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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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14 골상학에 대한 비판
이병창 2015.11.10 74
다시 헤겔로14 골상학 비판
1)두뇌와 두개골의 차이
앞에서 골상학이 어떤 주장을 하는가를 살펴보았어요. 골상학은 정신이 신체와 상호작용하려면 정신도 물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두뇌의 활동이 곧 정신의 활동이라는 입장 즉 유물론에 토대합니다. 골상학이 등장한 18세기경에는 매우 획기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골상학은 두뇌와 두개골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두개골은 두뇌의 활동이 석화된 측면이고 두뇌는 두개골이 지닌 활동적인 측면을 말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므로 헤겔은 우선 두뇌와 두개골의 역할을 구분하려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 기관은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두뇌라는 신체의 유동성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신체의 고정적인 존재의 측면입니다. 둘 다 신체적 측면이지만 헤겔은 전자를 ‘신체적인 대자존재’라 하고 후자는 ‘고정된 죽은ruhend 사물’이라 합니다.

두개골이 두뇌와 달리 정신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헤겔 당시에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두개골이 기관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헤겔은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헤겔은 그런 합리화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두개골을 기관으로 본다면, 이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그저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개념적으로 불분명한 하다는 사실을 감출 뿐이라고 합니다.

“개념이 현전할 때 비로소 올바른 말을 가지게 될 것이다.”(182쪽)

그러므로 헤겔은 두뇌와 두개골을 명백하게 구분합니다. “두뇌가 살아있는 머리이듯, 두개골은 죽은 머리caput mortuum이다.”(182쪽) 이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골상학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2)골상학의 발전
일단 이렇게 두뇌와 두개골을 구분하게 되면, 골상학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상학의 기본적인 근거는 <두뇌의 정신적 활동이 두개골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물질적인 두뇌 활동과 물질적인 두개골 사이의 관계이므로 외적인 기계적인 인과관계가 됩니다. 골상학은 예를 들어서 사유 활동을 많이 하는 두뇌는 두개골의 이마 부분이 수직이라든지, 감정적인 여성의 두개골은 턱 부분이 길게 삐져나오게 된다고 주장하죠. 흉악한 범죄자의 두개골은 고릴라의 두개골처럼 이마가 얕고 턱이 발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개골은 두뇌를 덮고 있는 것이니, 두뇌의 활동 특히 그 정신적 활동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상학은 아직까지도 상당한 위력을 펼치고 있죠.

우선 골상학에도 다양한 입장이 가능합니다. 두뇌의 활동이 두개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거꾸로도 가능합니다. 즉 두개골은 자립적인 물질이고 고유한 방식으로 즉 두뇌의 활동과 무관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거꾸로 두개골의 특정한 형태가 두뇌의 정신적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마가 수직이면, 두뇌의 사유 활동을 촉진하고 이마가 평평하면 사유 활동을 막아서 범죄자가 되도록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두뇌의 활동이 두개골에 영향을 미치던가, 두개골이 두뇌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던가, 어떻든 두개골과 두뇌의 활동이 상호 연관을 가진다는 주장이 골상학의 입장입니다.

심지어 어떤 골상학은 두뇌와 두개골에 정신적 활동을 동시에 부여하죠. 두뇌에도 정신적 활동이 일어나며, 두개골에도 정신적 활동이 일어난다는 거죠. 마치 요즈음 뇌의 피질과 소뇌, 뇌간이 각각 다른 정신활동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두뇌의 정신적 활동과 두개골의 정신적 활동은 서로 다를 수 있고, 거기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 두뇌의 정신활동과 두개골의 정신활동이 서로 감응해서 조화한다고 가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골상학의 입장은 <두개골의 형태와 두뇌의 형태 사이에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입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양자 사이에 ‘외적인 상호 관계로서 필연적인 관계eine notwendige Beziehung derselben als aeussere fuereinander’가 성립한다는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또는 ‘그들의 형태가 상호 규정적이 되도록 만드는 외적인 관계eine selbst aeusserliche, wodurch also ihre Gestalt durcheinander bestimmt wuerde’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183쪽 참조)

