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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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선생님께 5 / 기독교와 노자, 왜?
김상철 2009.06.30 1674
김시천 선생님께 5 / 기독교와 노자, 왜?


아래 글은 씨알재단(함석헌 선생 기념사업회;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있은 김명수 교수의 강의(2008/7/6: “노자, 예수, 함석헌, 비틀즈-‘스스로 그러함’을 중심으로”) 에 대한 소감과 비판입니다.
김명수 교수는 부산 경성대 신학대학원 원장이고 역사적 예수와 가르침을 중시하는 진보신학자입니다.
씨알재단 홈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이 있어서 당연히 글을 올릴 수 있는 줄 알고 이 글을 작성한 후에 보니 일반 회원은 올릴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기왕 쓴 글이라 관계자들이라도 한번 읽어 보라고 씨알재단에 보냈습니다.    



기독교와 노자, 왜? / 1편


저는 7월 6일(일) 김명수 교수의 “노자, 예수, 함석헌, 비틀즈-‘스스로 그러함’을 중심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는 19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을 때부터 <씨알의 소리> 독자였고, 함석헌 선생님의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함 선생님과 같은 동네(서울 용산 원효로 3가)에 살아서 공중목욕탕에서 뵈면 벌거벗은 채로 어색하게 목례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번 강의를 듣게 된 것은 함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도 있지만 전부터 기독교인들이 <노자>를 번역하기도 하고, 이번 강의와 같이 예수와 노자를 병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평소 기독교와 <노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취미로 <노자>를 읽은 지 30년 이상 됐지만 이 시간이 제 <노자> 이해가 올바르다는 증거는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정도의 시간을 들인 덕분에 <노자>에 대한 말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자> 이해는 <노자>를 읽는 사람마다 대체로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정통적 해석이 80~90% 옳다고 보고 있어서, <노자> 전체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하는 사람은 의심의 눈으로 봅니다. 함 선생님의 <노자> 강의도 대부분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기독교와 <노자>가 연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노자의 사상이 중국 고대의 종교적 세계관을 극복한 무신론이며, 자연주의적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눈이 다른데 예수의 말과 노자의 말이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병칭되거나, 노자의 말이 예수의 말이 옳다거나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신약>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제가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부분)이 대체로 옳지만 듣는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을 너무 극단적으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죄책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좋은 말도 극단적으로 하면 곤란합니다. 여기서는 이번 강의에 언급된 <노자> 관련 부분만 비판하겠습니다.


이번 강의 제목에 나오는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말은 <노자>에 나오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은 <노자>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영어 ‘nature(네이처)’의 번역어일 뿐 <노자>의 원의와 다릅니다.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은 <노자>에서는 ‘천(天)’, 또는 ‘천지(天地)’입니다.

김교수는 이번 강의의 주제인 ‘스스로 그러함’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마가복음> 4장 26절에서 29절까지 인용했습니다. 다음 인용문이 김교수가 이번 강의에 맞게 번역한 구절입니다.(보기 낫게 칸만 바꾸었음)


(26) “그가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고,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데, 씨에 싹이 돋아나서 자라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28) 스스로 그러하게 땅이 열매를 내는데, 처음에는 줄기를 내고,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꽉 찬 낟알을 냅니다.
(29) 열매가 익으면 그 사람은 곧바로 낫을 대는데,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 (막4: 26-29)


이 글에서 28절의 ‘스스로 그러하게’라고 번역한 부분의 의미가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과 같은, 또는 유사한 의미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노자> 사상을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말을 이해하는 방식은 <노자>를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를 정도입니다. ‘무위자연’은 ‘위무위법자연(爲無爲法自然)’을 줄인 말입니다. ‘위무위법자연’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함이 없음을 하고, 스스로 그러함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저는 전에 <신약> 복음서를 몇 번 읽은 적은 있으나 위에 인용한 글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마가복음> 4장 전체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부분 만 읽어 보아도 <마가복음> 28절의 ‘스스로 그러하게’는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자>에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말은 <노자> 사상 전체를 받치고 있는 대전제입니다. 이 점은 김교수가 강의 중에 인용한 <노자> 25장의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는 ‘스스로 그러함’에 기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면 ‘도’가 아닙니다.


