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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16 이성적 자기의식-편력하는 기사 돈키호테
이병창 2015.11.25 77
다시 헤겔로 16 이성적인 자기의식으로의 이행-편력하는 기사

1)이성적 자기의식의 목표
지금까지 이성 장 가운데 A절 관찰하는 이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B절로 넘어가게 됩니다. B절은 “이성적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해서 흔히 ‘이성적 자기의식’ 절이라 하죠.

여기서 정신현상학 전체에서 이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이 차지하는 위치를 대략적으로 밝혀 두는 것이 이 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성의 장을 읽다가 보면 의식과 자기의식의 장에서 다루어졌던 개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찰하는 이성 절에서는 의식에서 다루어진 개념인 ‘사념(Meinung; 확신)’, ‘지각’, ‘오성’이 다시 등장하고, 이제 다루게 될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을 보면 ‘자기의식’의 장에서 다루어진 개념이 다시 등장하죠. 그래서 절 제목이 ‘이성적 자기의식’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반복되는가는 이미 앞의 절 즉 관찰하는 이성의 절 앞부분에서 언급했습니다. 의식과 자기의식을 거쳐서, 개체는 “자기가 곧 대상”이며, “내가 곧 우리”라는 인식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측면에 한정되었죠.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나와 대상, 나와 우리는 대립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 장에 이르러 이런 내용적 대립도 지양됩니다. 이미 관찰하는 이성 절에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나는 곧 대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공히 나와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에 이른 거죠. 앞으로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에서 이미 형식적으로 확립되었던 나는 우리라는 인식이 내용적으로도 확립되게 됩니다.

“관찰하는 이성이 범주의 지반 위에서 의식의 운동을 즉 감각적 확신, 지각 그리고 오성을 반복하고 있듯이, 이것[이성적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의 이중화된 운동을 다시 반복할 것이며, 자립성에서 자유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193쪽)

나와 타자의 통일로서 ‘우리’가 곧 일반적 이성입니다. 개체가 진정으로 일반적인 이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아를 관철하려 할 때 그게 자립적 개체입니다. 반면 개체가 진정으로 일반적인 것을 인식하게 되면, 나와 타자 사이의 대립도 사라지고 나는 일반적인 이성 즉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나를 실현시킬 수 있으므로, 나의 자유가 등장하게 되죠. 이미 자기의식 장 끝에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인격이 출현했습니다. 이제 내용상으로 이런 자유로운 존재가 출현한다는 거죠.

“처음 활동하는 이성은 자기 자신을 다만 개체로서 의식하며, 그런 존재로서 자기의 현실을 다른 현실 속에서 요구하고 산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어서 개체의 의식이 일반성으로 고양되면서 자기의식은 일반적 이성이 되고 자기 자신을 이성으로서 즉 즉자 대자적으로 이미 인정된 존재로서 의식한다.”(193쪽)

2)정신의 운동과 이성의 운동
이렇게 되면서, 정신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정신의 단계에서는 어떤 운동이 전개될까요? 아직 정신 장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이건 미리 말하는 것이 되지만, 의식에서 자기의식, 그리고 이성 장에서 전개되었던 것은 전부 인식의 측면에서 일어난 나와 대상, 나와 타자의 동일성입니다. 그런데 정신의 장에 이르게 되면 이런 동일성이 이제 실천적 의지의 차원에서 형성되게 되죠. 인식적으로는 인륜 즉 현실적 선이 무엇인지 알지만 우리의 의지는 그걸 실천하려 하지 않을 때가 있겠죠? 마치 햄릿이 그가 해야할 바를 알지만 그의 의지는 움직이지 않는 경우처럼 말이죠. 인식적으로 획득된 실체가 의지에서조차 수용될 때 진정한 정신이 실현되면서, 그 다음 단계인 절대정신으로 이행하게 되죠.

이성적 자기의식에서 시작되는 운동이 도달하는 지점이 정신의 운동이 시작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이렇게 매개가 되는 지점은 헤겔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단순한 정신적 존재’ 또는 ‘실재하는 실체’라는 범주에 해당됩니다. 이성적 자기의식에서 정신의 운동이 시작하는 ‘단순한 정신적 존재’에 이르기까지의 운동이 ‘이성적 자기의식’의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 자기의식의 출발점에서 이미 인륜적 실체가 출현하지만, 이 경우 개체는 이런 실체에 대해 대립하죠. 이 경우 실체는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습속’이 됩니다.