3)정신활동과 두뇌의 형태
그런데 이와 같은 골상학의 기본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뇌의 형태가 두개골의 형태와 상응한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양자의 관계 역시 외적인 우연적 관계이죠.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두뇌의 형태가 그 내부의 정신적 활동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두뇌의 형태가 두뇌의 정신활동에 의해 변화된다는 입장은 우선 정신활동이 분절화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에 따라 두뇌의 기능이 국소화된다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자면 좌뇌는 계산을 하고, 우뇌는 상상한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죠. 헤겔도 일단 두뇌 기능의 국소화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두뇌는 정신의 구별을 존재하는 구별로 자기 속에 수용하며, 상이한 공간을 차지하는 기관들의 다양체vielheit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두뇌의 기능적인 다양체가 서로 무관한 기능적인 기관들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헤겔은 그런 공존은 자연의 원리에 대립한다고 보죠. 왜냐하면 자연은 “개념의 계기들에게 고유한 현존을 부여하기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유기체적 삶의 유동적인 단순성을 확립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적 삶의 분절화와 구분을 자기 내부의 구별로 확립하는 것”(183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뇌의 경우에도 단순한 다양체가 아니라 이렇게 분절화 되어서 다양체를 이루는 가운데서도 다시 유기적인 통일성이 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뇌의 기능이 정신활동의 분절화에 따라 국소화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두뇌의 기능적인 국소화가 두뇌의 크기나 형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인가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두뇌 기능의 차이는 두뇌의 뉴런의 시냅스 연결방식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냅스 연결의 차이가 두뇌의 외부의 형태적인 차이를 낳지는 않지요. 아무리 좌뇌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도 좌뇌가 더 크거나 둥글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저 좌뇌의 시냅스 연결방식이 더욱 복잡하게 발전할 뿐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의 계기가 근원적으로 강하든가 아니면 약하든가에 따라서 앞의 경우에는 확장된 두뇌기관을 차지하고 뒤의 경우에는 수축된 두뇌기관을 차지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unbestimmt”(183쪽)

이처럼 정신의 활동에 따라서 두뇌의 형태와 크기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정신의 활동이 두뇌를 넘어서 두개골의 형태에 상응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되겠죠.

“원인이 어떤 상태인가가 의심스럽다면, 그것이 두개골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도 알 수 없으며, 그 영향이 두개골을 확장시키는가 아니면 축소시키는지 또는 붕괴시키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야기하다erregen’는 말보다 ‘영향을 미친다einwirken’는 말이 더 적합하다면, 그런 영향이 수포 고약이 부풀어 오르는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식초에 넣으면 쭈그러드는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다.”(183쪽)

물론 두뇌의 형태와 두개골의 형태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그것은 유기체의 외적인 형태의 문제이며, 그렇다고 정신적 활동과 두뇌 형태, 그리고 두개골의 형태 사이의 연관 관계가 확립되는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4)두개골의 분할
골상학에서 문제되는 관계는 결국 세 가지입니다. 우선 정신활동을 들 수 있겠죠. 그리고 이 정신활동이 내재하는 두뇌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두뇌를 둘러싸고 있는 두개골이 있죠.

골상학은 두뇌의 정신적 활동에 따라서 두뇌의 형태도 변화되고, 그것에 따라서 두개골의 형태도 변화된다고 봅니다. 정신활동이 다면적이므로, 두개골 역시 이에 따라 분할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정신의 다면성은 그 현존[여기서는 두뇌가 아니라 두개골]에게 마찬가지의 다의성Vieldeutigkeit를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이런 현존이 분할되는 개별적인 장소가 가지는 의미가 특정적이라는 것이다. 정신의 다면성이 개별적인 장소에 어떤 암시를 주는지가 관찰된다.”(184쪽)

아래 그림은 골상학자 골이 우리 두뇌가 정신활동에 따라 어떻게 분할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정신활동에 따른 두개골의 분할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두개골은 손과 입처럼 운동의 기관도 아니고, 표정이나 몸짓처럼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가 되지도 못합니다. 두개골은 고정된 뼈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무차별하고 감출 것 없는 사물ein so gleichgueltiges, unbefanegnes Ding’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활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런 의문에 대해 골상학은 두뇌와 두개골은 서로 이웃하니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거나 심지어 서로 감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죠. 물론 이 경우 근본적으로 정신활동의 기능적 구별에 따라서 두뇌의 형태가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죠.