<노자>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에 따른다.


그런데 <마가복음> 28장의 ‘스스로 그러하게’는 김교수가 희랍어 ‘automatos\의 번역어로 쓴 것입니다. 제가 희랍어는 모르지만 ’auto\는 ‘스스로 자(自)’로 번역하고 ‘matos\는, ‘움직일 동(動)’으로 번역한다는 정도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성서에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복음 4장 [개역한글]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마르코의 복음서 4장 [공동번역]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Mark 4장 [NASB]
26. And He was saying, \"The kingdom of God is like a man who casts seed upon the soil;
27. and he goes to bed at night and gets up by day, and the seed sprouts and grows--how, he himself does not know.
28. \"The soil produces crops by it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head, then the mature grain in the head.
29. \"But when the crop permits, he immediately puts in the sickle,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马可福音 4  
26. 又说,神的国,如同人把种撒在地上,
27. 黑夜睡觉,白日起来,这种就发芽渐长,那人却不晓得如何这样。
28. 地生五谷,是出于自然的。先发苗,后长穗,再后穗上结成饱满的子粒。
29. 谷既熟了,就用镰刀去割,因为收成的时候到了。


김교수가 인용한 ‘automatos\는 희랍어 신약으로 쓰여 지기 이전의 예수의 말이 원래 어떤 의미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노자>에서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27절의 마지막 부분, 즉 농부가 이런 과정에 무지하고 그래서 간여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이 말이 우리말로 ’스스로‘, ’저절로‘, 영어로 ’by itself\, 중국어로 ‘自然的(자연적)’로 번역된 것은 <노자>에서와 같이 생명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한글 번역어로 ‘스스로, 저절로’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과 연결시키는 것은 글을 너무 지나치게 강의 목적에 맞춰 읽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automatos\는 ’자동적으로(저절로), 누구의 간섭없이, 홀로, 자연적으로 ‘라는 부사입니다. 이것을 개역한글 성서에서 ’스스로‘라고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저절로‘라고 번역했을 것입니다. 저는 위에 인용한 <마가복음>의 문장 전체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땅에다 씨앗을 심으면 누가 참견 안 해도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냥 자라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면 하나님 나라는 저도 모르게 제 자신 속에서 형성되어 다 무르익은 후에 발견하게 된다.”  
(2008.07.07)



기독교와 노자, 왜? / 2편


<노자>를 말하려면, 어려운 일이지만 우선 <노자>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한문 <노자>를 말하려면 한문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김명수 교수는 간단한 <노자>의 한문 문장도 정확히 읽지 못하면서 한문을 써가면서 <노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분이 한문을 잘 읽을 수 있으니 한문 못 읽는 나보다는 <노자>를 더 잘 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한문을 제대로 읽는지 아닌지는 한, 두 문장, 합쳐서 10자 정도의 한문을 해석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교수님은 <노자>를 말하기 전에 한문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더니 “나 <노자> 100번 이상 읽었고, 10번 이상 써 보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노자>를 천 번을 읽고 다 외워도 <노자>를 모를 수 있습니다. ‘독서백편의자통(讀書百篇義自通’ / 책을 백번 읽으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된다)이라는 말은 그냥 책 많이 읽으라는 권고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노자>는 영어 번역본을 읽어도 되고, 일본어 번역본을 읽어도 됩니다. 당연히 제대로 고르기만 하면 우리말 번역본도 좋습니다. 꼭 한문으로 <노자>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문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서 우리말 일상어에 한자어가 많고, 학교에서도 한자와 기초 한문을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이 많아서 <노자>의 한자가 대체로 해독이 되면 자기가 그 한문도 읽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노자>를 한문으로 읽기 위해 상당 기간 노력했던 저에게는 한문 <노자>를 읽는 실력이 보입니다. 김명수 교수의 예를 들어봅시다.

