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천 선생님께 3 / <<노바당의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제가 아래의 글, <<노바당의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을 쓴 본인입니다.
이 글은 기세춘 선생의 <노자 강의>의 일부에 대한 비판이고 기선생이 한문을 어떤 식으로 읽는 지 밝힌 것입니다. 한문을 읽는 방식은 <노자>에 대해서나 <묵자>에 대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문을 기선생 식으로 읽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선생은 고전 한문에 대한 자기류의 해독과 해석 모두에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저의 비판은 기선생의 과거 진보 운동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저는 오마이뉴스나 경향, 한겨레 등 진보적 매체에서 기선생 책에 대한 검토없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한문 고전 읽기는 편먹기가 아닙니다. (2009.02.21)
//노바당의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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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1편 / 또 한명의 이경숙이 나왔다
이 글은 기세춘의 <노자 강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기세춘은 <노자를 웃긴 남자>를 쓴 이경숙과 거의 비슷한 스타일(조금 낫지만)의 <노자> 번역과 자기의 독보적 한문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동양학자는 모두 무시하고, 통 크게 모든 한문 고전 번역이 다 틀렸다면서 재번역을 주장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이 분은 이경숙과는 달리 한문 해독 능력이 있으나, 한자의 특수한 용례를 선호하는 기형적인 습관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자>는 민중의 저항 사상’이라는 자기의 선이해가 너무도 확고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번역을 거기에 뚜드려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씨는 도가도 아니고, 도가적 사유방식이 무언지 이해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세춘의 대단한 이력을 보시고 이런 비판을 하는 제가 황당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으실 텐데 제 글을 읽어 보시면 기씨의 <노자>와 한문 이해의 수준을 판단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기자는 \기씨의 한문학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급\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고전 한문 전공자도 없다고 봅니다.
이 글은 기세춘의 <노자 강의> 책 소개 신문기사와 인터뷰 기사에서 시작하여 <노자 강의>의 내용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쓰겠습니다. (2008.08.07)
아래는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있는 기세춘의 약력입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의 후손으로 193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의병활동을 했던 조부와 항일운동을 했던 부친의 반대로 일본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는 등 한학수업을 받다가 뒤늦게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다. 전남대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법학보다 진보적 신학과 철학서적에 탐닉하였고, 4.19혁명에 적극 가담했으며, 5.16이 일어나자 입산, 레닌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서울시에 근무하면서 \동학혁명연구회\를 창립하였고, 후진국개발론에 몰입하면서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후 \평화통일연구회\ \사월혁명연구회\ \전북민주동우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국민화합운동연합\ 등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한편, 동. 서양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통혁당 사건에도 연루된 바 있는 재야 운동가이며 한학자인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묵자』를 완역 출간했으며, 옥중에서 그 『묵자』를 읽은 문익환 목사가 그와 편지로 논쟁한 것이 『예수와 묵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신영복 교수와 공역으로 출간한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은 중국의 시사詩史 3천 년을 총망라한 우리나라 유일본이다.
또 현대철학 해설서인 『주체철학 노트』(1997),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인 『유가』, 『묵가』, 『도가』, 『주역』(2002),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동양 사상 바로 알기’를 주제로 한 『동양고전 산책』 1·2권(2005)을 펴냈다. 우리나라에 나온 동양고전 번역서들이 왜곡과 변질·오역이 심함을 지적하고 재번역 운동에 앞장서 2006년 『장자』의 재번역서를 내놓았다.
그의 자유로운 행보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논어』와 『노자』 등의 고전들과 조선의 성리학·실학 서적들이 그의 곧은 문체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노바당]: 얼마 전에 새로 나온 <노자> 책이 있는가 검색하던 중 금년에 출간된 기세춘의 <노자 강의> 소개와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됐습니다. 저는 전에 기씨가 쓴 <묵자> 책을 본 적은 있으나 별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기씨의 <노자 강의>는 그 내용이 신문 기사나 인터넷 상으로도 상당히 알려져 있어서 그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신문 기사를 쓴 기자들의 인문학적 실력을 익히 아는 저는 기씨의 책을 구입해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책값이 무려 3만 8천원에 <노자> 오천 여자를 해설하는데 800페이지라니... 그것도 주로 <장자>로 <노자>를 해석한다면서 <노자>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장자> 원문과 번역을 인용해 놓았습니다. 게다가 다른 번역과 비교해 보라면서 열 가지 정도의 비슷한, 그러나 기씨 말로는 다 틀린 번역을 자기 번역 아래에 실어 놓았습니다. 책 800페이지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잘 모르는 무엇을 가르치려면 상대방이 잘 아는 것, 알만한 것을 가지고 설명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노자>도 잘 모르고, <장자>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장자>로 <노자>를 해설하면 모르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배우는 사람은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기씨는 서양 사상도 잘 아는지 각종 서양 철학자와 사상으로 <노자>를 설명합니다. 자기는 그런 걸 잘 알겠지만 남들은 그런 걸 잘 모르는데, 그렇다면 <노자> 가르치기 전에 <장자>와 서양 철학을 먼저 공부시켜야 하는 게 아닙니까?
결론부터 말합니다. 기세춘의 <노자>는 전혀 <노자>가 아닙니다. 기씨의 번역과 해설 중 기존의 것과 다른 부분은 대부분 틀린 것입니다.
기씨는 수년 전 <노자를 웃긴 남자>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쓴 이경숙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자기들만 ‘<노자>의 본뜻’을 안다고 주장하며 우리나라 동양학자들, 특히 도올 김용옥을 개무시하는 허세까지 꼭 닮았습니다. 기씨는 이경숙이 한문을 모르고 그 번역이 엉터리라면서도 기존의 번역서에 비해 말이 통해서 그중 낫다고 합니다. 번역이 엉터린데 말이 통하면 뭐합니까? 다 틀린 얘기입니다.
한문 <노자>는 노자 당시(저는 전국시대 중기 이후라고 생각함)부터 한문이 국어인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어려웠기 때문에 2천여년간 그 뜻을 풀이한 수천 가지의 주석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문을 번역한 한글 <노자>가 어떻게 쉬울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데 한글이 한문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하는데서 온 착각입니다. 한문 <노자>의 내용이 중국 사람들에게 어렵다면 제대로 번역된 한글 <노자>라도 당연히 우리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문으로는 표현이 명확해도 번역된 한글은 내용 전달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언어 간에는 1 대 1의 대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자>를 처음 접한 사람이 한두번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번역서는 세상에 이경숙과 기세춘의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다는 <노자>는 이 두 사람들의 창작품일 뿐 <노자>가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이런 일은 귀찮은 일이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기씨의 말 안 되는 책 800페이지 읽기는 정말 어렵습니다.(20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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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인터뷰/ 서평]: “노장의 무위자연은 체제거부 저항사상” /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
인터뷰 / ‘노자 강의’ 펴낸 기세춘 선생
“도교사상 순치화 앞장선 왕필이 저항성 탈색한 뒤 유교사상 덧씌워”
왜곡된 ‘노자’ 답습한 국내풍토 비판 민중적·혁명적 사상으로 복원나서
“〈노자〉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니! ”
〈노자〉는 분명 혁명진영의 성전이었다. 하지만 모두 왕필이 노장사상을 유교화한 ‘현학’을 떠받들고 있다. 정작 중국에선 청대 고증학 등장 이후 버린 것인데, 청나라를 오랑캐로 비하한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도 이 땅에선 유교의 아류로 왜곡된 〈노자〉를 아무런 반성도 없이 답습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토대로 한 번역서들이 오역 투성이고, 역자마다 달라 도무지 무슨 뜻인지조차 알 수 없다.”
묵점 기세춘. 일흔셋의 ‘열혈청년’인 그가 동양고전 재번역운동의 일환으로 또 내어 놓은 〈노자 강의〉(바이북스 펴냄)는 “그런 왜곡과 변질을 걷어내고 민중적이고 혁명적인 본래 〈노자〉”를 복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왕필이 누군가? 황건적의 난으로 한나라가 무너진 뒤 황건적 토벌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위왕 조조가 천하를 손에 쥔다. 조조는 그때 황건적의 주축 도교세력의 일파인 천사도(오두미교)를 포섭해 이용했는데, 대권을 잡은 뒤에는 도교세력을 체제 내로 순치하려 했다. 조조의 양자요 사위인 실력자 하안이 그 임무를 맡아 실무총책으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왕필이다.
왕필은 〈노자주〉 등을 통해 “〈노자〉의 저항적 민중성을 탈색시켜 버리고” 지배계급에 복무하도록 왜곡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노자〉는 2400년 전 본래의 〈노자〉가 아니다”라고 묵점은 단언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왜? “역사는 늘 지배자의 것이고, 담론은 권력이다. 힘 있는 담론만이 살아남게 된다. 따라서 시민이 승리한 근대 이전까지 농민군은 항상 질 나쁜 도둑떼요 반역자들로 매도당했다. 〈삼국지〉는 폭정에 항거한 농민군을 일말의 동정도 없이 반역자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황건적이 바로 농민 반란군이었고, 그 중추가 도교세력이었으며 그들의 교본이 〈노자〉였다면, 〈노자〉를 “혁명진영의 성전”이라 본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다.