"인륜적 실체는 추상적인 일반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다만 사유된 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실체는 직접적으로 실현된 자기의식이거나 또는 습속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개별적 의식은 다만 존재하는 일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적 의식은 특정한 것으로서 존재하는(in seiner Einzelheit) 일반적 의식을 자기의 존재의 지반으로서 의식하기 때문이며, 개별자인 그의 행위와 현존의 지반이 일반적 습속이기 때문이다.“(194쪽)

반면 이런 개체적 자기의식이 발전하여, 개체와 타자 사이의 통일이 인식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성적인 ‘인륜적 실체’가 실현되게 되죠. 이런 경우 실체는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구성한 사회가 됩니다. 이게 앞에서 말한 ‘습속’과 구분되는 ‘인륜성의 왕국das Reich der Sittlichkeit’이죠. 이런 실현된 인륜적 실체 속에서는 “타자는 자립적인 존재로 인정되면서도 그런 속에서 타자와의 완전한 통일을 직관할 수 있으며”, “내 앞에 현전하는 자유로운 물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타자를 나 자신의 나를 위한 존재로서 대상으로 삼는”(194쪽)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3)시민사회
이런 이성적인 인륜적 실체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립하는 걸까요? 헤겔은 이 이성적 실체라는 개념에 관해서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서부터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법철학??에서 아담스미스가 제시하는 노동 분업의 사회를 모델로 하여,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끌어냅니다. 이 시민 사회는 각자의 노동 산물이 서로 교환되는 사회이죠. 물론 이 교환은 시장을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시민 사회에서 각 개인의 노동은 곧바로 사회적인 노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노동하는 개인적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노동을 통해 타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기여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노동의 산물은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교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자유롭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개체는 일반적 실체 속에서 이런 행위의 일반적인 존립을 위한 형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조차 갖는다; 개체가 행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일반적인 운명이며 습속이다. 이 내용은 완전히 개별화되는 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의 행위와 뒤얽혀진다. 개체가 자기의 욕구를 위해 수행하는 노동은 자기의 욕구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며 그 자신의 욕구의 만족을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만 획득한다. 개체가 개별적인 노동 속에서 일반적인 노동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듯이 또한 달리 말하자면 개체는 일반적인 노동을 자기가 의식하는 목적(대상)으로서 수행한다.”(195쪽)

헤겔은 이런 시민 사회에서 일어나는 교환의 체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형식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이라는 사실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헤겔은 자기의식 장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와 같은 형식적인 인격이 성립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아직 내용적으로는 서로 대립됩니다. 이 단계에서 아직 소유는 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즉 점유가 일반화되죠. 그래서 서로가 힘을 통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약탈이 생겨나죠. 이런 사회도 사회인 한에서 점유와 약탈은 제한되는 데 이것은 관습법에 의해 지배되죠. 그래서 헤겔은 이를 습속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일반적 실체는 그 일반적 언어를 습속이나 민족의 법[관습법] 속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하는 불변하는 본질은 그것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별적인 개인 자체를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95쪽)

이런 힘에 의한 점유와 약탈을 막기 위해서는 내용적으로도 각자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는 소유권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즉 그의 노동의 산물이 그의 것이라는 원리가 확립되어야 하죠. 바로 이런 노동에 따른 소유권의 원리가 확립되는 과정이 이성적 자기의식이 전개해 나가는 운동과정입니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오게 되면 교환이 일반화되고, 이런 교환도 노동에 의한 소유권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일어나게 되죠. 이런 사회는 합리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입니다. 이 사회가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의 왕국, 단순한 정신적 존재, 인륜적 실체라는 사회이죠.