“두뇌의 이런 장소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장소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활동하도록 만들어지므로, 아마도 그 두뇌에 이웃하는 두개골의 장소도 또한 더 많이 형성될 것이다. 또는 그런 두개골의 장소는 공감이나 합의를 통하여 적어도 관성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확장하거나 축소하고 또는 어떤 방식으로든 형성될 것이다.”(185쪽)

그런데 이런 골상학의 주장에 대해 헤겔은 두뇌와 두개골 사이의 감응이니 뭐니 하는 것을 믿지 않을뿐더러, 정신활동에 따라 두뇌의 형태의 변화도 믿지 않죠. 더 근본적으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신활동의 분절화에 따른 두뇌의 기능적인 국소화도 거부합니다. 물론 분절화와 국소화를 전혀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활동의 분절화와 두뇌 기능의 국소화는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헤겔은 정신의 활동에서 분절화에 못지않게 유기적인 연관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정신의 특징이 주관성 즉 관념이나 느낌인데, 이런 관념과 느낌은 다른 관념이나 느낌과 연합되어 있고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라는 관념을 떠올린다고 하죠. 그런 ‘학교’라는 관념은 그것과 더불어 수많은 관념, 예를 들어 ‘나를 때린 어떤 교사’에 대한 관념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관념뿐만 아니라 ‘그 교사에 대한 어떤 분노’라는 감정 또는 느낌이나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어떤 욕망까지 함께 불러일으키죠. 두뇌 기능의 국소화의 원리에 따르면, 관념과 감정, 욕망은 두뇌 속에서 각각 활동의 장소를 달리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념과 감정과 욕망이 서로 뒤엉켜서 등장한다면, 두뇌의 기능 역시 유기적으로 상호 연관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런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즉 감정은 일반적으로 어떤 무규정적인 것이며, 감정은 그 중심 장소로서 머리속에서 모든 종류의 흥분Leiden을 일반적으로 동반하는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둑이나 살인자 또는 시인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이나 고통은 다른 감정들과 뒤섞여 있으며, 서로 서로 구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저 신체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부터도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 의미를 신체적인 것에 한정한다 할지라도 두통의 증상으로부터 어떤 질병인지를 알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85쪽)

다시 말하자면 헤겔이 두뇌의 기능적인 국소화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두뇌의 국소화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런 국소화된 두뇌 사이에 긴밀한 유기적인 관련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두뇌는 전체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죠.

5)정신의 활동과 두개골
정신활동에 따라 두뇌의 국소화를 인정하고, 이것이 두뇌의 형태를 거쳐 두개골의 형태적인 분할과 상응한다고 한다면, 여기서 또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겁니다. 즉 정신적 활동이 단순화되면 될수록 이것을 두개골의 형태와 연결시키기가 쉬워진다는 겁니다. 사실 골상학은 인간의 성격을 분류하는데 가능한 한 단순하게 분류하죠. 몇 가지 유형만으로 만족합니다만, 인간의 성격이 그렇게 단순화된다면, 인간을 이해하거나 행동을 예측하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은 아니죠.

이런 단순화를 거부하고 복잡성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 보죠. 두개골에는 여러 형태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활동도 아주 복잡하죠. 이런 경우 사실 대응관계가 확정되기 어렵습니다. 살인자에게는 이마뼈에 혹이 달린 것 외에도 턱뼈에 홈이 생겨 있고, 귀 뒷뼈에도 혹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살인자의 성격은 그런 특징들 가운데 어느 것과 연관시킬 수 있을까요? 또는 살인자에게도 턱뼈에 홈이 있고, 간음한 자에게도 턱뼈에 홈이 있다면, 턱뼈에 홈이 있는 것은 살인자인지, 간음자인지 구분하기 어렵죠.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경우 정신의 활동과 두개골을 연결시키려는 것은 상인이 “어떤 이웃이 지나가면 비가 온다”든가, 주부가 “돼지고기를 구우려 하면 비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의 두개골의 혹이 크면, 살인자가 이웃에 산다든지”, 또는 “그의 근처에 두개골이 평평한 자가 있으면, 자기가 살인자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서로 무차별한 관계라고 합니다.

이제 단순화시켜서 어떤 두개골의 형태와 어떤 정신적 활동을 연결시킨다고 해 보죠. 이게 가능하다면, 이제 이런 것도 가능합니다. 즉 “부정한 여인 자신이 이마에 혹이 달린 것이 아니라, 그녀와 바람핀 남자가 이마에 혹이 달린 것이라”고 말이죠. 또 이게 가능하다면, 더 나아가서 “살인자와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이나 그의 이웃이나 심지어 그와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 등이 모두 높은 혹이 달려 있다”(186쪽)고 생각할 수도 있죠. 헤겔은 이런 주장은 마치 “하늘을 나르는 소를 처음에 애무 한 것은 게이고 이 게는 당나귀의 등을 타고 있으며, 등등..”이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주장이라 합니다. 그런 생각이야 못할 것은 없으나, 그런 생각은 그저 머리속에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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