그는 노자는 실재한 인물이 아니며, 〈노자〉는 오랜 세월에 걸친 민중의 집단창작이라는 설을 지지한다.
묵점의 〈노자〉 읽기를 보자.
53장 “使我介然有知(사아개연유지) 行於大道(행어대도) 唯施是畏(유시시외)”를 그는 “만일 나에게 조그만 지혜가 있다면 무위자연의 대도를 행해 오직 (묶인 것들을) 풀어주는 해방을 공경할 것이다”로 풀이했다. 기존 번역자들은 ‘행어대도 유시시외’를 대부분 ‘사악한 길, 사도, 샛길로 빠질까 두려울 뿐’이라거나 ‘두려워하며 베풀어야 한다’는 식으로 풀었다.
“大道甚夷(대도심이) 而民好徑(이민호경) 朝甚除(조심제) 田甚蕪(전심무) 倉甚虛(창심허)”도 그는 “무위자연의 대도는 심히 평이한 길인데도 사람들은 소도를 좋아하고 조정은 민중을 심히 닦달하니 농토는 황폐하고 창고는 비었다”고 풀이했으나, ‘조심제’ 부분을 왕필은 ‘궁실은 심히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로 해석했고, 국내 번역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왕필의 견해를 따랐다. 사실 왕필식으로 읽어서는 맥락이 통하지 않고 당시의 처참한 사회현실도 사장돼 버린다. 당시는 “길가에 시체들이 서로 바라보는” 춘추전국시대, 〈좌전〉이 “지금은 말세”라고 했던 난세였다.
19장의 “絶聖棄智(절성기지) 民利百倍(민리백배)”도 묵점은 “성인(군주)을 없애고 지식을 버려라.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가 될 것이다”로 읽었으나, 바로 밑에 배열한 기존 번역자들 해석은 모두 ‘학문이나 지혜, 성스러움과 슬기로움을 버려라’는 식으로 돼 있다.
묵점은 ‘성인’이나 ‘지식’을 당시 체제와 가진자들 위주의 유교적 가치로 보면서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바로 그런 체제지향적인 작위적·인위적·문명적 가치를 거부하는 저항사상, 반전과 무치(無治)와 반문명적 기계 거부운동”이었으나, 기존 번역자들 해석이 “수양이나 읊조리는 유한계급의 청담이나 자본주의적 처세훈 또는 초월적 신비사상으로 노장을 변질”시켰다며 단호하게 비판했다. “저항적 담론을 우민적 반동으로 왜곡해 버렸다”는 것이다.
의병과 항일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으로 ‘국민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던 묵점의 한문학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급. 그는 광범한 전적들을 동원해 꼼꼼하게 설명하는 한편, 문제되는 부분들을 10여명의 기존 번역자들 풀이와 바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책을 편집해 놨다. (한승동 선임기자 / 한겨레 0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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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당]: 기세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에서도 <노자>로 <노자>를 해석하고 나아가 <장자>, <열자>, <한비자>, <회남자>로 <노자>를 해석했다. 해설에서는 나의 의견도 개진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자(莊子)의 <노자> 해석을 근거로 했다.\" (<노자강의> p5)
<노자>와 <장자>는 다르다
<장자>로 <노자>를 읽으면 안 됩니다. <노자>와 <장자>는 같은 도가에 속하는 책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책을 읽을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장자>는 장자 자신의 사상(주로 내편)과 그 후학들의 사상(외, 잡편)이 종합되어 있는 책입니다. 문제는 장자 후학들의 사상이 장자에 기초하고 있지만 장자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보통 <장자> 전체의 사상을 몇 가지로 분류합니다. 중국학자인 유소감(<장자사상>/ 소나무)은 크게 4가지로 분류합니다. 말하자면 <장자> 책에는 네 명의 다른 장자가 있는 것입니다.
1. 장자(莊子) 본인의 사상(주로 내편): 사회를 거부하고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함
2. 술장파(述莊派): 장자의 사상을 밝히고 확장함(유가, 묵가를 초월함)
3. 황로파(黃老派): 왕은 무위하고 신하는 유위라는 정치성을 가미함(유가, 법가를 절충함)
4. 무군파(無君派): 왕없는 세상인 이상사회를 추구함(유가, 묵가를 공격함)
기세춘은 민중운동가입니다. 그래서인지 한문 고전에서 \민(民)\ 자나 \백성(百姓)\이라는 글자만 보이면 민중의식이 발동하는 것 같습니다. <노자>는 민중(가난한 사람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나 민중 사상이 아무리 좋아도 <노자>에 ‘민중의 저항 사상’은 없습니다.
기씨가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은 <장자>의 무군파(無君派)의 사상으로 <노자>를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가의 극좌파라 할 수 있는 무군파의 사상은 장자 본인의 사상과는 가장 관계가 멀어져서 <장자>를 대표할 수 없거니와, 그것으로 <노자>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위 글에서 본 기세춘의 주장은 크게 보아 다음 3가지입니다.
1. <노자>는 민중의 저항 사상이고, 민중 혁명진영의 성전이다.
2. 왕필의 현학은 노장사상을 유학화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왕필 식으로 <노자>를 읽는다.
3. <노자>는 민중들의 집단창작물이다.
기씨가 <노자>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그 나름의 자유로운 이해 방식입니다. 여기에 누가 뭐랄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한 <노자>를 절대화하여 남에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기존 종교를 믿거나, 부두교를 믿거나 간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누가 참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온갖 사이비 종교와 사이비 스승이 기승을 부리는 원인입니다.
도가와 도교는 완전히 다르다
기씨의 주장은 본인의 민중 사상과 후한 말기에 일어난 보통 ‘황건적의 난’이라고 부르는 종교적 성격을 띤 농민 반란과 그 후의 도교의 성립과정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황건적의 난’은 현재 중국에서는 ‘황건기의(黃巾起義/ 황건을 두른 민중이 의를 위해 일으킨 혁명)’라고 좋은 뜻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씨는 도교의 성립과정에 대한 나름의 상식이 있지만 여기에 <노자>를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입니다.
도가(philosophical Taoism)와 도교(religious Taoism)가 전혀 다르다는 것은 <노자>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입니다. ‘황건적의 난(184)’을 일으킨 장각의 태평도(太平道)에는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는 경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평도보다 조금 늦게 성립된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는 그런 경전이 없어서 후에 <도덕경>을 도교 교단 성립과정에서 경전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이 <노자>를 읽은 것은 아닙니다. 민중에게 <노자>는 특정 구절을 듣고 외우면 액을 막아주고 화살도 피해가는 주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노자>의 내용이 민중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닙니다.
도교라는 말을 들으면 <노자>보다 중국 강시 영화에서 나오는 도사(道士)나, 도관(道觀)에서 소원을 빌며 향피우고 점치는 현대 중국이나 대만의 일반적인 풍경을 연상하는 것이 실상에 더 가깝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도교와 <노자>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일본학자 구보 노리따다(<도교사>/ 분도출판사)의 도교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이런 정의는 초기 도교 형성 과정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도교라는 것은 고대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신선설을 중심으로 하며 그것에 도가, 주역, 음양, 오행, 참위, 의학, 점성 등의 설과 무속신앙을 더하고 불교의 조직과 체재를 모방해 종합한 불로장생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주술종교적 경향이 강한 현세이익적 자연종교다.\" (<도교사> p55)
설사 당시에 민중들이 <노자>를 종교 경전으로 들고 다니고(당시에 종이가 발명되었으나 죽간이 주로 쓰여서 짧은 <노자> 한권도 들고 다니기 어려움), 외우고 다녔다 쳐도 그게 민중 \혁명진영의 성전\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노자>가 \민중적, 혁명적 사상\이라는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2008.08.06)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2편 / 조조는 220년에 죽었고 왕필은 226년에 태어났다
기씨는 왕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필이 누군가? 황건적의 난으로 한나라가 무너진 뒤 황건적 토벌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위왕 조조가 천하를 손에 쥔다. 조조는 그때 황건적의 주축 도교세력의 일파인 천사도(오두미교)를 포섭해 이용했는데, 대권을 잡은 뒤에는 도교세력을 체제 내로 순치하려 했다. 조조의 양자요 사위인 실력자 하안이 그 임무를 맡아 실무총책으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왕필이다.\"
[노바당]: 기씨는 황건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와 한중(漢中)태수로 있던 장로의 오두미도(五斗米道)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조조가 황건적을 토벌하고 항복한 잔여세력을 자기 수하로 두었으나 종교적 색채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유비의 촉이나 손권의 오나라와 맞먹는 종교적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던 오두미도의 장로는 215년 조조에게 항복한 후에도 진남장군(鎭南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으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씨는 조조가 하안을 시켜 왕필을 발탁한 것 같이 말하는데 조조는 220년에 죽었고 왕필은 226년에 태어났습니다. 왕필은 당시 시대 문제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려한 천재입니다. 왕필은 도교세력 순치의 실무총책을 맡을 만한 나이도 못되는 17~8세에 <노자 주>를 썼고 23세에 죽었습니다. <노자>와 왕필의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여기서는 위에서 소개한 유소감의 말로 대신합니다. 위진현학에 대한 간단한 참고자료를 아래에 첨부합니다.