“그러므로 자유로운 민족 속에서 이성이 진정으로 실현된다. 이성은 현현하고 있는 생동적인 정신이며,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규정을 즉 그 자신에 주어지는 일반적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본질이 공표되어 있고 물적인 존재Dingheit로서 현현하고 있음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그런 본질이며 그런 자기의 규정에 도달하였다.”(195쪽)

4)중세 농노의 투쟁
주어진 습속에서 합리적 인륜성의 이행이 이성적 자기의식 장의 목표입니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이행은 중세 농노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보겠어요. 중세 농노를 마르크스가 이미 잘 설명한 것처럼 고대 노예와는 상이합니다. 중세 농노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인격이죠. 물론 실제상 여러 인격적인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농노는 인격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노예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런 농노는 중세사회에서 아직도 내용적으로는 자기의 권리가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소위 귀족의 힘에 의한 지배에 복종하고, 이런 복종 관계가 점차 관습법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죠. 그러나 점차 농노의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각성은 사회적으로 교환이 일반화되고, 노동의 권리가 인정되는 추세와 더불어 나타나게 되죠. 이런 이행이 일반화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적인 시민사회가 형성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세와 근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만, 이렇게 관습법과 소유권, 농노와 시민의 관계는 중세와 근대로만 단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죠. 왜냐하면 이미 중세의 시대에도 도시에서처럼 시민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근대에도 노동자들이 농노적인 인격적 구속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까요. 역사적 구분보다는 이런 논리적 단계의 구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헤겔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은 이런 이행을 개인의 행복의 차원과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행복이란 개인이 자기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우에 획득됩니다. 그런데 중세 초기에는 사회적 관습법에 의해 규정된 권리를 개인이 받아들이면서 개인은 행복 속에 있었습니다. 이제 개인은 관습법을 부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자각하게 되면서 이런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야 되죠.

“이성은 이런 행복으로부터 추방될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다만 즉자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본다면 자유로운 민족의 삶은 실재하는 인륜성으로 또는 현존하는 것(즉 습속)으로 전락하므로 이런 일반적 정신 자체는 이미 주어져서 현존하는 것이며, 습속과 법칙의 전체이며, 특정한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인륜적 실체에 불과하다. 이런 실체는 더 높은 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즉 실체라는 자기의 본질(즉 시민사회적 관계)을 의식하기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지닌 제한성을 탈피하며 다만 이런 인식 속에서 그 절대적 진리를 갖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 속에서 진리를 갖지는 않는다.”(196쪽)

이런 습속 속에서 처음 개인은 ‘순수한 신뢰(ein gediegenes Vertrauen)’ 속에 있었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게 되면서 이제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나타납니다. 사회의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은 그저 “소멸하는 크기”에 불과하고 사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비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반면 개인은 자기 “스스로를 본질로 삼으므로als Wesen sich darzustellen)”, 주어진 습속을 “고유한 권리를 지니지 않은 두려움이라는 공허한 관념이 낳은 산물nur ein Gedanken ohne absolute Wesenheit)”(196쪽)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5)편력하는 기사-돈키호테
이런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갈등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개인은 상실된 행복 즉 사회와 개인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sich in dieser Bestimmtheit eines Einzelnen zu verdoppeln”,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는 내적으로는 이런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죠. 즉자적으로 어디엔가는 이런 행복한 사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따라서 그는 이 세계를 편력하게 되죠.

“실천적 의식은 이런 통일을 확신한다; 그는 이런 통일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그와 물적인 존재의 통일은 이미 주어져 있다고 간주한다. 그는 다만 이에 더해서 이런 통일이 그에게 그의 실천적 의식을 통해서 생성되어야 한다고 간주하며 그런 통일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그런 통일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이런 통일이 행복이라 불린다면, 개인은 그의 행복을 찾기 위해 그의 정신에 의해 세상 속을 편력하게 될 것이다.” (196쪽)

