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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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합의
류종렬 2004.04.05 3829

공동체의 합의

* 이웃 집안 안에서 가족들이 떠들썩하게 말다툼하는 곳에 끼어 드는 이웃 사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동네의 골목길에서 서로 마주하는 두 이웃 사람들이 말싸움을 하는 경우에 동네 사람들은 그냥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관여도하고 해결을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 그런데 두 이웃이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는 경우에 관여자는 두 이야기를 잘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편은 자신의 현재의 이익을 다른 한편을 과거의 이익의 유지를 위한 주장으로 서로 엇갈려 있을 경우에, 이 개입자는 두 당사자와 달리 미래의 이익을 위해 제안할 수도 있다. 이 제안이 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합당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자는 중재자를 한편으로 생각하고 수용하고, 후자는 이 참견자가 상대의 편을 든다고 거부한다.

중재자 또는 관여자는 어느 편을 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전체에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로 두 사람에게 합의를 제안한 것이다. 이 중재자는 다른 또 하나의 견해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제3의 견해일 수 있다. 이때 제삼자는 전자의 편도 후자의 편도 아니다.

이제 두 당사자간의 논쟁을 넘어서 세 가지 제안에 대한 견해를 공동체의 모든 성인에게 제안하기로 한다고 해보자. 제1자와 제2자의 견해보다 제3자의 견해가 더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마실 공동체의 합의로 제3의 견해를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 문제는 이런 논리가 제1안 제2안 제3안을 넘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다른 안들이 새로이 생겨날 수도 있다. 대부분은 이런 여러 안들이 생겨나는 것을 동네의 분열, 혼란, 불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각각이 처한 입장에서 자기의 견해를 말할 권리도 있고 또한 들어보아야 할 의무도 있다. 그런 상황의 경우에 다양한 여러 견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이것을 분열도 혼란도 아니고 과정의 사실이다. 그리고 견해의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민주적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이 민주적 절차들 통하여 공동체 사람들이 각각의 견해에 대해 충분한 논의하여 서로서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높이는 공동의 장을 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공동의 장을 넓게 확장하는 것은 상대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또한 다른 공동체, 즉 가까운 편에 있거나 상대적으로 먼 편에 속하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민주적 절차에서 여러 견해의 창출에서 우리라는 좁은 측면보다 인민이라는 넓은 측면을 수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여러 견해를 수렵하는 과정에서 동민이 주인이듯이, 민족과 국가에서도 인민이 주인이 된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만큼, 즉 비례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에 대해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인간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사람들이 멀거나 가까운 이웃의 영향과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인간이며, 이 때의 인간은 이성적이다. 이성적 인간은, 크게 보아 살아보지 않았던 공동체의 인민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고, 그들도 인간인 한에서 인류가 공동으로 택해야 할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합의점의 도출에서는 가깝고 먼 상대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요즈음 몇몇 신문들이나 언론 매체가 마치 인류가 사는 이 삶의 터전을 전투의 터전으로 만들면서, 상대를 이기기 위하여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상대 약점을 뻥티기기 하면서 까지 전투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고 \피, 죽음\ 등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상대가 약할 때는 그대로 무참히 짓밟아서라고 이겨야 한다는 동물의 왕국의 정글의 법칙을 강요한다. 이 언론들의 강요는 인성을 피폐하게 하고, 자본의 약육강식의 논리에 빠진 분열증을 가속화하며,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그 남겨진 찌거기라도 뜯어먹으러 덤비는 하이에나의 습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은 여러 정보를 취합하여 스스로 합의점을 찾을 정도로 현명하며, 그 하이에나의 선동에 말리지 않을 정도로 이성적이다.

인민이 정의롭다는 것은 다양한 견해를 분열과 불화라고 하지도 않고, 자신의 동네의 이익에도 머물지도 않고, 게다가 다른 동네의 이야기도, 공동체 전반적 관계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도 수렴하여 합의를 찾을 줄 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에도 연관이 있음을 아는 것은 인민은 강자도 하이에나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는 인민의 합의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ms37OKE) [마실에서 천하루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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