“사실상 <노자> 5천 자에서 ‘무(無)’ 자는 상이한 의미를 갖고 있다. 노자의 무(無)가 왕필의 무(無)와 다르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노자철학> p175/ 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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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위진현학(魏晉玄學)
위진남북조, 중국 역사상 가장 사회가 혼란스럽고 분열된 이 시대는 정권 탈취의 악순환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부패와 전란 때문에 염세적인 세계관이 팽배하였다.
특히, 한나라는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통치계급은 사분오열되고 지주호족은 군대를 모아 자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한나라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고 그 결과 220년에는 한나라가 망하고 위(魏).촉(蜀).오(吳)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 뒤 위나라가 촉을 무너뜨리고 다시 서기 265년 사마씨(司馬氏)가 위나라를 대신해 서진(西晉)을 세웠지만 317년에 이르러 중국의 북쪽에는 흉노·갈·선비·강·저 등의 다섯 이민족이 서로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일을 반복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열었고 남쪽은 한족의 여섯 왕조가 바뀌는 혼란을 맞았다. 이 시기는 589년 수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는데 이 시기를 앞 시대와 합쳐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후한의 멸망부터 치더라도 무려 369년간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혼란은 지식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엄청난 사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유가사상의 몰락과 도교·불교의 대두이다. 그러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위나라가 한을 무너뜨리면서부터 위를 무너뜨린 서진이 망할 때까지의 약100년 간, 즉 위진시기에 유행한 현학이다.
위진현학은 노장사상이 중심이 된 새로운 사조였다. 이 흐름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한나라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선거제(選擧制)를 택하였다. 물론 추천 기준은 유학적 소양이었다. 그러나 집안끼리 서로 추천을 거듭하면서 명문 귀족이 문벌화하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정치·경제·문화를 모두 손에 넣은 명문 귀족들은 더 이상 벼슬을 얻기 위한 유가 공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으며 한나라 말의 혼란이 정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자유로운 생활태도를 부추긴 것이다. 위진시기에 들어서면 이들의 모습은 청담(淸談)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노자>, <장자>, <주역>의 삼현(三玄)을 중심으로 완곡한 풍자를 통해 자유로운 본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세속인들에게는 백안(白眼)으로 대했다는 완적이나 술을 많이 먹었고 나체로 잘 지냈다는 유령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위진현학의 주된 관심은 \자연\과 \명교\(명분교화)의 조화에 있었다. 명교는 봉건사회의 정치제도와 윤리도덕 등 봉건문화의 총칭이며 자연은 최고 법칙인 도로서 자연관과 인생관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경향은 바로 유가와 도가의 절충을 의미한다.
이 시기 중요한 인물들로는 노자를 철학적으로 해설한 <老子注>와 송대 역학에 큰 영향을 준 <周易注>를 저술한 왕필, 음악 자체는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을 주장한 혜강, <장자>를 철학적으로 해설한 곽상 등이 있다. 이들의 학문 경향이 서예, 음악, 회화 등을 사대부들의 교양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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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민중의 집단창작’이라니?
기세춘은 <노자>가 ‘민중의 집단창작’이라고 합니다. 기씨가 말하는 민중이라는 개념부터 정리가 필요한 말이지만 간단히 노자 당시의 최하층민(춘추전국시대가 노예제 사회였다는 기씨 말대로라면 노예/ <노자 강의> p75)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노예들이 당시 상황에 저항하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 조금씩 말했거나, 쓴 글을 누가 나중에 모은 것이 <노자>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황건 혁명의 성전이 되었다? 어이없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쓸 일이 많으니 일단 넘어 갑니다.
<노자>를 원문을 대조하며 깊이 읽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한문 이해 능력이 요구되고, 또 다음과 같은 기본사항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노자>를 교양으로 읽으려는 일반인은 이런 과정을 다 겪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단, 좋은 책을 몇 권을 골라야 합니다. <노자>에 대한 책 중에서 이경숙이나 기세춘의 책을 처음에 접하게 된다면 재수 없게도 최악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1. 노자라는 사람과 <노자>라는 책의 구별
2. <노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
3. 도가(philosophical taoism)와 도교(religious taoism)는 다르다.
4. <노자>와 <장자>의 차이
5. 중국 고대 사상의 기본적 전제와 특징
6. 제자 백가 사상과 그 시대적 상황(전국시대)
7. <노자>라는 책의 형성 과정과 판본 (2008.08.06)
기세춘 식 <노자> 번역
[노바당]: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한겨레신문> 기사 중의 기세춘의 <노자> 번역을 봅시다. 제가 앞에 쓴 글은 기씨의 <노자>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제가 말한 사항들이 <노자> 번역과 해석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노자> 53장은 \<노자>는 민중 저항 사상\이라는 기씨의 주장을 하는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장입니다. 그리고 기씨가 역사상 모든 주석자의 해석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기세춘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왕필의 현학으로 <노자>를 유학적으로 해석하고, 중국학자들은 청대 고증학 이후 왕필의 현학을 버렸다 하므로 중국학자들의 책만 참고가 가능하고, 우리나라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기씨의 번역을 검토할 때 기씨 말로 ‘우리나라 엉터리 학자의 대표’라는 도올의 <노자> 번역인 <노자/ 길과 얻음/ 1988>만을 비교본으로 참고합니다.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는 현행본 <노자> 81장 중 37장까지만 번역되어 있어서 나머지 부분은 비교가 불가하므로 제외합니다.
저는 도올의 <노자/ 길과 얻음>이 좋은 번역본이고, 기세춘의 <노자 강의>에 실려 있는 번역은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씨는 <노자 강의> 한자 원문의 저본으로 <백서 노자>를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대부분 왕필본을 이용했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이해는 하지만,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백서 노자>을 저본으로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어쨌든 한국학자를 무시하는 기씨 말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의 책을 참고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중국 문자학자인 고명(高明)의 <백서노자교주/ 중화서국>와 대만대학교와 북경대학교 교수를 지낸 노장전문가인 진고응(陳鼓應)의 <노자금주금역/ 상무인서관>, 영어본은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의 중국학자 로버트 헨릭스(Robert Henricks)의 책 <LAO TZU\S TAO TE CHING/ 콜럼비아대 출판부)만을 참고서적으로 합니다. 이 학자들은 <노자>를 평상시에도 읽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노자> 53장은 기세춘의 <노자 강의>의 본론인 2부 ‘민중의 저항’의 제일 첫 장 ‘민란의 성전’에 나오는 <노자> 인용문입니다. 여기에 기씨는 <노자> 75장과 76장을 포함한 3개장을 실어 놓고, 뒤에 ‘<노자> 53장 분석’이라는 해설을 따로 실어 놓아서 기씨의 한문 해석 방법과 <노자> 이해를 잘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 53장, 75장, 76장 이 세 개 장으로 <노자>가 ‘민중의 저항’을 표현한 것이고, <노자>가 ‘민중의 성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저는 <노자> 81장 전체로도 증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씨는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자> 53장 해석 2천 수 백년사에 처음인 무리한 해석을 합니다. 중국학자들도 그렇게 해석, 아니 그 비슷하게 해석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선 기세춘과 도올의 <노자> 53장 전문 번역을 봅시다.
기세춘:
만일 나에게 조그만 지혜가 있다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를 행해
오직 (묶인 것들을) 풀어주는 해방을 공경할 것이다.
무위자연의 대도는 심히 평이한 길인데도
사람들은 소도小道(仁義)를 좋아하고
조정은 민중을 심히 닦달하니 농토는 황폐하고 창고는 비었다.
의복은 아름다운 수를 놓고, 허리엔 날카로운 칼을 차고
실컷 먹고 마시고 재화는 남아돈다면
이를 일러 ‘도둑의 사치’라 하니 도道가 아니지 않는가?
김용옥: (기씨의 번역과 비교하기 쉽게 칸을 바꾸었음)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조정의 뜨락이 심히 깨끗할 때 백성들의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어있다.
정교로운 무늬비단옷을 입고 시퍼런 칼을 띠에 두르고
마시고 먹는 것을 싫도록 하고 가진 재화에 남음이 있는 그자들은 누구인가?
이놈들을 일러 도둑놈이라 하는 것이다. 길이 아닐진대!
이 두 가지 번역문을 보면 기씨의 경우 한자도 덧붙이고 괄호도 쳐가며 친절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기씨는 우리말이 한문을 잘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작업이 필요하거나, 독자가 그런 것 없이는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도올 번역의 경우 기씨와는 몇 군데 해석이 다르지만 그 자체로 이해 못하거나 우리말이 어색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씨의 번역 중 ‘오직 (묶인 것을) 풀어주는 해방을 공경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그런대로 이해는 가지만 이게 한글 맞습니까? 괄호를 치려면 ‘풀어주는’까지 괄호 안에 넣어야 합니다. ‘해방’의 ‘해(解)’ 자, ‘방(放)’ 자 가 모두 ‘풀어주다’라는 뜻 아닙니까? 괄호 안의 내용은 빼고 읽어도 되고, ‘오직’이라는 말은 부사이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됩니다.