현행본 <노자> 1장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도가도비상도’에 대해  김교수는 ‘가도’와 ‘상도’를 대비하여 강의했습니다. 그리고 강의 후 토론 시간에 어느 분이 ‘상도’의 ‘상’ 자에 대해 질의 했을 때도 칠판에 ‘가도(可道)’와 ‘상도(常道)’를 대비해 써 놓고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대비하면 한문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도’를 설명할 때 격의를 말하면서 불교의 ‘무상(無常)’과 대비하여 설명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도가도비상도’에 대해 제가 전에 쓴 글 중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올립니다. 여기에 김교수의 한문 해독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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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이 구절은 현행 왕필본 <노자>에서는 책의 제일 앞인 1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1장 전체가 상당히 철학적인 것 같고, 뭐가 뭔지 모를 소리로 되어 있어서 <노자> 전체가 어렵고 심오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점은 전문가들이 자기가 이해한 대로 선명하게 해설(번역이 아님)을 하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가는 데서도 기인합니다.

한문으로 된 <노자>는 한문 사용자였던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문 \道可道, 非常道;\와 등가로 번역된 한글 번역문이 쉬울 수 있습니까? 그건 한글이 한문보다 쉽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문 <노자>가 중국 사람에게 어려우면, 한글 번역문 <노자>도 한국 사람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현행본 <노자> 1장의 시작 부분인 \道可道非常道\는 쉬운 한자 6자로 돼있고, \길 도(道)\ 자가 3자나 포함된 간단하지만 완전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 1차적 의미는 확실한 것입니다.

\道可道非常道\라는 짧지만 완전한 문장에 \길 도\ 자가 3개나 있고, 나머지 \가할 가\, \아닐 비\, \항상 상\ 자도 쉬운 한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번역이 <노자> 책마다 그렇게 다르며, 어떤 것은 완전히 틀리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에는 3개의 \도\자가 있지만 그 의미는 다 다릅니다. 특히 가운데 \도\ 자는 \길\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고, \말하다\라는 동사입니다. 이 점을 일반적인 <노자> 해설자들이 확실히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이 어렵다고 인식된 것입니다. <노자> 번역서 중에서 이 \도\ 자를 \말하다\ 또는 \말로 표현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지 않은 책은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 고전에서 \도(道)\ 자의 \말할 도\라는 훈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유가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들어있는 <시경(詩經)>과 <대학(大學)>, 그리고 도가의 해설서라고 할 수있는 <회남자(淮南子)>에서 인용합니다.


<시경/ 용풍/ 장유자>
牆有茨, 不可掃也;  장유자, 불가소야;  
中구之言, 不可道也; 중구지언, 불가도야;
所可 道也, 言之醜也. 소이도야, 언지추야.
담장의 찔레는 쓸어버릴 수 없어;
방안의 얘기는 말할 수 없어;
말이야 해도 된다지만 말하면 추한거야.

<대학>
如切如磋者, 道學也; 여절여차자, 도학야;
如琢如磨者, 自修也. 여탁여마자, 자수야.
깍은 듯 다듬은 듯하다는 것은 배움을 말하고,
쪼은 듯 간 듯 하다는 것은 스스로 닦음이다.

<회남자(淮南子) / 원도훈(原道訓)>
是故不道之道, 莽乎大哉. 시고부도지도, 망호대재.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는 아득하고 크다.  

注; 道不可道, 故曰不道之道. 도불가도, 고왈부도지도.
해설; 도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도지도\라 하는 것이다.

<장자/ 내편/ 지북유(知北遊; 앎이 북쪽으로 놀러가다)>에 \도가도비상도\에 대한 명확한 표현이 있습니다.

