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생명의 두 가지 내/외 법칙
앞에서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는 가운데, ‘자체적인 존재’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성은 감각, 지각을 넘어서 오성의 방식을 되풀이 하는 데 여기서 법칙적인 것을 발견하려 하죠. 오성은 법칙의 능력이니까요.
관찰하는 이성은 오성의 단계에 이르러, 비유기체를 넘어 유기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여전히 이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려 하죠. 그런 가운데 환경 결정론과 외적 목적론을 넘어서, 내면과 외면 사이의 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헤겔은 이어서, 상당히 장황하게 이런 생물학에서 전개된 ‘내면과 외면의 법칙’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관찰하는 이성의 나머지 부분(150-165) 전체에 걸쳐서 이 법칙을 비판하죠. ??정신현상학??이 인간정신의 전체 역사를 따라가는 방대한 역사서인데, 그 가운데 이렇게 많은 부분을 헤겔이 한 군데 생물학, 그것도 내면과 외면의 법칙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헤겔이 생물학의 이런 법칙에 대해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긴 내면과 외면의 법칙은, 오늘날에서 상당히 중요한 법칙으로 간주됩니다. 요즈음도 사람들은 사람의 심리를 읽기 위해서 노력하죠. 그 가운데 사람의 외면적인 형체, 특히 두개골의 형체(얼굴의 인상)에 이런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해서, 갖가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책들이 주로 두뇌와 관련된 것이라면, 당시에는 생물체의 생명 개념과 관련하여 많은 책들이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떻든 헤겔이 이런 내면과 외면의 관계의 법칙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죠. 우선 헤겔은 개념적으로 정리를 합니다. 내면이란 ‘유기체적 실체’를 의미합니다. 유기체 전체를 통일시키면서 자신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 즉 유기체의 ‘단순한 영혼’을 말하죠. 헤겔은 이런 내면성을 감각, 자극반응, 재생산이라는 세 가지 유기체적 성질을 들고 있습니다. 헤겔은 이 세 가지 성질은 동일한 유기체성(‘자기내 반성’의 능력)이라는 것의 세 가지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이죠.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개념의 세 가지 계기’라고 말합니다. 감각이 ‘일반적인 유동성(감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각하는 물질은 무한히 작아야 하며 무한히 유동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을 의미한다면, 자극반응(Irritabilitaet; 자극적이라는 의미이지만 오히려 문맥적인 의미로는 반응을 의미한다)은 ‘유기체적 신축성(충격을 가하면 거기에 신축적으로 반응한다는 의미에서)’이고, 재생능력은 ‘목적 자체로서 또는 종으로서 활동(자기보존, 또는 종의 재생산)’을 의미합니다.
이런 내면에 대응하는 외면은 이 각각의 유기체적 성질에 대응하는 신체적 조직입니다. 감각은 ‘신경체계’로, 자극반응은 ‘근육체계’로, 재생은 ‘자기보존조직’으로 표현되죠.