‘해방을 공경한다.’
<노자>를 ‘민중의 저항’과 관계된 책으로 만들기 위한 기씨의 노력이 이렇게 기형적인 한글을 만든 것입니다. ‘해방’이 무슨 사람도 아니데 ‘동경’이면 모를까 무슨 ‘공경’입니까? 이 ‘공경’에 해당되는 <노자> 원문의 한자가 ‘畏(두려워할 외)’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해방’에 해당되는 한자가 ‘施(베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씨는 자기 의도에 맞춰 무리한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한자라도 의미는 천양지차일 수 있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한자의 수가 적기 때문에 ‘이체자(異體字; 뜻은 같지만 모양이 다른 글자)’, ‘가차자(假借字; 뜻이 다른 글자를 음이 같거나 유사해서 빌려 쓴 글자)’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자>에서는 하나의 한자가 여러 가지 뜻으로, 심지어 반대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모두 <노자> 전체의 의미와 관련해서 보거나, 다른 문헌의 용례를 참고하여 그 한자의 뜻을 알아내지만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기씨 처럼 ‘내가 <노자>의 본뜻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릅니다. 기씨도 의미가 애매한 한자의 경우 다른 문헌의 용례를 찾지만 자기 의도와 맞지 않으면 어떤 고전 문헌을 뒤져서라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 경우를 찾아냅니다. 고전 한문 공부를 안 해보신 분들은 평소 엄청난 공부를 해야 그런 경우를 다 찾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별 일 아닙니다. 큰 한자 사전과 한문 고전 일자 색인만 있으면 됩니다. 한문 공부할 때는 허사(虛辭)사전도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노자>에 나오는 ‘도(道)’ 자가 몇 개냐고 물으면 5분 이내에 답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노자 일자 색인(老子一字索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자 색인에는 그 문헌에 나오는 모든 글자의 용례가 차례로 정리되어 있어서 그 글자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어떤 경우에 어떻게 쓰였는지 책을 다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에 ‘베풀 시(施)’ 자는 단 1번 나옵니다. ‘두려워할 외(畏)’ 자는 8번 나오고 저는 모두 ‘두려워 할 외’자의 의미로 다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두려워할 외(畏)’ 자를 ‘공경하다’의 뜻으로 쓴 것이라는 사람은 기씨가 유일합니다. “기씨의 경우가 유일하다니? 그러면 네가 이제까지의 모든 <노자> 주석서를 다 봤다는 말인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다 읽어 본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참고한다고 말한 고명이나 진고응, 헨릭스 같은 전문 <노자> 연구자들이 저를 대신해서 다 읽어 보고 책에 써 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책을 대부분 읽어 봤기 때문에 <노자>에 관한 한, 남들과 다르지만 옳을 가능성이 있는 해석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압니다. 가능성있는 해석에 기씨의 설(기씨는 진리라고 생각하겠지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3편 / 기세춘의 어이없는 ‘<노자> 53장 분석’
기씨가 ‘두려워할 외(畏)’ 자에 ‘공경하다’라는 의미를 억지로라도 붙인 것은 ‘베풀 시(施)’ 자를 ‘해방’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기씨의 <노자 강의>를 봅시다.
기씨는 53장의 각주에 ‘施(시)=舍也, 赦也.’라는 주를 달아 놨습니다. 그리고 ‘<노자> 53장 분석’이라는 소제목으로 이 53장이 ‘분명히 해방의 담론’인 <노자>를 왕필의 현학에 따라 우리 학자들이 왜곡하여 해석했다고 합니다. 좀 길지만 기씨의 글을 전부 인용합니다. 이것이 기씨의 한문 해석 방법의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노자> 53장에 대해 기세춘이 분석한 내용을 읽어 보니 한문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이 읽을 수 있을까, 정말 이런 해석이 기씨의 진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씨가 번역이 뭔지, 해석이 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논의하기 편하게 <노자 왕필 주>의 <노자> 53장 원문을 미리 써둡니다. 기씨의 원문도 이것과 똑 같습니다.
<노자> 53장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사아개연유지, 행어대도, 유시시외.
大道甚易, 而民好徑. 대도심이, 이민호경.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조심제. 전심무, 창심허.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복문채, 대리검, 염음식, 재화유여.
是謂盜夸. 非道也哉! 시위도과. 비도야재!
다음 인용문이 기세춘의 <노자 강의> 87페이지에서 90페이지까지입니다. 보기 낫게 칸을 띈 것 외에는 변조한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유시시외(唯施是畏)’와 ‘조심제(朝甚除)’ 부분을 분리하여 비판합니다.
기세춘의 ‘<노자> 53장 분석’, ‘유시시외(唯施是畏)’의 부분 인용
\"이처럼 <노자> 왜곡은 왕필의 현학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모두 왕필을 따라 왜곡을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전형적인 한 사례가 노자 53장이다.
<노자> 53장은 분명히 해방의 담론이다. “조심제朝甚除”는 공실과 거실의 착취를 고발한 것이고, “도과盜夸”는 지배자들을 도둑으로 규정한 것이며, “유시시외唯施是畏”는 이에 맞서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학자들은 이를 거꾸로 반동적인 글로 왜곡하고 있다.
첫째, <노자> 53장의 글을 해석함에 대도大道와 소도小道를 구별하지 않는다. 대도는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의 도를 말하고 소도는 공자가 말한 인의仁義의 도를 말한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 대동大同사회의 도를 ‘대도’라 하고 소강小康사회의 도를 ‘인의’라 하여 구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왕필 이후부터 노자의 도를 유가의 도와 혼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노자 53장의 “대도”는 공자의 ‘인의의 도’가 아니라 노장의 “무위자연의 도‘를 뜻한다.
둘째, “유시시외唯施是畏”의 ‘시施’는 ‘사면赦免’의 뜻이며 ‘외畏’는 ‘경외敬畏’의 뜻이므로 ‘풀어주는 것(해방)을 공경한다’로 풀이해야 옳다. 그런데 왕필은 ‘시施’자를 ‘과장한다’는 뜻으로 읽고 “수완을 발휘하여 공로를 과장하려는 것(施爲)”으로 해석했으며, 청대 훈고학자 왕염손王念孫(1744~1832)은 ‘시施’를 ‘이迆’의 오誤로 읽고 ‘사邪’의 뜻으로 해석했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가 왕염손을 따라 ‘사도邪道를 두려워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글은 죽간본에는 아예 없고, 백서본에는 ‘시施’가 ‘이迆’로 되어 있다. ‘이迆’자는 원래 ‘사행衺行(천천히 걷다), 미靡(쏠리다)’의 뜻이며, 주례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서는 ‘사의邪依’의 뜻으로 풀이했으나 이때 사邪도 ‘기울다, 비스듬하다, 완만하다’는 뜻일 뿐 ‘거짓’이라는 뜻은 없다. 즉 ‘이迤’자는 ‘이迆’자 모두 어정거리며 걷는 모습을 말한 것이지 거짓의 뜻이 아니다. 다음의 사례에서 보듯 진秦나라 이전 시대의 문서에서 ‘시施’자는 대체로 ‘사赦(풀어주다)’의 뜻으로 ‘이迆’자는 ‘완 緩(느슨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기세춘의 <노자> 53장 분석\을 분석함
[기세춘]: \"이처럼 <노자> 왜곡은 왕필의 현학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모두 왕필을 따라 왜곡을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전형적인 한 사례가 <노자> 53장이다.\"
[노바당]: 위의 글을 읽는 분들은 기씨가 이 글의 앞(<노자 강의> 처음부터 p69까지)에서 왕필이 어떻게 <노자>를 왜곡했는지 <노자> 본문과 왜곡된 번역문의 예를 들어 충분히 설명했을 것으로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노자> 53장이 <노자 강의>에서 기씨가 <노자>를 처음 인용한 장입니다. 기씨의 <노자 강의>는 <노자> 1장부터 81장까지 차례로 번역, 해설한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한 후, 거기에 맞다고 생각하는 <노자>의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기씨는 왕필이 ‘허무를 숭상하는 귀무론(貴無論)’으로 <노자>를 왜곡했다는 주장만 할 뿐 ‘귀무론’이 무언지, 그게 왜 <노자>를 왜곡한 것인지에 대한 증명은 없습니다. <노자>의 내용도 없고, 왕필의 철학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 처음부터 ‘왕필이 <노자>를 왜곡했다’는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기씨는 왕필의 왜곡에 대한 증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가 ‘하안과 왕필의 죄악은 폭군 걸주(桀紂)보다 심하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기씨는 고염무가 ‘하안, 왕필이 민중의 해방을 말한 노자를 회칠한 무덤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죄인으로 지목했다’고 말합니다.(<노자 강의> p6)
그러나 정작 기씨가 인용한 고염무의 글에는 비판을 받은 이유가 뭔지 말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기씨에게는 왕필이 비판받았다는 사실만 중요하겠지만, 비판이 유효하려면 그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씨가 인용한 고염무의 글을 봅시다.
