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골상학에 대한 대응 방법
골상학은 정신의 활동과 두개골의 형태 사이가 무관하다는 사실을 변명하기 위해 소질Anlage라는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이런 소질이라면 그것이 발전되는 환경이 호의적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 변명으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상인이나 주부는 오늘은 장날이나 빨래하는 날이니, 비가 와야 되지만 갑자기 날이 좋아지자, ‘비가 와야 하는데!sollen’라고 말하면서 우물쭈물하는 것과 유사하죠. 마찬가지로 골상학자는 이 사람이 원래 그런 소질이 있는데, 다행히 어떤 우연적 사건 때문에 그런 소질이 발휘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말로 덧붙여 ‘그는 그렇게 해야 하는데’하고 우물우물하죠.
그러나 이런 소질, 즉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은 정신 활동과 두개골 형태 사이에 어떤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고 헤겔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골상학은 헤겔에 따르면 “멍청하게도 자기가 확립하려는 것의 반대를 말하기에 즉 ‘이 뼈는 어떤 것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에”(187쪽) 이르게 됩니다.
헤겔은 근본적으로 골상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 즉 뼈가 행위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정신이니까요. 존재란 정신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골상학의 주장은 비이성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골상학의 주장은 정신의 활동이 두개골의 형태에 외적으로 표현된다는 데 근거합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관상의 경우와 달리 기호적 관계는 아니고, 직접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죠. 그런데 골상학자는 이런 외적인 표현으로서 골상을 보고, 그의 행동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정신의 활동이 두뇌의 활동이고, 그 때문에 두뇌가 기능적으로 국소화되어 있다고 해도, 두뇌의 형태가 변하는 것은 아니고, 더구나 두개골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죠.
헤겔은 관상을 보고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관상학자가 있으면 따귀를 때려야 마땅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제 골상학자의 경우에는 해골을 박살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에게서 두개골이라는 것이 “그의 진정한 현실을 그의 본질An sich을 따라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골상학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는 군요.
헤겔이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헤겔은 설혹 다른 철학자들을 비판하더라도, 항상 멋진 비유를 사용하고자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말이 낭만주의에 대해 “밤에는 모든 소는 검은 소”라는 식으로 비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상학자와 골상학자의 경우에는 정말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는 군요. 따귀를 때리라든가 해골을 박살내라든가 말이죠. 헤겔 당대에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헤겔이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들에 대해 느끼는 증오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군요.
2)변증법의 힘
이성의 본능은 이런 골상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던져 버리는데, 하지만 헤겔은 골상학에도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식을 예감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를 멍청하게도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식으로 파악했다”(188쪽)고 하죠. 그러므로 이런 골상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를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를 통해 관찰하는 이성은 사실상 그 정점에 이르렀던 것처럼 보인다. 관찰하는 이성은 이 정점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악한 것은 이미 그 자체에서 자기를 전복시키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188쪽)
이 구절에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의 깊은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악한 것 속에 오히려 극복의 단초를 발견한다는 것이 변증법의 힘입니다. 이런 변증법의 힘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은 신성한 존재의 현관 바로 앞에 서 있으므로 바로 그 때문에 가장 타락한 자이고, 또한 그런 자이었다고 말할 수 있듯이, 스스로에게 즉자 대자적인 본질이어야 하는 것, 그것은 자체적인 존재diese Selbstwesenheit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런 자체적 존재를 자기 자신의 피안으로 옮겨놓는다. 이런 즉자 대자적인 것은 존재의 직접성 속에 머물러 있을 때보다 오히려 이런 소외를 겪고 그 대상을 자기 내로 회복시킬 수 있을 때 더 높은 현존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정신이 자기 내에 더 큰 대립을 자기 내로 회복시킬 때 더 큰 것이 되기 때문이다.”(189쪽)
3)관찰하는 이성의 총 정리
헤겔은 골상학에 대한 비판을 여기서 마치고, 이성 장에서 첫 번째로 전개된 관찰하는 이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합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골상학이 정신의 발전에 미친 긍정적 역할을 끌어내려 하죠. 우리 역시 헤겔을 따라 관찰하는 이성 전체를 반성하여 보기로 하죠.
우선 비유기체에 대한 관찰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법칙은 사물의 현존과 결합되어 있었어요(an das Dasein von Dingen fest geknuepft). 예를 들자면 시간과 공간에 관한 낙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벗어나면 현존을 벗어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죠. 그게 뉴턴 물리학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이런 비유기체의 법칙에서 법칙의 양 측면을 통일하는 일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das nicht existierende Innere). 그러므로 법칙은 필연적이지 못하고 항상 귀납적인 일반성만 가지게 되죠. 유기체에서 생명의 동일성을 통해 이런 통일적 일자가 출현합니다.
유기체에 이르면 개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가 문제됩니다. 개체는 환경의 파괴적인 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유지합니다(Der Begriff, nur im Elemente der absoluten Vereinzelung realiziert). 이제 자기가 목적이 되죠. 환경은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게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관계 법칙입니다.
그러나 개체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동일성에는 한정이 있습니다. 개체의 자기 동일성은 종적인 재생산을 통해 더욱 발전되죠. 이런 개체가 개별적인 동일성이라면 종은 보편적인 동일성이 되죠. 이제 지속적으로 존재가능한 동일성이 현존하게 됩니다.
생물의 경우, 이런 보편적 동일성(종)은 세대와 세대 사이에 내재해 있고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세대이죠. 그러나 자기의식적인 인간에 이르게 되면 보편적 동일성은 사회라는 형식으로 직접 현존하게 되죠(der als Allgemeinheit existierenden Begriff oder als Zweck existierenden Zweck). 오히려 개체는 이런 보편적 동일성의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이행합니다.
