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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8) 은총인가 노력인가?
이병창 2020.03.10 27
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8) 은총인가 노력인가?


1) 도덕법칙과 그 실현

앞에서 헤겔은 도덕적 의식의 전치를 설명했습니다. 대립된 것이 동시에 중요하게 된다면, 이런 끊임없는 전전이 일어나게 되죠. 도덕 법칙의 순수성과 그 실현은 서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중요하므로, 순수성이 강조되면 실현이 옹호되고 실현이 강조되면 순수성이 옹호됩니다.


이런 전치의 관계는 비단 여기서 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어서 헤겔은 도덕 법칙의 동기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전치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 동기란 곧 도덕법칙을 실현하는 행위가 순수 자유의지를 토대로 하는가 아니면 욕망을 토대로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 욕망의 순화와 도덕성의 느낌

앞에서 설명했듯이 칸트의 최상선 개념은 욕망이 순수 의지에 완전하게 종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상선을 본질로 해 보자. .. 최상선에서는 자연[욕망]은 도덕성이 갖는 법칙과 다른 법칙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적 행동은 그 자체로 사라진다. 왜냐하면 행위는 행위를 통해 지양되는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도덕적 행위는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방해하는 욕망을 극복하면서 행위를 수행할 때 비로소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최상선의 경우, 이제 행위는 저절로 일어나게 되니, 도덕적 행위임에는 틀림없지만 행위 하는 자 자신은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되죠.


이것은 마치 칸트가 동정심에서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 때 이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욕망을 순화가 포기됩니다.


다시 욕망에 대립하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지는 도덕 법칙을 수행하기 위해 욕망의 대립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런 극복은 되어서는 안 되면서도 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무한히 뒤로 미루어집니다. 순수 의지는 즉자적인 것으로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의식은 도덕 법칙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런 순수 의지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전치됩니다. 도덕의식은 이제 다시 욕망과 자유의지의 조화를 요구하게 되죠.


“그러나 이제 도덕적 의식에서 이 행위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어떤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식이 최고의 목적, 즉 최상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최상선은 다만 사태를 전치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최상선 가운데 모든 행위와 모든 도덕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는 도덕적 의식은 도덕적 행위에도 진지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바람직한 것, 절대적인 것은 최상선이 수행되고 도덕적 행위가 불필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3) 욕망의 제거와 행복의 요구

최상선에서 욕망의 제거와 도덕성의 느낌 사이에 벌어지는 전치는 다시 새로운 전치로 전환됩니다. 이번에는 욕망의 제거와 행복의 요구 사이의 전치입니다.


도덕적 법칙의 순수성의 강조되면, 여기서 욕망은 순수 의지에 종속해 순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최상선은 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더라도 도덕이 실현되어 행복을 얻게 하지는 않습니다.


“도덕적 자기의식은 자신의 목적을 순수한 것으로서, 경향과 충동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서 제기하고, 이런 목적은 감성의 목적을 자기 내에서 제거한다. 그러나 도덕적 의식은 이를 다시 전치한다.”


이제 도덕성의 실현 즉 행복에의 요구가 등장하면서 욕망은 도덕 법칙을 현실에 실현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이 다시 강조됩니다. 욕망이 강조되면 도덕성의 느낌이 사라지고 결국 다시 최상선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에서 충동의 추동력이나 경향성의 경사각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고유의 규정성이나 본래적 내용을 가지므로, 오히려 경향과 충동이 적합해야 하는 도덕성이 오히려 그런 것들에 적합해진다.”


이렇게 되면 최상선과 완전선 사이의 상호 전치는 결국 도덕적 완성이라는 목표를 도달되지 않는 미래로 미루고 맙니다.


“도덕성과 감성의 조화는 도덕적 의식을 넘어 가장 모호한 원방에 있게 된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정학하게 구별되지도 개념적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4) 도덕적 완성 상태와 중간 상태

그런데 이런 원방 즉 피안에서 도덕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면 앞에서 말했듯이 도덕성이라는 느낌 자체가 사라지죠. 도덕성은 감성과의 대립, 감성과의 투쟁 속에서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완성은 다시 문제를 전치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도덕적 완성 속에는 도덕성 자체가 지양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절대적 목적을 순수한 목적으로 모든 다른 목적에 대립하는 가운데서만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성되려는 것에 진지하지 못하고 이제는 불완전한 중간상태가 정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중간 상태는 곧 완성으로 전진하여야 하지만 결코 전진할 가능성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중간 상태에서는 도덕성의 크기가 문제 됩니다. 도덕적 의식은 조금 더 노력해서 완성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 완성이 조금 더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도덕성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부족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도덕적 크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되죠. 도덕성에는 “오직 하나의 도덕, 오직 하나의 순수 의무, 오직 하나의 도덕성이”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이런 도덕적 완성 상태는 결코 도달해서는 안 되므로 다시 중간 상태로 관심이 전치됩니다.


5) 중간상태에서 노력인가 우연인가?

이제 문제는 다시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문제는 행복으로 옮겨집니다. 이런 도덕성의 중간 상태에서는 도덕과 행복의 관계가 문제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도덕적인 인간에게 자주 악한 일이, 비도덕적 인간에게 자주 행운이 일어나게 됩니다.”


도덕적 중간 상태에서 도덕성을 위하여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관점에 선다면,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자에게 만일 행복이 속하게 되는 경우, 이것은 한편으로는 은총에 의해 즉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중간 상태에서 노력을 강조하는 도덕적 의식은 이런 우연을 비난하게 되죠.


“도덕적 의식은 자기의 비도덕성을 의식하므로 도덕적 의식은 행복을 사실상 노력으로 그에게 합당한 것으로서 요구하지 않으며 이를 자유로운 은총을 통해서 즉 즉자 대자적인 행복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행복을 절대적인 근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연과 자의에 따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순수 도덕성을 강조하는 다른 한편 도덕적 의식에서는 도덕성의 크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이 비도덕적이라는 판단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도덕성이 불완전하므로 즉 도덕성이란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도덕적 인간에게 악한 일이 일어난다는 경험이 무슨 말이냐? 즉자대자적인[독립적인] 행복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므로, 비도덕적 인간에게 선한 것이 일어난다는 판단에서 불법적인 생각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현상에 대한 비난이란 것이 무의미하게 되죠. 그런 관점에서 누가 타인의 행운을 비도덕적이라 비난한다면 이는 “도덕성을 구실로 삼는 시기”일뿐이고 누가 타인에게 행운이 베풀어지기를 바란다면 이는 “진정한 우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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