“昔范武子論王弼何晏 석범무자논왕필하안
二人之罪 甚於桀紂. 이인지죄 심어걸주.
以爲一世之患輕 이위일세지환경
歷代之害重. 역대지해중.
自喪之惡小 迷衆之罪大. 자상지오소 미중지죄대.(음은 노바당이 달았음)
위진시대에 범무자는 하안과 왕필을 논평하기를
“두 사람의 죄가 폭군 걸주보다 심하다”고 했다.
일세에 끼친 해는 가벼우나
후대에 끼친 재해는 무거우며
자기를 해친 해악은 작으나 대중을 미혹한 죄는 크다.(<노자 강의> p65)“
위 글을 보면 범무자가 하안, 왕필이 욕했다는 사실만 있을 뿐 그 이유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런 글은 기씨 주장의 증거로서의 가치가 전무합니다. 저는 고염무의 <일지록>이 없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기씨가 말한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짐작이지만, 경학(經學; 유교 경전 연구)을 하는 유학자로서 범무자가 비판한 것은 하안과 왕필이 후한 말 이후 타락하고 쇠락한 유학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장을 끌어들였는데, 나중에 이들의 학문으로 인해 유학이 부흥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몰락하고, 노장이 현학(玄學)이라 하여 득세하게 된 빌미를 주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 어쩐지는 지금의 논의와는 무관합니다. 하여튼 범무자의 비난이 기씨 말대로 ‘민중의 해방을 말한 <노자>를 왕필이 유학화하여 왜곡\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글에 인용한 유소감의 말(<노자>의 ‘무’와 왕필의 ‘무’가 다르다는 것은 학계의 상식이다)대로 왕필의 <노자> 주석은 영향력있는 <노자> 해석의 한 가지일 뿐, 그대로 따르는 학자는 없습니다. 기씨는 중국학자들은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왕필의 <노자> 해석에서 벗어났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아직도 왕필의 영향 때문에 <노자>를 왜곡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됩니다.
기씨가 무시하는 우리나라 학자들 다수가 대만대학교나 북경대학교 등 중국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기씨 말대로라면 우리나라 학자들이 중국에서 학위를 받을 때는 중국식으로 <노자>를 해석하고, 한국에 와서는 왕필 식으로 <노자>를 왜곡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국내파 학자들도 다 중국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합니다. 기씨의 이런 주장과 이에 대한 제 반박은 사실 말장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본문을 확인 해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기씨가 자기를 제외한 모든 번역이 ‘왕필 식 왜곡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노자> 53장에 대한 기세춘의 해석을 봅시다. 글이 길어지겠지만 기씨 해석이 잘못 된 것이라면 기씨 책 800페이지는 모두 헛소리가 됩니다. 기씨의 <노자 강의> 전체가 ‘<노자>는 민중의 저항 사상’이라는 기초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기세춘]: \"<노자> 53장은 분명히 해방의 담론이다. “조심제朝甚除”는 공실과 거실의 착취를 고발한 것이고, “도과盜夸”는 지배자들을 도둑으로 규정한 것이며, “유시시외唯施是畏”는 이에 맞서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학자들은 이를 거꾸로 반동적인 글로 왜곡하고 있다.\"
[노바당]: <노자> 53장은 해석이 어려운 장이 아닙니다. 이 장은 <노자>의 어려운 사상을 말한다기 보다 ‘위정자가 백성을 착취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말고 정치를 똑바로 잘 하라’는 정도의 상식적 조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왕은 대도를 걸어라’라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노자의 말이 너무 쉽고, 상식적이라도 권력과 부를 가진 통치자가 그대로 하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물론 이 ‘대도(大道)’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노자>에서 ‘도(道)’ 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노자>에 어려운 말만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씨가 말하는 “조심제朝甚除”와 “도과盜夸”의 뜻을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지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이의는 없습니다. 단지 기씨가 그런 의미에 이르는 과정에는 큰 착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씨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시시외(唯施是畏)’의 ‘시(施)’ 자를 ‘해방’으로, ‘외(畏)’자를 ‘공경하다’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라’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저 역시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데 찬성합니다. 그러나 ‘유시시외’의 \시\ 자가 무슨 뜻인지 100% 확정할 수는 없으나, 기씨가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래에 기씨의 설명이 있으니 다시 봅시다.
[기세춘]: \"첫째, <노자> 53장의 글을 해석함에 대도大道와 소도小道를 구별하지 않는다. 대도는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의 도를 말하고 소도는 공자가 말한 인의仁義의 도를 말한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 대동大同사회의 도를 ‘대도’라 하고 소강小康사회의 도를 ‘인의’라 하여 구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왕필 이후부터 노자의 도를 유가의 도와 혼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노자 53장의 “대도”는 공자의 ‘인의의 도’가 아니라 노장의 “무위자연의 도‘를 뜻한다.\"
[노바당]: 여기서 이 문장에 대한 기씨와 도올의 번역을 비교해 봅시다.
大道甚易, 而民好徑. 대도심이, 이민호경.
기세춘: 무위자연의 대도는 심히 평이한 길인데도 사람들은 소도小道(仁義)를 좋아하고
도올: 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기씨의 번역에는 원문에는 없는 ‘무위자연의’라는 말과 괄호 안에 ‘인의(仁義)’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는데, 해설에 \대도\가 ‘<예기>의 대동’이니, \소도는 공자가 말한 인의仁義의 도를 말한다\느니 하면서 ‘공자’까지 갖다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이 문장의 의미의 폭을 줄이는 결과가 됩니다.
이 문장은 기씨가 ‘소도(小道)’라고 번역한 ‘지름길 경(徑)’ 자 외에는 어려운 한자가 없습니다. 이 ‘경’ 자를 기씨는 작은 길이라는 의미의 ‘소도’라 번역하고, 도올은 ‘샛길’이라고 번역하지만 의미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라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길은 다니기가 훨씬 쉬운데, 사람들은 골목길로 다니기 좋아한다.’ ‘큰 길’이 뭘 의미하느냐, ‘골목길’이 뭘 의미하느냐는 대체로 읽는 사람 마음이고, 그 의미는 <노자>를 더 읽어감에 따라, <노자> 전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씨는 우리 학자들이 대체로 ‘대도’를 ‘공자의 인의’로 해석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학자는 없습니다. 도올의 번역인 ‘큰 길’에서 공자의 냄새가 납니까? 아니, 도올의 번역이 기씨 말대로 \노자의 도를 유가의 도와 혼동시킨 것\입니까? 아무리 해석의 폭을 넓혀도 <노자> 자체에서 ‘인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불가능합니다.
<노자> 18장: 大道廢, 有仁義. 대도폐, 유인의.
기세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가 쇠하니 인의仁義가 나오고
깅용옥: 큰 길이 없어지니깐 어짐과 옳음이 있게 되었다.
<노자> 19장: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기세춘: (공자의) 인의仁義를 끊어버려라. 백성이 효제로 돌아올 것이다.
김용옥: 어짐을 끊어라! 옳음을 버려라! 뭇사람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그리고 원래 공자는 ‘인(仁)’을 말하였고 ‘의(義)’를 병칭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인의(仁義)’를 병칭한 사람은 후대의 맹자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맹자 이전일 수 없다는 설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8.08.10)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4편 / 기세춘: 이경숙, 비교표
[노바당]: 저는 이경숙, 기세춘같은 사람들은 고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제 멋에 살면 됩니다. 제가 답답해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한테 뭔가 있는가 해서 따라 다니는 분들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나, <노자>와 같은 좀 어려운 듯한 데에 관심을 가진 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능력을 너무 낮추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더 생각해 보고,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도 포기하고 스승을 모시고 그 말에 따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단언컨대, 다른 데에 스승 별로 없습니다. 스승 잘 못 모시면 스승 없느니만 못 합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노자> 때문에 이경숙, 기세춘을 스승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8.08.09)
기세춘: 이경숙, 비교표
-황당한 노자 전문가 2인
기세춘: <노자 강의/ 2008>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2000>, <완역 이경숙 도덕경/ 2004>
-이 책들에 대한 비판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노바당 blog.naver.com/jaseng54, paxkonet.com/넷워치/노자제대로읽기
<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 노바당 blog.naver.com/jaseng54, paxkonet.com/넷워치/노자제대로읽기
-한심한 신문기자들
기세춘 건: <노자>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니! (한겨레/ 한승동)
묵점의 한문학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급이다. (한겨레/ 한승동)
이경숙 건: 도올 김용옥이 임자를 만났다. (중앙일보/ 배영대)
곳곳에서 통찰력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도덕경 2천5백년의 해석사를 뒤집어버리려는 원력(원력)의 시도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거리다. (중앙일보/ 배영대)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 비결은 뭔가? (월간 중앙 배영대)
저자가 책을 통해 드러내 보이는 학문적 깊이와 통찰력, 상상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문화일보/ 김종락)
-왕필, 도올 개 무시
기세춘: 김용옥의 ‘노자’는 엉터리 번역과 철부지같은 엉뚱한 사설을 늘어 놓고 있어 한 군데도 취할 곳이 없다.
