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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정신장 주석 11- 안티고네와 클레온의 단순성
이병창 2019.08.12 27
정신현상학 정신장 주석 11- 안티고네와 클레온의 단순성

1)
앞의 a에서 헤겔은 국가[민족]와 가족{씨족/부족] 공동체 사이의 대립을 일반적으로 그렸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이 한쪽이 다른 쪽을 과도하게 침해하면서 그것을 처벌해, 본래의 균형 즉 정의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회복을 통해 양자는 아름다운 균형 상태에 이르게 되죠.

이런 불법과 처벌 그리고 정의의 회복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 정신 내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헤겔은 주장합니다. 그리스 정신의 정의는 이런 끝없는 유동성 속에서만 자기를 유지할 뿐이죠.

이런 불법, 침해와 처벌, 정의의 회복이 일어나는 구체적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제 A절 b항에서 전개됩니다. 이때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인륜적 본질을 실행하는 자아의 성격입니다. 국가라는 본질은 시민이 실행하고, 가족의 본질은 가족 성원이 실행합니다. 헤겔은 이런 자아를 남녀의 자연적 성에 따라 할당합니다. 시민를 대변하는 자는 남자이고 가족성원을 대변하는 자는 여자이죠.

2)
b항에 들어가면서 헤겔은 이런 인륜적 본질을 실행하는 자아의 성격을 분석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빠를 묻어주게 됩니다. 안티고네의 이런 성격을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칸트적 법칙주의와 비교하면서, 이 바탕에는 대타자의 욕망이 깔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대타자적 욕망은 안티고네에서는 히스테리적 마비나 강박증적 지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신증적 현상에서 나타나듯 질서, 법에 대한 파괴를 동반하지도 않죠. 안티고네에서는 이 대타적 욕망이 상징계 내부의 특정한 대상을 향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즉 욕망의 대상이 단일 부동하게 되는 것이죠. 라캉은 이런 안티고네적 현상이 현실 속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이상적 방식이라고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하죠. 그는 ‘안티고네처럼 욕망에 충실하라’라는 테제를 제시합니다.

헤겔은 다른 관점에서 안티고네의 이런 성격에 주목합니다. 헤겔은 이런 단호함은 비단 안티고네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안티고네의 반대편인 크레온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안티고네가 여동생의 만류에도 흔들리지 않듯이 크레온 역시 왕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를 처벌하는 데 흔들리지 않죠.

안티고네, 그리고 크레온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단호함을 헤겔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죠. 우선 헤겔은 클레온과 안티고네 즉 국가와 가족을 실현하는 자아가 아직 독립적인 개인[‘개별적 개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국가에서 시민[남자]이든 가족에서 성원[여자]이든 ‘비현실적인 그림자’로서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반적 의지를 실행하는 대행자에 불과하죠. 이것은 시민이 국가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상태나, 가족 성원이 자신을 가족의 혼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클레온이나 안티고네를 모두 이런 개인적 주체로 보지 않고 일반적 의지를 수행하는 대행자로 파악한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라캉이 안티고네를 대타자의 욕망을 수행하는 자로 파악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3)
시민과 가족, 클레온과 안티고네의 행동은 맹목적, 비합리적이죠. 그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목표를 수행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행위가 자신의 목적을 오히려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법칙주의적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법칙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뿐입니다. 칸트가 말하듯 그들은 마치 의무를 의무로 수행하는 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행동이 이처럼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결과 그들은 인륜적 사회의 균형 즉 국가와 가족의 균형을 파괴하게 되죠.

“인륜적 사회에서 질서와 두 본질의 합일을 위해 출현하는 것이 [오히려] 그 행위를 통해 대립된 세계로의 이행으로 변한다. 거기서 각자는 자기 자신과 타자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하는 것으로 의식한다. 따라서 그것은 공포스러운 운명의 부정적 운동, 영원한 필연성으로 된다. 이런 운동이 신적인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모두 그 자신의 단순성의 심연 속에 집어삼킨다.”

이런 행위의 법칙주의적 성격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인륜적 의식으로서 자아[자기의식]은 단순한 순수한 마음으로 인륜적 본성 또는 의무를 지향한다. 어떤 자의도, 어떤 갈등도, 어떤 주저함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법칙을 입법하거나 검증하는 일은 포기되었고 인륜적 본성은 그에게서 직접적이고 부동하는 것, 모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헤겔은 클레온과 안티고네의 성격적 단순성을 말하면서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격정과 의무 사이의 충돌 속에 처해 있다는 사악한 연극도 없으며, 의무와 의무 사이의 충돌 속에 있다는 희극적인 것조차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맹목적 행동이 발생하면 행위자는 자신을 이렇게 변명합니다. 즉 그는 의무는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불법을 저질렀다는 거죠. 헤겔은 이런 변명을 사악한 연극이라 판단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격정 즉 알 수 없는 힘이라는 말은 보통 자기를 기만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주 제시되는 변명이 의무를 알고 있었지만 둘 이상의 의무가 충돌했다는 변명입니다. 이런 변명은 결국 둘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객관적 기준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경중과 선후가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런 변명은 자기의 결단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선택을 변명하기 위해 판단 불능이라는 것을 동원하니 헤겔은 이를 희극적이라 말합니다.

결국 의무와 격정의 충돌이든, 두 의무의 충돌이든 사실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죠. 그런데 클레온이나 안티고네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 이런 변명조차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무가 유일한 것이며, 자신은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이 의무를 선택한 것입니다.

“인륜적 의식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신의 법칙에 속하는 인간의 법칙에 속하든 단호하다.”

4)
그런데 클레온이든 안티고네이든 자신이 선택한 것을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안티고네는 여자로서 클레온은 남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인륜적 본질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안티고네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는 국가를 본질로 삼았을 것이고 클레온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그는 가족을 본질로 삼았겠죠.

그러므로 이런 선택은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지만 사실은 자율적 판단을 통한 것이 아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죠. 그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확고하게 자신의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사명과 운명이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죠.

“이런 단호함의 직접성은 즉자적인 존재이다. ...상황의 우연성이 아니라 또는 선택이 아니라 자연이 하나의 성을 하나의 법칙에 속하게 하고 다른 하나의 성을 다른 법칙에 속하게 한 것이다.”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이 단순함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우리는 사회적인 처지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처지에서 나에게 규정된 것이 나의 사명과 운명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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