 절대적 물질에 이르는데,.. 이 존재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술어가 없는 단순한 존재이며, 이는 순수한 의식[자기의식]의 본질로 된다. 그것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개념 또는 자체 내에 머물러 있는 순수 사유이다.”


그런데도 의식과 자기의식이 통일되지 않으므로, 양자는 절대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헤겔은 이런 계몽이 아직 데카르트적인 사유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했거든요.


2) 프랑스 혁명에서 두 분파

추상적 사유에 기초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은 철학에서의 대립입니다. 여기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데카르트 학파가 분열하여 디드로와 같은 유물론자와 루소와 같은 관념론자로 나누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대립이 실제 프랑스 혁명 중에서도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중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의 대립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부분은 헤겔이 너무 과도한 단순화를 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자의 대립은 절대적 본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찰 방식 즉 의식이냐 자기의식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자의 대립은 계몽의 내적 본질 즉 주관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의 대립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은 계몽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길이 될 수 있죠.


“순수 존재냐 부정적인 존재냐 하는 추상적 계기는 이를 통해 두 분파가 구별되지만 이 고찰 방식이 적용되는 대상 속에서는 결합되어 있다. 이 공통적인 일반적 존재는 추상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내적으로 순수한 내적 진동을 갖거나, 또는 순수한 자기 자신의 사유를 갖는다.”


이제 헤겔은 그런 길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313:32에서 시작되어 결국 3절 절대적 자유와 공포까지 이어집니다. 최종적으로는 칸트의 철학에서 극복의 지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제 이 부분을 설명해 보기로 하죠.


3) 계몽의 자가 당착

계몽은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모두 감각적 존재(주관적 경험 또는 감각적 성질)을 넘어서 나가는 부정성의 운동입니다. 물론 관념론과 유물론도 순수 사상이나 순수 물질을 직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계몽에서는 전자가 후자보다 우선적인 입장입니다. 반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신앙은 부정의 운동보다는 직접 대면이 우선적인 입장이죠.


이제 이런 부정성의 운동을 통해서 보면 계몽은 자가 당착에 부딪힙니다. 계몽의 순수 사유는 감각적 규정을 넘어가는 운동이므로 거꾸로 이런 감각적 규정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이를 요청하게 되죠.


“이 단순한 축을 선회하는 운동은 자기를 차례로 투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는 그 계기를 구분하는 가운데서만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감각적 규정을 넘어가는 운동은 껍질로 남고 실제로는 감각적 규정에 충실하게 되는 일도 벌어지게 되죠. 이게 계몽의 자가 당착입니다.


“계기를 이렇게 구별하는 일은 부동의 것을 .... 순수 존재라는 공허한 껍질로 남겨둔다. 왜냐하면 그런 구별은 모든 내용을 구별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별은 ... 이를 통해 자기 내부로 복귀하지 않는 교체 즉 즉자와 대타의 교체[유용성의 세계]가 된다.”


4) 계몽과 유용성의 세계

절대적 본질이 단순히 피안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으로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규정을 넘어가는 개념의 부정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 운동은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즉 우선 계몽은 다시 감각적 규정을 산출하는 유용성의 세계로 복귀하게 되죠. 그리고 계몽은 순수 사유를 통해 이를 다시 넘어가는 운동을 전개합니다.


현실을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이런 무수한 반복의 운동, 그게 바로 계몽입니다. 헤겔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순수한 통찰은 ... 존재를 지향하는 개념 자체[der seiende Begriff selbst] 또는 자기 자신과 동등하게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인격성[die sich selbst gleiche reine persoenlichkeit]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기 내에서 구별하면서 이 구별된 것 각각이 순수한 개념이 되고 즉 직접적으로 구별되지 않게 된다.”


즉 순수한 통찰은 피안으로 넘어가는 운동이기에 오히려 감각적 규정[즉 구별]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런 감각적 규정은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목적[ansich]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는 피안으로 넘어가기 위한 수단[fuer anderes]입니다.


“그 즉자성은 따라서 지속하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그런 구별 속에서 어떤 것이기를 직접적으로 중단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 본질적으로 대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존재 역시 첫 번째 존재만큼 사라진다.... 그래서 다만 대타적인 존재였던 그것은 .. 자체 내로 복귀하여 대자적인 존재로 정립된다.”


이런 목적, 수단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교체됩니다.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단이라는 것이 유용성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계몽이야말로 이런 유용성의 세계를 산출하는 것이죠. 계몽의 실현 과정은 곧 유용성의 세계를 산출한 것입니다.


5) 전전하는 계몽의 모습

이 유용성의 세계는 계몽이 절대적 본질에 이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창조하고 다시 파괴한 세계입니다. 계몽은 이 세계를 처음에는 목적으로 생각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 어느덧 그것을 다시 수단으로 간주하죠.


이런 끝없는 자가당착적인 부정성의 운동을 헤겔은 형이상학이라고 말합니다. 형이상학의 본래 뜻이 감각적 존재를 넘어가는 것이니, 그런 뜻으로 이 말을 쓴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단순히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외면적인 방식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감각적 존재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계기를 포괄하여 ‘통일적인 자아’를 갖춘 것 즉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지 못하죠.


만일 개념적 파악이라면 감각적 존재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본질이 스스로 빛나게 되죠. 따라서 그것은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외면적인 부정의 방식으로 계몽은 영원히 절대적 본질[순수 사상, 순수 물질]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계몽은 다시 신앙의 방식 즉 직접적인 대면으로 돌아가려 하죠. 그러나 계몽은 신앙의 방식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몽롱한 정신의 거미줄이기 때문입니다.


“개념이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순수 통찰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아, 부정성으로서 순수 의식이다. 반면 신앙은 순수한 사유 또는 긍정성으로서 순수 의식이다.”


이게 계몽의 전전하는 모습입니다. 계몽은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갈라지고 다시 부정하는 운동에서는 감각적 존재를 부정했다가 다시 산출하고, 이런 부정하는 운동에 머무르지 못하고 신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계몽의 이 끝없이 전전하는 운동이 바로 계몽의 운동이고 이게 프랑스 혁명에서 복잡 다양한 투쟁으로 나타났던 거죠.



6) 공허의 극복 가능성

이 끝없이 전전하는 모습은 계몽이 자기를 충족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로에 갇힌 듯 아니면 함정에 빠진 두더지처럼 계몽은 전전하는데, 그 밑바닥에는 절대적 본질을 채우지 못하는 공허감이 존재합니다.


마침내 이런 공허를 채울 대상을 자기 자신에서 발견하면서 순수 통찰은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즉 도덕적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죠.


“이러한 공허한 의식이 추구하는 완전화에는 여전히 자기의식의 현실성이 결여한다. 즉 사유가 자신을 자기에로 고양하는 세계 말이다. 순수 통찰이 적극적인 대상성을 획득했던 한에서 유용성에서는 결여한 이런 대상이 도달된다. 순수 통찰은 그렇게 해서 실제 하는 자기 속에서 만족하는 의식이 된다.”


그러나 이런 만족은 훨씬 나중의 일이고 계몽의 운동, 부정하는 운동은 마침내 그 모순의 정점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 모순의 정점이 바로 프랑스 혁명에서 일어난 공포정치이죠. 헤겔은 B 절 계몽주의에서 B-3 소절에서 이런 계몽의 모순이 정점에 이르는 절대적 자유와 공포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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