왕필과 그의 제자인 도올은 노자의 저항적 담론을 우민적 반동으로 왜곡한다.
이경숙: 도올은 전 국민이 보는 TV에 나와서 고전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삼류 개그쇼를 한판 때린거다.
도올은 근본적으로 노자를 잘못 알고 있으며 전혀 모른다.
암만 봐도 도올은 <도덕경>을 볼 게 아니고 <천자문>을 봐야 될 애다.
천방지축 까부는 소년 왕삐
-잘난 척
기세춘: 지금까지의 노자는 본래의 노자가 아니다.
이경숙: 앞으로 도덕경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완역 이경숙 도덕경>은 노자 사상과 철학에 대한 2천5백년의 오류와 터무니없는 편견과 황당무계한 해석을 바로잡는 작업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황당한 주장
기세춘: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다.
<노자> 53장은 왕필의 곡학아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왜곡의 사례이다.도덕경 주해는 오역(誤譯)의 역사다.
이경숙: 시중에 나와 있는 노자 관련 책을 모두 사 보았다. 내가 비난한 도올뿐 아니라 왕필(王弼) 도 덕경 이후 2500년 동안의 번역과 해설이 모두 잘못된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대단한 한문 고전 재번역 주장
기세춘: 노장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하다.
이경숙: 전세계 동양학계에 충격과 경악과 탄식을 주게 될 책입니다. 동양학자들은 전부 사표쓰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모든 고전에 대해 재번역 작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촉구할 생각입니다.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5편 / \베풀 시(施)\ 자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노자> 53장 전반부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사아개연유지, 행어대도, 유시시외.
大道甚易, 而民好徑. 대도심이, 이민호경.
‘유시시외(唯施是畏)’는 ‘해방’과는 무관하다
[기세춘]: 둘째, “유시시외唯施是畏”의 ‘시施’는 ‘사면赦免’의 뜻이며 ‘외畏’는 ‘경외敬畏’의 뜻이므로 ‘풀어주는 것(해방)을 공경한다’로 풀이해야 옳다. 그런데 왕필은 ‘시施’자를 ‘과장한다’는 뜻으로 읽고 “수완을 발휘하여 공로를 과장하려는 것(施爲)”으로 해석했으며,
[노바당]: 기씨는 여기서도 예의 수법을 동원합니다. “‘시施’는 ‘사면赦免’의 뜻이며 ‘외畏’는 ‘경외敬畏’의 뜻이므로 ‘풀어주는 것(해방)을 공경한다’로 풀이해야 옳다.”고 단정지어 놓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기씨가 “<노자> 53장은 분명히 해방의 담론이다”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수법은 논리학에서 ‘정의에 의한 존재 강요의 오류(fallacy of substantiating a word by definition)\라 하여 초보적 오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기씨가 몰랐다면 할 수 없지만, 의식하고 있었다면 일종의 지적 사기입니다.
정의에 의한 존재 강요의 오류(fallacy of substantiating a word by definition) (<논리와 비판적 사고>김광수/ 철학과 현실 p438)
존재하는 것들은 언어에 의해서 표상될 수는 있지만, 언어로 인해 존재의 양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말의 꼬리를 다리라 부른다면, 그 말은 몇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섯이요\"라고 사람들은 응답하였다.
링컨이 대답하였다.
\"아니요. 말의 꼬리를 다리라 부른다 해서 꼬리가 다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앞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써 놓고서 다시 ‘나는 행복하다’로 고쳤다. 그래도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시의 얼룩> 황지우)
<노자>와 한문을 잘 모르는 분들이 기씨의 정의를 그냥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기씨의 말을 모두 옳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씨가 ‘<노자>는 민중의 저항 사상이며 민란의 성전이다’라는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려면 먼저 “‘시施’는 ‘사면赦免’의 뜻이며 ‘외畏’는 ‘경외敬畏’의 뜻”이라는 것부터 확고하게 증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기씨도 증명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꿰맞추기이지 증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위에 인용한 <노자> 원문을 의미가 연결된 2줄 만 기씨의 번역과 도올의 번역을 비교해 봅시다. ‘使我介然有知(사아개연유지)’는 ‘만일 나에게 조그만 지혜가 있다면’이라는 기씨와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라는 도올의 번역이 같으므로 논의에 편하게 빼고 나머지 구절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척 보면 알 수 있는걸 이렇게 하고 있는 제가 조금 한심하기도 합니다.
1.行於大道, 唯施是畏. 행어대도, 유시시외.
2.大道甚易, 而民好徑. 대도심이, 이민호경.
기세춘;
1.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를 행해 오직 (묶인 것들을) 풀어주는 해방을 공경할 것이다.
2.무위자연의 대도는 심히 평이한 길인데도 사람들은 소도小道(仁義)를 좋아하고
도올:
1.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2.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기씨의 번역 중 ‘무위자연의’ 라는 말과 괄호 속의 ‘인의(仁義)’라는 말은 원문과는 상관없이 기씨가 추가한 말입니다. 이런 번역은 번역의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 기씨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올 번역 중의 ‘천하(天下)’를 의미하는 ‘하늘 아래’라는 말도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런 말들을 빼고 본다면 두 사람의 번역문의 큰 차이는 역시 ‘유시시외’의 해석입니다.
기씨 말대로라면 도올의 번역은 왕필의 왜곡을 받아들인 것이겠지만, 사실은 청대 고증학을 거친 중국학자, 미국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입니다. 한마디로 ‘유시시외’라는 구절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시(施)’ 자가 일반적인 훈인 ‘베풀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가차자’로 쓰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원래는 어떤 의미의 글자가 없어서 발음이 같았을 ‘시(施)’ 자를 대신 쓴 것일까를 연구하는 정도입니다. 그 의미는 위의 원문에서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기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위의 원문 1번과 2번은 같은 의미를 표현만 다르게 반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도올의 번역으로 재구성 해본 문장입니다.
‘큰 길은 아주 다니기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로 다닌다. (내가 조금이라도 뭘 아는 사람이라면) 큰 길을 갈 때에도 샛길로 빠질까봐 겁낼 것이다.’ (도올은 ‘시(施)’ 자와 ‘경(徑)’ 자의 의미가 같다고 보는 것임)
이런 해석은 저나 도올의 해석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국학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지만 기씨가 무시하므로 인용하지 않습니다.
고명: 고명의 <백서노자교주(帛書老子校注)>는 문자고증이고, 전문가 상대의 책이므로 현대중국어 번역이 없습니다. 고전 한문을 공부하지 않은 중국인들은 통행본 <노자>의 한문을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한문을 아래의 진고응의 번역처럼 현대중국어로 번역해 주어야 이해합니다. 고명의 ‘시(施)’ 자 고증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진고응: <노자금주금역>
1. 在大道上行走, 担心惟恐走入了邪路. 재대도상행주, 단심유공주입료사로.
2. 大道很平坦, 但是人君却喜歡走斜徑. 대도흔평탄, 단시인군각희환주사경.
여기서 보면 진고응은 ‘시(施)’를 ‘사로(邪路)/ 나쁜 길’로, ‘외(畏)’를 ‘공(恐)/ 두려워하다’로, ‘경(徑)’을 ‘사로(斜路)/ 굽은 길, 샛길’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고응의 책은 <노자>를 좀 더 깊게 공부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라고 할 정도입니다. <노자금주금역(老子今注今譯)/ 북경 상무인서관/ 2003>은 곽점 초간 <노자>와 마왕퇴 백서 <노자>를 참조한 최신본입니다. 이 책은 원래 1970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제목만 약간씩 바꾸어 지금까지 계속 개정한 것입니다.
저는 <노자주역급평개(노자주역급평개)/ 홍콩 중화서국/ 1987) 본을 가장 오래 봤고, 지금은 개정판인 <노자금주금역>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에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라는 제목으로 <노자금주금역급평가(老子今注今譯及評價)/ 영남대출판부/ 2004>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고응의 번역에 ‘인군(人君)/ 왕, 군주’라는 말이 있는 것은 진고응이 원문의 ‘백성 민(民)’ 자를 ‘사람 인(人)’ 자로 교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전에서 ‘인(人)’ 자는 문맥에 따라 ‘사람들’, ‘다른 사람들’ ‘왕 또는 군주’로 읽습니다.
위의 진고응의 모든 책에는 선진(先秦/ 진시황이전)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노자> 주석서나 연구서 중 272 종의 책의 목록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외국인의 책으로는 일본의 후쿠나가 미쓰지(福永光司)의 <노자>와 김용옥의 <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노자자연철학중무위지공능)> 만이 실려 있습니다.
로버트 헨릭스:
1.in walking on a Great Road, it\s only going astray that I would fear.
2.The Great Road is very level: But people greatly delight in tortuous paths.
astray
길을 잃고; 못된 길에 빠져, 정도에서 벗어나, 타락하여/ go astray 길을 잃다, 타락하다
tortuous
1.구불구불한, 굽은; 비비 꼬인; 비틀린; 완곡한, 2.《비유》 복잡한, 우여곡절의 3.부정(不正)한
(네이버 영어사전)
왕필의 왜곡이 아니라 왕필의 해석일 뿐이다
기세춘은 왕필이 “‘시施’자를 ‘과장한다’는 뜻으로 읽고 ‘수완을 발휘하여 공로를 과장하려는 것(施爲)’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의 왕필의 주를 봅시다.