여기서 헤겔은 내면과 외면의 법칙은 두 가지 차원으로 전개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차원은 ?하나의 유기체성이 다른 유기체성과 관련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하나의 유기체성이 내면이라면 다른 유기체성은 그것의 외적인 표현이 되죠. ?다른 하나는 이런 유기체성이라는 성질의 차원과 이것의 표현으로서 신체적인 체계, 또는 조직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입니다. 헤겔은 사람들은 이런 두 차원의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발견하려 하지만 이 법칙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관찰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그런 법칙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기체에 관련된 법칙에서 상관되는 두 측면이 사실 잘 관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두 측면의 관계를 보여주는 법칙은 관찰될 수 없다. 관찰이 이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관찰이 관찰인 한 근시안적인 것Kurzsichtig에 그치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관찰이 경험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이념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법칙이 어떤 실재적인 것이라면 사실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관찰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관찰이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법칙들에 대한 사상은 어떤 진리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기 때문이다.”151쪽
2)공허한 동어반복의 법칙
이렇게 말한 다음 헤겔은 내면과 외면의 법칙이 존재하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예를 들어 ‘감각’을 보죠. ? 감각은 사실 다른 유기체성과, 예를 들어 자극반응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각이 고립된 성질이 아니라, 전체 생명 활동의 한 계기 즉 ‘개념의 계기’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죠. 헤겔은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민감할수록 반응도 민감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 감각은 ? ‘일반적인 유동성’이므로 신경체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기체의 다른 체계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죠. 예를 들어 내장에도 기초적인 감각(통증, 압박감 등)이 있다고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하는 이성은 생명의 성질들을 개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찰되는 지각적 성질로 다룹니다. 그 결과 다양한 이상야릇한 관찰법칙이 출현하게 되죠. 헤겔은 이런 일반적인 비판을 다시 더 세분하여 논의해 나갑니다. 그는 우선 ?의 측면에서 비판을 전개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드러내는 개념의 계기들은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기들을 관찰되는 지각적인 성질로서 간주합니다. 이렇게 지각적 성질로 간주하는 것이 이미 이를 외면화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성질들 사이에 외면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되고 그 결과 감각과 자극반응 사이의 연관이라는 법칙이 성립합니다. 이런 법칙은 무슨 새로운 법칙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헤겔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개념상 ‘감각’은 ‘자극반응’은 +/-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는 다시 양적인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감각은 자극반응에 대해 크기에 있어서 역비례 한다.”는 법칙이 등장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런 법칙을 달리 표현한다면 “감각의 크기가 증가하면 감각의 작음(곧 자극반응의 크기)은 감소한다.”는 법칙으로 변형됩니다. 이런 법칙은 다시 정비례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각의 크기가 증가하는 것은 감각의 작음이 작아지는 것과 비례한다.”는 법칙이 되죠. 이렇게 바꾸어놓으면 이런 법칙이 실상 동어반복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요. 그래서 헤겔은 비유를 들면서 이런 법칙은 마치 “구멍이 커지면, 그 구멍에 의해 덜어내지는 것도 커진다.”는 법칙과 같다고 말합니다. ‘구멍’과 ‘덜어내어지는 것’은 비록 질적으로는 대립되지만 사실 동일한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죠.
이런 관계는 마치 자기의 북극과 남극, +전기와 -전기, 알칼리와 산의 관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실재적인 내포는 외연과 단적으로 같은 크기이므로”, “양 극단이 내포와 외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즉 한쪽의 내포가 증가하고 외연이 감소하면 다른 쪽의 내포는 감소하고, 외연은 증가한다는 관계[예를 들어 생물의 유와 종의 관계처럼]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대립’이라는 앞에서 말한 개념에 속한다.”(153쪽)고 헤겔은 말합니다.
헤겔은 관찰하는 이성이 발견하는 이런 식의 법칙은 “입법의 공허한 유희”이며, 만일 그런 식이라면 “어디서나 무엇을 가지고서든 법칙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 이는 대립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153쪽)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법칙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감각과 자극반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감각, 재생산과 자극반응을 비교해본다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겠죠. 왜냐하면 도대체 감각이나 자극반응 없는 재생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 경우 아무런 대립이 없으니, 그 사이에 굳이 법칙을 만들어 볼 동기조차 없어져 버리고 말 겁니다.
이 모든 황당한 법칙발견이란 결국 개념의 계기라는 차원에서 이런 성질들을 보지 않고, 눈앞에 나타나는 지각적 성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성질들을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sein’이라든가 ‘현존하는 것’으로 보는데 기인하는 것이죠. 반면 이런 성질들을 개념의 필연적인 계기들로 본다면, 이런 성질이 감각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의 “외면성이란 ‘온전한 의미에서의 외면적인 것’Ausseres im Ganzen, 또는 ‘조직적인 형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면의 특이한 직접적인 외면성die eigne unmittelbare Aesserlichkeit이” 됩니다.