道不可言, 言而非也. 도불가언, 언이비야.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하면 도가 아닌 것이다.


<회남자> 주; \도불가도(道)\ = <장자> \도불가언(言)\, 즉 \도\ = \언\ = \말하다\


노자 시대로 부터 500년 이상 지난 시기의 왕필(223~249)의 주를 보면 왕필도 \도가도비상도\의 가운데 \도\ 자를 말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可道之道,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
가도지도, 지사조형, 비기상야. 고불가도, 불가명야.

말할 수 있는 도는 사건과 사물을 가리키고, 이르는 것으로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도가도, 비상도;\의 뜻(번역이 아니라)이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된 도는 나의 도(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단정 지어 말한 것입니다. 유가의 \정명(正名)\ 사상은 이름, 즉 사물에 어떤 일정한 지위(placement)를 부여하고 그 위치를 고정화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변화(change)와 자발성을 중시하는 도가는 이름, 즉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가도(可道)’의 \도\ 자를 \말할 도\라고 해석하면 \도가도, 비상도;\는 어려울 것이 없는 문장입니다. 저는 1장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의 뜻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의미; \도는 알 수는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니 뭐니 하며 떠들어 대는 것은 가짜다. 그것은 늘 그러한 노자의 도가 아니다.\  

제 번역; 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일반적 영어 번역; If tao can be spoken of, it is not the constant Tao.


\도가도, 비상도;\에서 가운데 \도\ 자가 \말하다\라는 뜻이란 것을 알았으므로 이제는 나머지 두개의 \길\이라는 의미의 \도(道)\ 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제가 앞에서 이 두개의 \도\ 자도 그 의미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의 맨 처음 \도\ 는 대체로 개인적 통찰이나 깨달음에서 얻은 어떤 x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반화해서 말하면 어떤 식으로 파악했던 간에 자기의 진리 체계의 근거로서의 어떤 x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노자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도\, 대체로 다른 학파들의 \도\를 말합니다. 어떤 x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 노자의 \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떤 x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해서 그것이 노자의 \도\와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늘 그러한 도\는 다릅니다.

원래 <노자>에서는 현행본 \도가도, 비상도;\의 \상(常)\ 자 대신 \항(恒)\ 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문제(文帝) 유항(劉恒)의 이름자가 \항(恒)\ 자이기 때문에 \항(恒)\ 자 대신 \항상 상(常)\ 자를 바꿔 쓴 것입니다. 이것을 피휘(避諱)라 하고, 이 경우는 \항\ 자나 \상\ 자나 그게 그 뜻이라 지금도 \상\ 자를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가도, 비상도;\에서 세 번째의 ‘도’ 자, 제가 \노자의 도(道)\라고 부른 바로 그 ‘도’ 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아닐 비(非)\ 자는 부정사니까 문제될 것이 없고, \항상 상(常)\ 자를 큰 의미를 두어 설명을 길게 하기도 하는데 저는 별 의미 없다고 봅니다. 그냥 ‘노자의 도’의 한 가지 특징, 즉 지속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상’ 자를 \불변의\, 또는 \영원한\ 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고, 그냥 우리말로 \늘 그러한\ 또는 \항상 된\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노자는 변화와 한계의 철학으로, 절대성, 완전성, 영원불변을 말하지 않습니다. 현행본 <노자>에 ‘상(常)’ 자 대신 ‘항(恒)’ 자가 쓰여 있다면 <노자>를 읽는 분들이 여기서 불교의 무상(無常)을 떠 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도(道)’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노자> 전체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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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김교수가 ‘도가도비상도’의 가운데 ‘도’ 자를 ‘가도’라 해서 ‘상도’와 대비해 읽은 것을 가지고 가혹하게 비판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문 <노자>를 한 번 제대로 읽으면  그렇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의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이 ‘도’자를 동사로 읽는 것이 한문 <노자>를 읽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부분 만으로 김교수의 한문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 2장에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김교수는 앞의 1장 ‘도가도비상도’ 부분과 이 부분의 설명에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참고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인용한 왕필의 주에 나오는 ‘가도지도(可道之道)’라는 구절도 강의록에 있습니다. 이 ‘가도지도’는 ‘말할 수 있는 도(개념화된 도 / 김교수의 표현)’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가도’의 ‘도’ 자도 동사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김교수의 기본 한문 읽기입니다.