1.行大道於天下, 唯施爲之是畏.
행대도어천하, 유시위지시외.
2.言大道蕩然正平, 而民猶尙舍之而不由, 好從邪徑, 況復施爲以塞其中乎. 故曰大道甚易,而民好徑.
언대도탕연정평, 이민유상사지이불유, 호종사경, 황부시위이색기중호. 고왈대도심이,이민호경.
제가 가지고 있는 <왕필 노자주>의 번역서는 김학목의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註)>와 임채우의 <왕필의 노자>입니다. 이 분들이 기세춘이 왕필의 왜곡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우리나라의 왕필 전문가들입니다. 이 분들의 <노자> 번역은 설사 기씨 말대로 왕필의 왜곡에 영향을 받았다 해도, ‘왕필 주’의 번역은 왕필의 왜곡과는 상관없이 한문 읽을 수 있는 분이라면 해석이 가능한 것이므로 이 분들의 번역을 옮깁니다.
김학목:
1.대도를 천하에 행하게 될지라도 오직 시행하는 것만은 두려워한다.
2.큰 길이 넓고 평평하게 쭉 곧은데도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버려두고 다니지 않으며 굽은 길로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하물며 다시 시행하고 다스려서 대도의 중앙을 막음에랴! 그래서 “큰 길은 아주 평탄한데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라고 했다.
임채우:
1.천하에 대도를 행한다면 오직 작위를 베푸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2.대도(大道)가 넓직이 바르며 고르더라도 백성들은 오히려 (큰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고 샛길을 좇기를 좋아하거늘, 하물며 다시 작위를 베푼다고 큰 길의 한가운데를 막아놓음에랴? 그러므로 말하기를, 대도가 아주 평이한데도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위 번역에서 보듯이 왕필은 ‘시(施)’ 자를 ‘베풀다, 시행하다’는 뜻 그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고응이나 헨릭스의 번역에서 보듯이 일반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김학목과 임채우는 <노자> 원문의 번역에도 왕필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저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임채우의 번역은 <왕필 주>의 ‘시위(施爲)’를 ‘작위를 베풀다’라고 어색한 우리말이지만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데, 김학목은 ‘위(爲)’ 자의 번역은 빼먹고 ‘시위(施爲)’를 그냥 ‘시행하다’로 번역하거나 ‘위’ 자를 ‘다스리다’라고 해서 ‘시행하고 다스려서’라고 번역하는데 일관성도 없고,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왕필주>의 ‘위(爲)’ 자는 임채우의 말대로 ‘작위(作爲)’라는 뜻입니다. <노자>에서 ‘위(爲)’ 자는 대부분 ‘하다, 되다’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무위(無爲)’의 ‘위(爲)’ 자는 노자의 고유명사로 대체로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이고, 강제적인 권력 행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세춘은 “왕필이 ‘시施’자를 ‘과장한다’는 뜻으로 읽고, ‘시위(施爲)’를 ‘수완을 발휘하여 공로를 과장하려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자기 혼자만의 해석이지, 왕필 전문가를 포함해서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씨는 있지도 않은 이런 말을 만들어서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하는데 기씨의 전공 중 하나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씨의 말들이 다 이런 경우입니다.
“왕필이 노장사상을 유교화했다.”
“왕필 이후부터 노자의 도를 유가의 도와 혼동시킨 것이다”.
“왕필이 <노자>의 저항적 민중성을 탈색시켜버리고 지배계급에 복무하도록 왜곡했다.”
“기존 번역자들(당연히 도올 포함)의 <노자> 해석이 ‘수양이나 읊조리는 유한계급의 청담이나 자본주의적 처세훈 또는 초월적 신비적 사상으로 노장을 변질시켰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fallacy of straw man) (<논리와 비판적 사고>김광수/ 철학과 현실 p423)
상대의 입장(논지, 이론, 논증, 사상)을 손쉽게 격파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약하게 또는 문제성이 있게 재구성하여 비판하는 오류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입장을 비판(평가)할 때는, 그 입장을 제시한 사람의 편에서 그 입장을 가장 강하게 대변하는 것이 공평할 뿐만 아니라 그 입장에 대한 비판의 질을 높히는 첫걸음이 된다. 상대를 허수아비라 해서 상대가 허수아비가 되는 것도 아니고, 허수아비를 쓰러뜨렸다 해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기씨는 ‘시(施)’ 자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몇가지 고전의 예를 들어 증명하려 하는데 그것도 웃기지만, 저는 기씨가 ‘유시시외(唯施是畏)’를 ‘해방을 공경하다’라고 해석한 이유를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노바당이 짐작한 기세춘의 발상>
1. 민중운동가인 나에게는 <노자> 53장이 민중의 해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시(施)’ 자는 ‘베풀다(베풀 시)’라는 동사다.
‘베풀다, 베풀다, 베풀어 주다, 베풀어 주다, 풀어 주다, 풀어 주다...’
이렇게 계속 읽다 보니 ‘베풀다’나, ‘풀어주다’나 비슷한 말인 것 같다.
맞다! ‘베풀 시’ 자는 ‘풀어 주다’라는 의미도 있는 동사다.
4.풀어 주는 것은 해방이다.
5.해방은 좋은 것이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외’ 자가 여기서는 다른 뜻으로 쓰인 것이다.
6.아! 외경(畏敬)이라는 말이 있다. 경외라고도 쓴다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거나,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거나, 하여간 공경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공경할 경(敬)’ 자라는 좋은 뜻이 있으니 해방이라는 말과 잘 맞는다.
7.“해방을 공경한다.”
그런대로 말이 되는 것 같다.
8.‘해방을 공경하다’라니?, 해방이 사람이냐 라고 누가 따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긴 내가 스승인데 누가 따지겠나?
만약 따지는 놈이 있으면 ‘해방을 바란다’는 뜻의 노자적 표현이라고 우기자.
그런데 베풀어주는 것과 풀어주는 것, 두려워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는 말입니다.(2008.08.12)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6편 / 기세춘의 기형적 한문 읽기
기세춘의 기형적 한문 읽기
저는 앞 편에서 ‘노바당이 짐작한 기세춘의 발상’이라는 글을 재미삼아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속된 글을 쓰기 위해 <노자 강의>의 <노자> 53장 해설에 기씨가 <장자(莊子)>에서 인용한 글과 번역을 보니 그게 그냥 제 짐작만은 아니었습니다. 기씨는 정말 ‘시(施)’자의 원 의미인 ‘베풀어주다’와 기씨가 좋아하는 ‘해방’의 의미인 ‘풀어주다’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씨가 인용한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기씨의 한문 이해 능력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기세춘] “노자를 계승한 장자도 민중의 해방을 곳곳에서 강조했다. 다음 글은 구체제를 옹호하는 공자의 인仁이 민중을 속박한다고 비난하는 장자의 글이다. 여기서도 \시施\는 풀어준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한다.
장자莊子/ 잡편雜篇/ 열어구列禦寇
(안합顔閤이 말했다.)
今使民離實學僞 非所以視民也. 금사민이실학위 비소이시민야.
실질을 떠나 민民을 거짓되게 가르치는 것은 민을 돌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爲後世慮 不若休之 難治也 위후세려 불약휴지 난치야
죽은 후를 걱정하고 이처럼 쉬지 못하게 하니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施於人而不忘 非天布也. 시어인이불망 비천포야.
사람을 풀어주고(施)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베풂이 아닙니다.” (<노자 강의> p91)
저도 <장자>를 여러 번 읽었지만 모든 문장을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씨는 원문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게 아니라 대체로 자기 목적에 맞추어 번역을 하기 때문에 기씨의 번역과 해설이 제대로 된 것인가 확인할 겸 <장자>에서 원문을 확인해 봤습니다.
원문을 확인해 보니 위 글은 노나라의 애공(魯哀公)이 안합에게 공자(仲尼)를 정치하는 데 중용하는 게 좋을 것인가 하고 물으니, 안합이 공자는 가식과 말만 앞세우므로 불가하다는 대답을 하는 내용의 끝부분입니다. 기씨 말처럼 ‘공자의 인(仁)이 민중을 속박’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 ‘시어인이불망, 비천포야.(施於人而不忘 非天布也.)’라는 구절은 중니를 기용하지 말라는 안합의 대답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윗부분과 연결시켜 읽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기씨처럼 윗부분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의미 연결이 안 되고, 그 다음의 구절의 해석이 불가능해 집니다. 그래서 기씨는 이 부분까지만 인용한 것이고 억지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뒷부분과 연결시켜 읽는 저는 당연히 기씨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施於人而不忘 非天布也. 시어인이불망 비천포야.
기세춘: 사람을 풀어주고(施)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베풂이 아닙니다.
노바당: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잊어버리지 못한다면, 하늘의 베풀어줌이 아니다.
