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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1)-아첨과 절대군주
이병창 2019.10.09 30
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1)-아첨과 절대군주

1)

앞에서 국가권력과 고귀한 의식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국가권력은 모든 사람의 삶의 일반적 토대 즉 법입니다. 고귀한 의식은 이런 일반적 토대를 위해 봉사하죠. 즉 ‘일반적 선을 위한 충고’입니다. 국가권력은 그 덕분에 효력을 가진 법이 되죠. 아직 스스로 의지를 지닌 왕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고귀한 의식은 이를 위해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면서 순수한 자아가 됩니다. 고귀한 의식은 자신의 명예심을 버리지는 않고 그 결과 국가를 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죠. 진정한 희생은 죽음도 무릅쓴 것이지만 고귀한 의식은 이에 이르지 못합니다. 헤겔은 이런 신하를 거만한 신하라고 합니다.

이제 고귀한 의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첨에 나서게 됩니다. 276쪽 5줄부터 278쪽 25줄에 이르기까지 약 세 쪽에 걸쳐 헤겔은 아첨의 문제를 다룹니다. 결론인즉 이런 아첨을 통해 소위 절대 군주가 출현했다는 주장입니다.

2)

헤겔은 이런 아첨의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언어의 개념을 정리합니다. 아첨은 언어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언어와 구별되는 점이 있죠.

“그러나 여기서 언어는 언어라는 형식 자체를 그 내용으로 삼으며, 그래서 언어로서 효력을 가지게 된다. 언어의 힘은 수행되어야 하는 것을 수행하는 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 즉 순수한 자아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순수한 자아를 내포한다. 언어만이 자아를 즉 자아 자체를 표현한다. 그 현존은 현존으로서 자기의 본성을 자기 표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자아는 이 자아로서 동시에 일반적인 자아이다.”

“그 현상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소외이며, 이 개별적 자아의 소멸이고 따라서 보편성 속에 이 자아를 머무르게 한다. 자아는 자기를 표현하자 즉각적으로 이해된다.”

이상과 같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헤겔이 언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이제 언어라는 형식이 의미를 지니는 단계가 출현했다.

② 언어는 자아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자아를 사물 속에 표현하는 산물과 구별된다.

③ 언어는 개별 자아의 표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곧바로 이해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3)

헤겔이 이야기하려는 핵심은 ①에 있습니다. 언어라는 형식이 내용이 되는 언어라니? 아직 여기서는 설명되지 않으나, 이것은 헤겔이 ‘아첨’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죠. 아첨이야말로 언어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듣는 군주에게는 어떤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②, ③이 지니는 의미는 아래와 같은 구절과 비교해 읽으면 쉽게 이해됩니다.

“모든 다른 표현[예를 들어 행위나 표정]에서는 자아는 현실과 그 형태 속에 침잠한다.”

자아와 자아의 다른 표현(예를 들어 행위) 사이에는 물질이라는 벽이 있지만 언어적 물질은 거의 무적인 것이므로 자아와 언어 사이는 그런 물질을 통한 괴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②, ③에서 보듯 언어는 직접적인 표현이며, 누구나 이해하는 일반적 표현입니다.

헤겔이 이런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첨과 같은 언어가 행위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의 말은 잘 안 믿는다는 데, 사실 살아보면 남의 말처럼 쉽게 믿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진심과 거짓을 행위는 쉽게 구분되는데 말은 이상하게 구분되기 어렵습니다. 헤겔이 이 점을 잘 통찰한다고 봅니다.

4)

이제 언어 즉 아첨이 국가권력과 고귀한 의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헤겔은 아첨이라는 언어가 두 극단을 매개하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언어는 양 측면으로부터 실제로 구분된 대상성을 갖는다. 따라서 양 측면을 마주 보면서 현존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헤겔은 언어를 ‘정신적 실체의 현존’이니, ‘직접적으로 타당한 현실성’이니 ‘매개의 외화’이니 하면서 언어의 독자적인 현존성을 강조합니다.

원래 대립물의 내적인 상호 통일은 그것을 통해 대립물은 더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통일된 것의 두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매개가 외적인 경우 매개가 두 대립물과 독립적으로 되면서, 두 대립물 역시 각기 자립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언어를 통한 매개가 불완전한 매개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헤겔은 위와 같이 통일의 두 방식을 구분합니다. 이런 불완전한 매개에는 두 측면이 있죠. 한편으로는 매개를 통해 두 극단이 통일되는데 이 경우 두 극단은 정신의 계기가 되죠, 다른 한편으로 이런 통일은 소외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경우 매개물이 독자적 현존을 갖게 됩니다.

“전자를 통해[내적 통일의 측면] 두 계기는 직접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는 범주[계기화]가 된다. .... 후자를 통해[외적인 매개의 측면] 정신은 정신성으로서 현존한다.”

“매개는 두 극단을 전제로 하며[외적 매개].... 그러나 마찬가지로 ... 정신적 전체는 양 극단으로 스스로 분화한다[내적 통일].”

5)

언어 즉 아첨을 통해 두 극단의 통일이 이처럼 내적인 통일의 측면과 외적인 매개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두 극단에 해당되는 국가권력과 고귀한 의식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서로가 가진 규정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환 과정은 단계적으로 일어납니다. 우선 각각에서 상대의 규정이 반영된 결과 각각이 이중화됩니다.

“국가권력은 추상적인 일반자와 ... 대자 존재적인 의지로 해체되며, 고귀한 의식은 자기 존경의 즉자 존재로, 영예와 .... 아직 지양되지 않은 순수한 대자 존재로 해체된다.”

이런 이중화에서 첫 번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자아는 명예를 추구하는 순수 자아로 됩니다. 순수 자아의 일반성은 국가권력의 일반성[일반적 선]과 일치하죠. 이런 전환은 실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통일이라고 봅니다. 즉 말로만 국가 즉 일반적 선을 위해 봉사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귀한 의식에서는 여전히 개별적 자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반적 선을 지향하는 국가는 개별적 자아를 억압하는 고유한 의지가 생겨납니다. 국가는 의지 즉 결정하는 의지를 가집니다. 이것은 고귀한 의식이 지닌 개별적 의지가 국가에 반향하여 일어난 통일입니다.

“봉사의 언어적 반성은 정신적으로 자기 분열적인 중심을 이룬다. 이 반성은 자신의 측면을 자기 내로 반성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 권력의 극단 역시 이런 개별적 자아로 되돌아가도록 반성한다.”

6)

국가가 이렇게 개별적 자아로 등장하자, 신하의 개별적 자아는 이에 대해 아첨의 방식을 대응하게 됩니다.

“침묵 속의 봉사의 영웅주의가 아첨의 영웅주의로 된다.”

그 결과 국가에서 발생한 자아는 아첨을 통해 유지됩니다. 헤겔은 근대의 절대 군주가 바로 이런 아첨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권력이라 합니다.

“이를 통해 권력의 정신 즉 무제한적인 군주라는 정신이 출현한다. 무제한적인 이유는 아첨의 언어가 권력을 순전한 일반성으로 고양하기 때문이다. .. 군주인 이유는 언어가 개별성을 정상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절대군주는 아첨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이름뿐인 절대군주에 불과하다.

“이런 이름을 통해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로부터 구분되는 것이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름을 통해 개별 자는 더 이상 그 자신의 의식에서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순수한 개별자로 여겨진다.”

“아첨은 동시에 고귀한 의식을 단순히 국가의 봉사자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관을 둘러싼 장식품으로 전락시킨다. 고귀한 의식은 왕좌에 앉은 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에게 항상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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