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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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중국의 충격\과 인문학의 대응
이순웅 2009.11.21 1235
‘중국의 충격’에 인문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철학으로 세상읽기]

2009년 11월 20일 (금) 11:11:15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연구교수  webmaster@mediaus.co.kr  

일본의 원로 중국 연구자 미조구치 유우조(溝口雄三)는 ‘중국의 충격’이란 말로 현재의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 상황을 문제화한다. 그는 일본인의 ‘탈아시아’ 인식과 현실적인 ‘아시아’ 즉 일본인이 아시아에 의해 리드당하기 시작했다는 상황 사이의 미묘한 갭,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러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인식상의 이중의 갭을 ‘중국의 충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환중국권’(環中國圈)의 형성을 내세운다. 중국의 농촌문제와 일본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상호 연동되어 있는 현상 등은 현재 동아시아가 ‘환중국권’이라는 경제관계 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증거이며 주변 국가들을 다시 주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가설적인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분석을 중국위협론의 시각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조구치는 중국을 중국의 논리로, 중국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데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일본 지성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러니 분명 배타적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중국위협론과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과 관련하여 한국인/동아시아인으로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특히 중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 인식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궁금한 것은 21세기를 맞아 동아시아 패권질서가 다시 바뀌는 상황에서 중국에는 왜 ‘이렇다할만한’ 동아시아론 내지 아시아론이 없을까 하는 점이다. 중화제국이 무너졌던 100년 전에는 경황이 없어 그랬다 치더라도 대국으로 굴기하고 있는 지금 - 일본과 비교하여 - 중국에는 왜 동아시아론 또는 아시아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걸까.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 최고의 화제가 되었던 책 『불쾌한 중국』(宋曉軍 ․ 王小東 ․ 黃紀蘇 ․ 宋强 ․ 柳仰,  『中國不高興』-大時代,大目標及我們的內憂外患, 江蘇人民出版社, 2009년 3월. 이 책은 기존에는 좌파 계열로 분류되었던 유명 지식인 5명의 공동저작이다. 며칠 사이에 급하게 기획하여 제작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보면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에서 대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1997년의 『NO라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 한국어 번역본, 동방미디어, 1997)의 후속판 격으로 대중적 강성 민족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이 책 또한 제목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미국이다. 중국의 지식계의 관심은 오직 미국인 것 같다. 최근 동아시아 사이에 학적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들의 눈은 오직 미국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부국강병을 실현해가는 정도가 강해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전 사회주의 시절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봉쇄당했을 때의 제3세계나 아시아와 가졌던 연계성을 떠올려봤을 때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불쾌한 중국』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나 전체적으로 『NO라 말할 수 있는 중국』에 대해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만큼의 비판적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10여 년 사이 그만큼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특히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한층 업그레이드된 중국인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쾌한 중국』출판에 대해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싣는 중국의 언론인 훙칭보의 논평이 특이하다. 그는 침묵했던 인문학적 지식인들이 사회로 복귀했음을 의미하고 사람들은 이제 국가와 인민을 걱정하는 지식인을 보게 되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중국의 전통적인 지식인들의 모습이라고 평가한다(한겨레신문, 2009년 5월 30일자). 여기서 역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국가는 곧 인민이고 그렇기 때문에 公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의미의 공에 대해서는 그간 인문지식인들이 오불관언해왔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언론인은 이 책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닐까.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실패 이후 보수화된 중국 정치문화 분위기를 배경으로 인문학적 지식인들의 담론 생산은 80년대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사회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권위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주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양의 충격’ 이후 쭉 급진과 보수의 대결이 존재했고 1949년의 신중국 건설은 급진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제 개혁개방 이후 90년대로 오면서 보수가 주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보수가 주류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든 역사에서 영원히 주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급진이든 보수든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려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주류였던 급진의 역사가 인간의  보편적 심성을 무시하고 극단으로 치우쳤던 경험 즉 문화대혁명과 같은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현재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작동하고 있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반드시 거쳐야 되는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러 과정을 거쳐 자기 역사를 성찰하는 이른바 정반합의 관점을 취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 대다수 인문학자들의 글 면면을 보면 ‘서양의 충격’ 이후 장장 150년을 에둘러 역시 ‘중국의 길’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느낌이다. 단지 집권세력이 청왕조에서 공산당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이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것은 내가 좀 과장을 한 것이긴 하지만 중국 인문학자들의 최근의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 인식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21세기의 동아시아 질서를 천하주의(天下主義) 또는 조공체제(朝貢體制)를 환기하면서 재구성하려 한다든지 ‘동서’의 문제의식이 다시 ‘중서’로 회귀하고 있는 사실은 그 예가 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표현이  ‘중서’ 즉 ‘중국과 서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표현은 중국이 ‘서양의 충격’이  있었을  당시 동서 구도를 중서로 파악했던 150년 전 19세기식 표현법으로의 회귀이다. ‘중서’로 동서를 인식하는 것은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를 아시아(동아시아) 속의 중국이 아니라 중국 속의 아시아(동아시아)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중국의 적지 않은 인문학자들의 심중에는 21세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19세기적 제국의 기억이 배면에 깔려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중국은 국민국가이긴 하지만 제국적 국민국가이다. 영토의 판도나 민족구성에서 이전 청조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존재조건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 또한 바뀌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히도’ 21세기이며 아시아인은 20세기의 ‘근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중국 자체로 볼 때도 100년의 중국 근대의 역사가 삭제된 19세기적 21세기가 재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되었든 최근 중국의 동향은 세계의 주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향후 몇십 년 내에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호령할 양대 제국으로서 또는 미국을 대신할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예측(?)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특히 인접한 대국으로서 역사적으로 인연이 ‘각별’했었다 치더라도 앞으로 대등한 관계 맺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고 유지해야 할까.

이는 한국/동아시아의 인문학자로서 여기서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앞의 미조구치의  말투를 빌리면 아시아와 한국을 매개로 중국이 자신과 세계를 대상화시켜볼 수 있는 사고회로(思考回路)를 어떻게 심어줄 수 있는가. 쉽지 않은 문제다. 심입한 고민이 필요하다. 중화제국 해체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숭중’(崇中)과 ‘혐중’(嫌中)을 오갔어도 한번도 중국의 인식 방법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나를 포함한 한국의 인문학자들, 이는 곧 자기에 대한 아이덴티티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고민이 없었다는 것은 그 배면에 사회주의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중국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중국의 충격’은 아직 먼 날의 울림으로만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충격, 그것을 받고 나서야 자각하게 된다면 이미 상호 관계 맺기에서 정상적인 길을 찾기에는 때 늦은 것이다. 중국을 연구의 엄밀한 대상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 문제로서의 중국관심도 이래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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