그런데 이를 개념의 계기로 보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지각적 성질gemeine Eigenschaft’로 보고, 이를 무게라든가 색깔이라든가 강도 등과 같은 서로 무차별한 성질로 만들면, 심지어 법칙성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감각이나 자극반응은 각각의 유기체마다 서로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말이 귀리에 대해 건초에 대해서와 다르게 반응하고, 개가 귀리나 건초에 대해 말고 다르게 반응하니 여기에 어떤 법칙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죠. 원래 지각적 성질이란 서로 ‘무차별하다’는 것이 특징이니, 이런 법칙성은 본래부터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언감생심;焉敢生心) 것입니다. 헤겔은 이런 무차별한 성질들 사이에서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 ‘개념을 벗어난 자연의 자유’를 서술하는 것”과 같고, “부조리하게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연히 선택한 잣대에 맞추어 서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3)신체의 조직
이처럼 헤겔은 ?의 차원에서 법칙을 발견하려는 이성을 비판한 다음, 이어서 ?의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이 차원에서는 내면의 성질과 외적인 신체적 형태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적 관계가 문제가 되죠. 유기체의 개념이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우리의 신체가 그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해보면, 너무나 다양한 체계가 내재하고 있으니, 이렇게 세 가지 성질에 대응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신체를 해부학적으로 나누어 볼 때 그런 체계들은 죽은 신체에 속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신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유기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형체라는 상이한 부분들을 관통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속에서 부분들은 다만 ‘이행하는 계기fleissendes Moment’로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헤겔도 이렇게 말하죠.
“그런 형태라는 체계들이란 유기체가 죽은 현존의 추상적인 측면에 따라 파악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파악된 이 계기들은 해부학이나 시체에 속한 것이지, 인식이나 살아 있는 유기체에 속한 것은 아니다.”155쪽
그러므로 마치 앞에서 유기체의 성질들이 각기 고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되듯이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체계들도 고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유기체 전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이므로, 어떤 고정된 사물과 같은 것은 아니며(an einem isolierten Ding ein Bild des Allgemenine zu geben) 자신의 계기를 ‘관통하는 과정durchlaufende Processe’으로서 갖는 것입니다.
결국 내면이 외적인 형체 속에 표현된다는 두 번째 유기체의 법칙?조차 무너지고 맙니다. 도대체 법칙이란 것은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의 외적인 관계이죠. 그러나 유기체란 내적인 통일성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기체를 내적 성질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로 내적인 연관을 지니고, 또한 외적인 형체들의 관계도 내적인 연관을 지니는 것이니, 그 어디에도 외적인 법칙을 적용할 수 없고 나아가서 내적 성질과 외적인 형체 사이에서도 법칙적인 관계도 성립하지 않게 되죠. 만일 있다면 유기체의 내적인 통일성은 유기체의 전체적인 체계 속에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기체의 모든 측면은 그 자체에서 단순한 보편성[내적인 통일성]이니, 그 속에서 모든 규정들은 해소되며 해소의 운동이다”156쪽
헤겔의 이런 주장은 마치 오늘날 두뇌를 그 기능별로 분석하는 것과 두뇌를 조직으로 분석하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연상시킵니다. 두뇌의 기능을 흔히 청각적 시각적 언어적 기능으로 분해하고 이런 기능마다 그것이 수행되는 고유한 두뇌 조직 예를 들어 좌뇌 피질, 우뇌 피질, 전두엽, 측두엽 등의 조직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꼭 이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헤겔 말대로 한다면 기능을 분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며, 조직을 분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더구나 그 기능을 조직과 연결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죠. 왜냐하면 두뇌의 기능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또한 두뇌의 조직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까요. 과거 생물, 유기체에게서 벌어졌던 논쟁이 오늘날 두뇌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