헤겔은 자기의식적 인간을 다루면서 심리학과 관상학 그리고 골상학을 다루었습니다.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적 심리와 외적 환경 사이에 법칙>을 발견하려는 시도라면, 관상학은 <내적인 심리가 얼굴이나 신체의 형태 속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관계>가 되죠. 심리학의 법칙이 상호 외적인 것들 사이의 우연적인 관계(Beziehungen von Bleibenden auf Bleibendes)라 한다면, 관상학의 법칙은 개체의 내면이 직접적으로 그 신체에 표현되는 기호적 관계(eine Sprache des Individiums, die es an ihm Selbst hat)이며 필연적이지만 약정적 관계에 불과합니다.
4)“정신은 뼈다”
양자를 종합하면서 <필연적이면서도 동시에 물질적인 관계>로 가정된 것이 바로 골상학의 법칙이죠. 골상학에 이르면 심적 내면은 두뇌의 활동에 불과하며, 이런 두뇌의 활동은 두개골에 물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두개골의] 외면성은 기관도 아니고, 언어나 기호도 아니며, 죽은 사물로서 정신의 외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이다.”(190쪽)
이런 <물질적이면서도 동시에 필연적 관계>는 헤겔의 말로 한다면 “개념이 사물로서 현존하게 된다(190쪽)”는 겁니다. 이를 부연하면서 헤겔은 “관찰은 정신의 현실을 사물로 만들며, 거꾸로 표현하자면 죽은 존재에게 정신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190쪽)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이성이 추구하려 했던 것이죠. 이성은 사물 속에서 그 자체적인 존재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즉 객관적인 존재이죠. 그런데 이 객관적 존재는 곧 자기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성의 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인 현실로서 추구한다.”(190쪽)
마치 법적인 인격의 관계에서 각각의 개인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자율적인 결정권자로서 동일한 것과 같죠. 이런 인격의 관계가 자연과 인간 사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성이 추구하는 이 자체적 존재, 나와 동일한 존재가 골상학에서 도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널리 알려진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골상학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죠.
“정신은 존재한다.”
“정신의 존재는 뼈, 두개골Knochen이다”
헤겔은 이 경우 정신이 담즙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은 두뇌의 활동의 반성적인 측면이므로, 물질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두뇌의 활동이 두개골에 영향을 미치므로, “정신은 두개골이라”는 정식이 성립하게 된다는 거죠.
5)실천이성으로의 전환
헤겔은 이렇게 골상학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 지니는 의미를 파헤치려 합니다. 우선 골상학을 통해 도달한 결론 즉 <필연성이 직접적인 물질적 관계로 출현한다는 것>, 즉 “정신은 뼈”라는 주장은 불행한 의식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의식의 경우에도 개체의 통일 곧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로 소외되었죠. 이런 소외 때문에 불행한 의식은 아직 의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죠. 헤겔의 용어법상 이처럼 자기 자신이 대상으로 소외되어 나타난다면, 이를 ‘범주die Kategorie’라고 말합니다.
개체들 사이에 상호 인정이 출현하면서 개체의 통일로서 우리Wir가 현실 속에 출현하죠. 그게 바로 형식적 인격으로서 이성이었죠. 이런 이성의 개념은 골상학에서 정신과 물질이 통일되면서, 자기를 입증하기에 이릅니다.
헤겔은 골상학에 등장한 이런 명제 즉 “정신은 뼈이다”는 명제를 무한판단이라고 규정합니다. 무한판단이란 주어와 술어가 범주적으로 무관한 경우이므로 일반적으로는 넌센스로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무한판단은 형식논리에서는 배제됩니다만 칸트가 인식의 형식으로서 긍정판단이나 부정판단과 구분된다고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헤겔은 칸트의 입장에 따라 무한판단을 수용하고, 이것이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헤겔에게서 무한판단은 자기 스스로를 지양하는 판단, 즉 판단의 자기부정이죠. 판단이란 원래 이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판단은 판단 자체를 부정하는 판단이므로, 이런 무한판단에서 실천판단으로 이행하게 되죠.
헤겔은 이제 “정신은 뼈이다”라는 명제가 이런 의미에서 무한판단이라고 합니다. 이 무한판단은 이제 여기서 실천판단으로 이행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판단은 “정신은 뼈가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명제를 함축하게 됩니다.
“의식은 자기를 더 이상 직접적으로 발견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자기의 활동을 통해 산출할 것이다. 의식의 관찰에서 다만 사물이 문제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자기 활동의 목적이 된다.”(191쪽)
6)골상학은 오줌이나 먹어라
골상학이 지니는 또 하나의 의미는 골상학을 통해서 이성적 관찰이 부딪히는 혼란이 여지 없이 폭로된다는 겁니다.
관찰하는 이성은 “정신은 뼈다”라는 명제를 ‘자기 지양적인 판단’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를 입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벌이게 됩니다. 이런 “경멸할 만한 무개념적인 벌거벗은 사유”를 덧칠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감추려 합니다.
“이런 표상 가운데 있는 개념은 이성이 스스로에게 전적으로 사물적인 것이며 또한 순수한 대상적인 것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이 이런 것은 개념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단지 개념적으로만 이성은 진리이다. 개념의 내용이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표상으로서 존재하는 경우, 자기 지양적인 판단이 이런 무한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존속하는 명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이런 개념 자체가 순수하면 할수록, 더욱더 노골적인 표상으로 전락한다.”(192쪽)
헤겔은 골상학의 표현 즉 ‘정신은 뼈다’라는 표현에는 마치 자연에서 생식의 기관이 배출의 기관과 결합되어 있듯이 새로운 이행이라는 고상한 의미와 과거로 복귀하려는 천박한 의미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