진고응: <장자금주금역(莊子今注今譯)/ 중화서국>
惠施於人而不忘其功, 這不是自然的佈施. 혜시어인이불망기공, 저불시자연적포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그 공을 잊지 못하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베풀어줌이 아니다. (노바당 역)
여기의 ‘시(施)’ 자는 ‘베풀다’라는 일반적인 훈으로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구절인데, 기씨는 ‘잊을 망(忘)’ 자까지 ‘내버려두다’라고 억지 번역을 하면서 ‘시(施)’ 자가 ‘풀어주다’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씨는 ‘천포(天布)’의 ‘포’ 자까지 ‘풀어주다’라고 하지는 못하고 ‘베풀어주다(베풂)’로 번역했습니다. 기씨 식으로라면 ‘천포(天布)’도 ‘하늘의 베풂’이 아니라 ‘하늘의 풀어줌’이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씨는 ‘베풀다’와 ‘풀어주다’를 동일시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위후세려 불약휴지 난치야(爲後世慮 不若休之 難治也)의 번역은 기씨의 한문 읽기가 얼마나 황당한지 잘 말해 줍니다. 기씨는 문맥이고 뭐고 없이 생각나는 대로, 아니 기씨가 좋아하는 ‘민중의 해방’에 꿰맞춰 한문을 읽는 것입니다.
왕이 공자를 정치에 중용할까 말까 묻는데, 안합이 정신이 이상한 놈이 아니고서야 ‘죽은 후’가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그래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바로 위의 문장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해석합니다. ‘쉴 휴(休)’ 자에는 ’그치다, 그만 두다‘의 뜻도 있습니다.
爲後世慮 不若休之 難治也 위후세려 불약휴지 난치야
기세춘: 죽은 후를 걱정하고 이처럼 쉬지 못하게 하니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노바당: 후세를 위해 걱정하신다면 (공자를 기용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다스려지기 어렵습니다. (2008.08.13)
이제까지의 제 말씀이 의심스러운 분들은 <장자/ 잡편/ 열어구>에서 전체 문장을 찾아 한번 읽어보십시오. (2008.08.13)
백서본에는 ‘시施’가 ‘이迆’로 되어 있다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사아개연유지, 행어대도, 유시시외.
기세춘: 만일 나에게 조그만 지혜가 있다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를 행해 오직 (묶인 것들을) 풀어주는 해방을 공경할 것이다.
김용옥: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기세춘]: 청대 훈고학자 왕염손王念孫(1744~1832)은 ‘시施’를 ‘이迆’의 오誤로 읽고 ‘사邪’의 뜻으로 해석했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가 왕염손을 따라 ‘사도邪道를 두려워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글은 죽간본에는 아예 없고, 백서본에는 ‘시施’가 ‘이迆’로 되어 있다. ‘이迆’자는 원래 ‘사행衺行(천천히 걷다), 미靡(쏠리다)’의 뜻이며, 주례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서는 ‘사의邪依’의 뜻으로 풀이했으나 이때 사邪도 ‘기울다, 비스듬하다, 완만하다’는 뜻일 뿐 ‘거짓’이라는 뜻은 없다. 즉 ‘이迤’자는 ‘이迆’자 모두 어정거리며 걷는 모습을 말한 것이지 거짓의 뜻이 아니다. 다음의 사례에서 보듯 진秦나라 이전 시대의 문서에서 ‘시施’자는 대체로 ‘사赦(풀어주다)’의 뜻으로 ‘이迆’자는 ‘완 緩(느슨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노바당]: 기씨는 청대 고증학자 왕염손이 ‘베풀 시(施)’ 자가 원래는 ‘비스듬할 이(迆)’ 자였는데 잘못 바뀐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백서 <노자>에는 ‘시(施)’ 자가 ‘이(迆)’ 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백서 <노자>를 보지도 못한 왕염손이 이것을 밝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씨는 이런 정도의 실력가인 왕염손이 그 ‘비스듬할 이(迆)’ 자의 해석을 ‘간사할 사(邪)’ 자로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사(邪)’ 자에는 ‘어긋나다, 기울다, 치우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문헌의 예를 들어 ‘시(施)’ 자나 ‘사(邪)’ 자가 ‘거짓’이라고 쓰인 예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도 기씨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입니다. <노자>에서 ‘시(施)’ 자를, <노자> 주석에서 ‘사(邪)’ 자를 ‘거짓’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왕염손의 글을 봅시다. 고명의 <백서노자교주/ p80>에서 인용합니다.
施讀爲迆. 施, 邪也. 言行於大道之中, 唯懼其入於邪道也.
시독위이. 시, 사야. 언행어대도지중, 유구기입어사도야.
‘시(施)’는 ‘이(迆)’로 읽는다. ‘시’는 ‘사(邪)’의 의미이다.
큰 길을 가는 중에, 혹시라도 삐뚠 길로 갈까봐 두렵다는 말이다. (노바당 역)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논의 하고 있는 것은 ‘행어대도, 유시시외.(行於大道, 唯施是畏.)’의 해석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씨가 ‘시(施)’ 자를 ‘풀어주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 한 가지입니다. ‘두려워할 외(畏)’ 자는 ‘시(施)’ 자가 ‘풀어주다’라는 뜻이 아니라면, 기씨도 ‘공경하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어대도(行於大道)’는 명백히 걷거나 마차를 타거나 간에 ‘큰 길을 갈 때’라는 뜻입니다. 이 ‘큰 길’이 무엇을 의미한다, 어떻다‘ 하는 것은 읽는 사람들의 해석이며 해설입니다. 그러므로 그 뒤의 구절도 길을 갈 때 생길 수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왕염손의 주석의 ‘사(邪)’ 자를 ‘삐뚠 길’로 번역한 것입니다. ‘샛길’로 번역하던, ‘삐뚤어진 길’로 번역하던 ‘잘못된 길, 나쁜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명(高明)은 왕염손의 고증을 인용한 후 이렇게 평가합니다.
今本‘施’字和甲,乙本‘他’與‘迆’字,古皆同音, 均假爲‘迆’. 誠如王說
금본‘시’자화갑,을본‘타’여‘이’자,고개동음, 균가위‘이’. 성여왕설
현재 통행본의 ‘시(施)’ 자는 백서 갑본, 을본의 ‘타(他)’ 자, ‘이(迆)’ 자와 고대에는 음이 모두 같았다. 모두 ‘이(迆)’ 자의 가차자다. 왕염손의 말이 옳다. (노바당 역)
여기서 저는 이 ‘시(施)’ 자의 뜻이 ‘풀어주다’가 아니라고 더 이야기할 재료도 없습니다. 고전 해석의 경우 틀린 것을 명백히 밝히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제 말씀으로도 ‘베풀 시(施)’ 자가 ‘해방’이라는 뜻이라는 기씨의 말이 억지라는 것은 이해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씨의 글에도 있지만 고대에는 ‘이(迆),’ 자, ‘시(施)’ 자가 ‘비낄 사(斜)’ 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다 같이 ‘비스듬하다, 어긋나다, 치우치다, 굽(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기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의 사례에서 보듯 진秦나라 이전 시대의 문서에서 ‘시施’자는 대체로 ‘사赦(풀어주다)’의 뜻으로 ‘이迆’자는 ‘완 緩(느슨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노자 강의> p89)
백서 <노자>에 ‘시(施)’ 자가 아니라 ‘이(迆)’ 자가 쓰여 있다면 진나라 이전의 문서에서 ‘이(迆)’ 자의 용례를 찾아야지 왜 통행본(주로 왕필본)에 있는, 후대에 바뀐 글자인 ‘시(施)’ 자의 용례를 찾습니까? 그리고 기씨 말대로 당시에 ‘이(迆)’ 자가 ‘완(緩/ 느슨하다)’의 의미로 쓰였다면 기씨의 번역도 이 의미를 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 기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가 왕염손을 따라 ‘사도邪道를 두려워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기씨는 이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왕필의 왜곡을 받아 들였다는 우리 학자들이 왜 이 구절은 왕필의 해석을 안 따르고, 모두 왕염손의 해석을 따랐나를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시(施)’ 자를 ‘삐뚤어진 길, 잘못된 길, 나쁜 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왕필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것은 왕필의 해석이 후대에 바꾸어진 ‘시(施)’ 자의 훈대로 ‘베풀다, 시행하다’라는 뜻을 살린 것이고, 아무리 대천재 왕필이라도 이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8.08.14)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7편 / 애매한 한자는 모두 ‘민중’과 관계된다?
‘제(除)’ / 또, 한자 한 글자가 문제다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조심제. 전심무, 창심허.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복문채, 대리검, 염음식, 재화유여.
是謂 盜夸. 非道也哉! 시위도과. 비도야재!
[기세춘]: 셋째, “조심제朝甚除”의 ‘제除’는 ‘몰아붙이다’는 뜻이므로 ‘조정이 백성을 심히 닦달한다’로 풀이해야 옳다. 그런데 왕필은 ‘제除’를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潔好也)”로 왜곡했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 왕필의 왜곡을 답습하고 있다.
한비자 해로편에서는 “조심제”를 “옥송번獄訟繁”으로 풀이했다. 옥송이 번다하면 전답이 황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