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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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람들
이순웅 2009.11.25 1438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  
[철학으로 세상읽기]

2009년 11월 25일 (수) 11:13:17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webmaster@mediaus.co.kr  


1762년 장-자끄 루소는 『사회계약론』1편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우리가 정치 철학을 논의할 때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주제이다. 루소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문명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문명화 속에서 ‘규칙’ 또는 ‘법’이라는 총구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다. 규칙이라는 총구를 바라보는 인간의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규칙 내지는 법이라는 총구에 함축된 의미는 즉각적인 폭력의 위협, 심지어 목숨까지도 포함하는 그러한 위협에 다름 아니다.  

최근 벌이지고 있는 법의 판결은 바로 루소가 주장하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예일 것이다. 이를 테면 일제고사 거부 체험학습 참가 교사를 해임하는 것, 지난 18일 경찰이 2차 교사 시국선언과 관련, 소환 대상자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간부 27명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실시하는 것, 검찰이 전교조 간부 86명 전원에 대해 국가공무원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불구속 혹은 약식 기소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이전, 10월 28일 용산 참사 재판에서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하는 것, 나아가 19일 행정안전부는 지난 9월 21일 전공노·민공노·법원노조 등 3개 공무원노조의 통합과 민주노총 가입 투표 과정에서 복무규정을 위반한 공무원 29명을 징계하도록 소속 기관장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행정안전부는 지난 8일 열린 통합공무원노조 간부결의대회에서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주도한 1명을 중징계할 것을 전라북도에 요청하고 이를 묵인하는 기관에 대해서 행정적·재정적 제재를 한다는 방침이다.
    
주권자의 결핍된 정치  

이렇듯 자신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행위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법의 폭력 속에서 규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 현실의 법과 권력 속에서 인민이 주권자로서의 결핍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문제는 더 이상 형이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민이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 속의 삶의 원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충만한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존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을 한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활동에는 정치적 욕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이유는 왜곡되고 정당하지 못한 정치권력에 의해 탈취된 주권자로서의 욕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권자로서의 정치적 욕망은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자 정당한 권력의 주체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욕망을 통해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으려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결여된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켜 나아가는 지난한 노정에 있는 것이다.

루소는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있다.”라고 했다. 이 구절 다음에 루소는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보다 더한 쇠사슬에 묶인 노예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루소는 인민의 정치적 표현을 가로막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권력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적 공화제에서는 내용보다는 ‘형식’이라는 규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민이 정치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소외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민주적 공화제에서는 인민의 권력이 형식을 통제하고 내용적으로도 자신들의 권력을 관철시킬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민주적 공화제를 통해서만 인민이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이들이 쇠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실질적인 민주적 공화제를 통해서만 열리는 것이다.

권력의 대행 기구로 전락한 법으로, 그리고 그러한 법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 사회의 주인 행세를 하려는 이들은 법적 실증주의에 입각한 사람들이다. 즉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가 법에 의해 생겨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법이라는 또 하나의 형식 아래 종속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법률이 정당하다고 부르는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홉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홉스의 주장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로 사용하려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홉스 또한 자아의 열정적인 부분을 ‘생존’이라고 부르며, 생존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적 권리’라고 한다는 점이다. 홉스에게 자연권은 오직 자신의 ‘생존’이다. 이것이 유일한 자연적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정의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보존’이다. 이것이 그에게도 유일한 가치의 실현인 것이다.  
  
일반화된 억압적 권력의 법

문제는 인민의 권력을 위정자의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로 귀속시켜 고착화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은 모든 권력이 인민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으로 둔갑시키고자 한다. 자신의 권력이 정당하다는 신화를 만들어낼수록 자신들의 권력과 인민의 권력의 간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그러한 권력은 사회 억압적 권력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인민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은 부단히 운동하며 억압된 것들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정되고 응고된 채 굳어버릴 뿐이다. 굳어버린 권력은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즉 법의 이름으로 행위에 대한 폭력성이 일반화되고 현실화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적 권력인 법이 지금 우리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모든 행위를 감시 통제하며 훈육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라캉의 시각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이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 자기 충족, 즉 존재의 결핍을 채우는 근원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통해 위협적인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는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차단이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법이 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은 아이와 아버지의 차원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다. 즉 아이의 행위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인민들의 정치적 욕망을 억압하는 일반화된 사회 억압적 권력의 상징으로 법이 대체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벌어지는 법의 판결이다. 이는 욕망의 문제를 가족이라는 틀에 국한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욕망을 문제를 넘어서 사회 권력으로 일반화시켜서 법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력을 위하여

현실 속에서 억압된 권력으로 상징되는 법은 인민에게 주권자로서의 욕망 그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제 현실에서의 법적 판결은 주권자로서 정치적 운동의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법적 판결은 모두 정당하니 법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정당성에 어긋나는 사람은 모두 처벌하겠다.’는 공포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주권자로서의 인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용산 참사와 전교조, 공무원 노조에 가한 현실적 법 판결이다. 후퇴한 정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욱더 힘든 겨울이 벌써 돌아왔다. 왜곡되고 정당성을 상실한 채, 인민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 그 권력으로 법의 판결이 행해지는 현실 속에서 이번 겨울은 더 혹독할지도 모른다. 이 겨울에 우리가 좀 더 온기를 품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이 실질적 권력의 주체임을 현실적으로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조용히 손을 잡는 일일 것이다.

루소의 말을 적으며 하고픈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의지가 미래의 일에 대해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의지를 움직이는 본인이 자신의 이익에 어긋나는 일을 승낙한다는 것은 의지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민이 복종하는 것을 간단히 약속한다면 이 행위에 의해 주권자로서의 인민은 사라지고 인민으로서의 자격을 잃는다. 지배자가 생겨난 순간 이미 주권자는 없다. 그리하여 곧 정치체제는 파괴된다.” 인민의 권력을 쟁취하는 그 날까지 모든 이들이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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