<노자> 2장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이 구절은 쉬운 한문이고, 위의 번역이 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김교수는 강의 중에 ‘무위에 처해서 일하고, 말없는 행위로 교화한다’고 번역합니다. 한문을 안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없습니다. ‘무위지사’나 ‘불언지교’가 ‘군자지도’라는 말과 같이 하나의 명사구이고 ‘처’와 ‘행’이라는 동사의 목적어입니다.

‘행군자지도’라고 돼 있으면 김교수도 그런 식으로 번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자지도’라는 말이 관용적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불언지교사’나 ‘행군자지도’나 뜻은 다르지만 구조는 똑 같습니다. 한문을 읽는데 조금만 익숙해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교수 강의록에서는 “지도자는 ‘무위지사(無爲之事)하고 불언지교(不言之敎)’해야 한다.”고 제대로 띄어 읽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엉망인 것입니다.


“뭐? 그러나 저러나 뜻은 비슷 하구만!” 하는 분에게는 저도 언급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노자>를 읽더라도 누구를 가르치지는 맙시다. 기독교인도 아닌 제가 성서 좀 읽었다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맘대로 가르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200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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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래 글은 김명수 교수의 <큐복음서의 민중신학>(통나무, 2009) 158~159 페이지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글 자체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둘째로 바실레이아는 ... 저절로 자라서 스스로 그러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
셋째로 바실레이아는 인간의 노력과 애씀의 대상이다.\"

이 외에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p215, p345 주42, p347, p349 등에 <노자>, <장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저는 대체로 기독교인들의 <노자> 이해가 성서에 대한 자기 생각에 <노자>의 일부 문장을 뚜드려 맞추기라고 봅니다. (2009.06.30. 노바당)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158~159 페이지

“둘째로 바실레이아는 은유로 쓰인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로 비유된다 (Q 13:18-10/마 13:31-32). 어떤 농부가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더니 무럭무럭 ‘자라서’(auksano) 튼실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겨자씨처럼 저절로 자라서 스스로 그러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누룩의 비유(Q 13:20-21/마 13:22)에서도 동일한 동기가 서 있다. 누룩(jume)은 미미하고 적은 분량에 해당한다. 그러나 누룩이 가루 전체에 골고루 배합되면 저절로 기운이 퍼져 가루 전체를 스스로 부풀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Q의 하나님 나라 선교가 비록 지금은 한 알의 겨자씨처럼 미미하게 보이고, 누룩처럼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그러하게 자라 새들의 쉼터가 되고, 스스로 그러하게 퍼져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것이다. Q 예언자들은 한 알의 겨자씨에서 나무 전체를 보고 있으며, 작은 량의 누룩에서 부풀려진 빵 전체의 모습을 보고 있다. Q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는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파종과 추수가 하나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셋째로 바실레이아는 인간의 노력과 애씀의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이해된다. 인간의 노력이 멈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나 Q는 이와 다르게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와 결부시켜 이해하였다. 너희는 먼저 바실레이아를 ‘구하라’(zeteite)라고 한다(Q 12:31/마 6:33).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겠다는 인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바실레이아는 애쓰는(biastai) 사람이 차지한다고 한다(Q 16:16b/마 11:12b). 본문은 젤롯당의 적극적인 야훼 주권회복 운동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서 Q는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애씀과 노력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 나라는 침노를 당하고 있고, 먼저 차지하는 자가 그곳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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