‘세상을 편력하는 기사’에 관한 소설은 중세 후기에 등장한 낭만소설의 대표적인 유형입니다. 이 유형은 원래 중세초기의 기사도 문학을 대체하여 등장했죠. 중세 초기 기사도 문학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행복(왕비나 공주로 상징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모험담입니다. 그러나 중세 후기의 낭만소설에 이르면 이제 기사는 이 세상에 행복을 찾기 위해 방랑하게 되죠. 어딘가에 있는 구원의 여성을 만나는 것이 그 꿈이죠. 이런 소설의 대표작이 돈키호테와 같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기사들은 대개 중세에서 몰락 귀족이거나 아니면 민중계급 가운데 출세를 하려는 하급무사라고 합니다. 돈키호테의 작자 세르반테스가 바로 이런 하급무사 출신이었다고 해요. 그는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마드리드에서 죄를 지어서 당시 스페인 식민이였던 나폴리왕국으로 건너갔죠. 거기서 그는 스페인과 터키의 일대 대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사령관의 추천장을 받아 의기양양하게 스페인으로 돌아오다가 아랍의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5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되죠. 간신히 돈을 내고 풀려난 그는 스페인에 돌아와서 군납업자로 활동하다가 여러번 부정행위로 감옥에 드나들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소설 돈키호테를 구상했다고 해요. 현실에서 실패한 자신의 경험을 그의 소설 속에 풍자적으로 그려냈던 것이죠. 중세 말 절대주의에 이르게 되면 이런 편력하는 사람은 기사 신분에서 새로운 계급인 제3계급이 됩니다. 이제 세속적인 인물이 행복을 찾아 방랑하는 소설이 나타나게 되죠.

6)심정의 법칙과 덕성
그런데 이런 편력에 나선 기사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힘에 의한 점유입니다. 그는 중세 사회 즉 습속에서 현실적으로 행복을 얻지 못하자, 중세 사회에 불만을 품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중세 사회의 힘에 의한 지배라는 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편력하면서 자기가 실현되는 행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중세적 사회는 강화되죠. 헤겔은 편력하는 기사가 부딪히는 이런 자기모순을 두 가지 계기를 통해서 서술합니다.

우선 실체들의 계기입니다. 힘에 의한 지배는 자신을 본질로 삼아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이니, 그의 욕망은 무한합니다. 헤겔은 힘에 의한 지배의 욕망을 ‘자연충동Naturtrieb’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충동은 그것을 충족하는 것이 다시 새로운 충동의 내용이 되는 것이니,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 끝없는 것이라 하죠. 이런 자연충동은 결국 충족되지 못하면서 반대로 관습법적인 실체의 힘을 강화시키죠.

또 하나의 계기는 개체의 계기입니다. 관습법적 실체가 강화되면 개인의 불행은 강화되죠. 소수만이 그 속에서 행복을 얻으니까요. 대부분의 개인은 다시 자기의 행복을 찾아 이 세상을 편력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동과 약탈이 끝나지 않게 됩니다.

실체의 계기에서 개인들의 욕망이 관습법적인 실체가 생성되는 원인이 됩니다. 개체의 계기에서 관습법적인 실체가 개인의 불만의 전제가 되죠.

“전자의 운동에서 그런 개별적인 형태들은 인륜적 실체를 생성하는 것이고 그런 실체에 선행한다. 후자의 운동에서 개별적인 형태들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다. 즉 개체적 자기의식을 제한하는 규정은 개체적 자기의식을 위 해 해소된다. 전자의 측면에 따르면 경험되어지는 운동 속에서 개별적 형태들이 진리로 삼았던 것 즉 자연충동의 직접성과 소박성이 지양되고 그 자연충동의 내용은 새로운 고차적 내용으로 이행한다. 그러나 후자의 측면에 따르면 실체 속에서 자신을 제한하는 규정이 존재한다는 의식의 잘못된 표상이 해소된다.”(197쪽)

결국 이런 상호 모순적인 운동 속에서 개체는 새로운 자기의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의식은 이제 형식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타자를 인정하는 의식이죠. 이런 의식은 처음에는 내면적으로만 이런 타인을 내용적으로도 인정하게 됩니다. 이 단계가 헤겔이 말한 ‘심정의 법칙’이라는 단계이죠. 이 단계를 넘어서 스스로 자각적으로 타인을 내용적으로 인정하는 통일에 이르게 됩니다. 이 새로운 단계의 자기의식이 곧 ‘덕성’입니다. 이런 ‘덕성’의 단계는 행위를 통해 그의 자연충동이 충족되는 것을 통해 행복이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행복이 발견되며, 행위 자체가 선인”(198) 단계입니다.

개체가 이렇게 새로운 도덕성에 이르게 되면서 사회 역시 새롭게 규정됩니다. 이제 관습법적인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합리적인 사회 즉 시민사회가 형성되죠. 이것이 정신적 실체입니다. 이로부터 정신의 운동이 시작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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