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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13 골상학의 의의
이병창 2015.11.07 122
다시 헤겔로 13 골상학의 의미

1)골상학의 발전
이성은 자기의식의 단계에 이르러, 자기 자신 즉 인간의 심리적 내면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성은 이를 법칙적으로 인식하려 했습니다. 우선 이런 심리를 외적인 환경과 연결시키려 했어요. 그 결과 나온 것이 ‘심리적 법칙’이었습니다. 이어서 이런 심리적 내면을 인간의 신체적 형태, 관상과 연결시키려 했는데, 이것이 ‘관상학적 법칙’이었어요. 전자는 경험적인 관계이며, 후자는 기호학적인 관계입니다. 헤겔은 이 두 법칙이 모두 외적으로 무차별한 것들끼리의 관계에 불과하니 여기서 이성이 인식하려는 ‘자체 존재적인 것Selbstwesen’ 즉 자립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헤겔은 이 두 가지 외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가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정신과 두개골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골상학이죠. 골상학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정신활동이 심장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세기 초 골Gall부터였다고 합니다. 그는 1819년 <일반적인 신경 체제 그리고 특히 두뇌의 해부학과 생리학>이란 책을 발간했고 이것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해요. 이를 일반인에게 대중화한 것은 스푸르쯔하임Spurzheim과 콤브Comb이었다고 해요. 특히 콤브의 저서는 무려 20만권이 팔릴 정도로 대대적인 히트를 쳤다고 합니다.

골상학은 두뇌와 두개골을 혼동하기는 했지만, 생리학의 발전과정에 나왔고 나중에 두뇌 신경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해서 과학적으로 전적으로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라 합니다. 골상학의 주요 주장을 보면 오늘날 두뇌과학의 주장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골상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도 연관되니까 골상학의 주요 주장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죠.

우선 골상학은 두뇌가 정신활동의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두개골은 두뇌가 석화된 형태이며, 그 외피에 해당된다고 보죠. 둘째로 골상학은 정신활동이 두개골 속에 국소화되어 있다고 하면서 오늘날 두뇌의 국소화라는 주장을 선취하고 있다고 해요. 셋째로 골상학은 정신활동이 27개로(골의 주장) 구분된다고 하는데, 이는 학자들마다 서로 상이하다고 합니다. 넷째로 정신활동 중 어떤 부분이 어떤 사람에게서 다른 부분보다 중요하거나 강화되면, 그 부분에 해당되는 두뇌의 크기가 확장된다고 봅니다. 그것에 따라서 두뇌의 전체적 형태가 변화하게 되고, 어떤 사람의 독특한 골상이 형성된다고 보죠. 이런 주장들을 보면, 골상학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럴 듯하게 보이니까요. 특히 정신활동이 강화되면, 그 부분의 두뇌(두개골)의 크기도 변화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주장은 많은 사람이 쉽게 넘어갑니다. 오늘날에서 유럽인의 두개골이 아시아, 아프리카인의 두개골과 다르다고, 심지어 크기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2)정신활동과 두개골의 형태
관상학의 대상이 되는 형태와 골상학이 탐구하는 두개골의 형태는 언뜻 보기에 신체적 형태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헤겔은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관상학은 관상이 ‘내면을 나타내는 기호(an ihr selbst redend Zeichnen)’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골상학은 두개골은 ‘스스로를 대자적으로 표현하는 것(sich fuer sich darstellen)’이며 ‘단순하게 사물적으로 존재하는 것(blosses Ding)’이라 하죠.

두개골이 ‘단순한 사물’이라는 말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만, 여기서 ‘대자적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말의 의미는 모호합니다. 더군다나 언뜻 보기에 두개골이 심리적 내면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은데, 골상학이 이 사이에 ‘대자적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관계를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골상학은 심지어 이 관계를 말하면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또 다른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계”이며 그 관계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좀 더 나가보아야 합니다.

우선 헤겔은 골상학이 나오게 된 동기를 살펴봅니다. 관상학의 경우, 기호적 관계이므로 여기서는 정의나 문화적 약정의 관계가 존재할 뿐이죠. 이건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골상학은 관상학을 넘어서 정신이 신체적 형태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미친다는 것을 주장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 자체가 하나의 신체적인 원인이 되어야 하죠. 즉 정신의 물질화입니다.

“우선 정신적인 개체성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이 정신적 개체성 자체가 원인으로서 신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180쪽)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로서, 정신이 직접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본다면 이런 이원론적 가정은 성립하기 어렵죠. 그래서 유물론이 나옵니다. 유물론은 정신이란 두뇌의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죠. 마치 열이 분자운동으로 환원되듯 말입니다. 위에 나오는 가설은 유물론적인 가설로 보입니다. 골상학은 정신은 우선 이런 신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신체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대자적인 것’ 즉 자립적인 것입니다.

골상학이 정신에 관해 이렇게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반면 헤겔은 골상학을 비판하면서 정신과 그 신체적 기관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일까요? 그 관계는 환원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기능주의적 관계일까요? 헤겔은 적어도 관념이라니 주관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이런 기능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의 입장을 현대 심신관계에 관한 다양한 이론에 비추어본다면, 창발성이라는 입장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과 그 신체적 기관 사이의 관계에 대해 헤겔 자신의 표현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적 신체는 일종의 도구, 기관이지만 외적인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의 기관은 아니고, ‘자기의식적 존재가 그 자기 내부에서 활동하는 기관Organon des Tuns des selbstbewussten Wesen in sich selbst’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 자체만 보면 헤겔은 신체적 기관이 곧 정신의 활동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아래와 같은 표현을 볼까요?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기관이 고려되어야 한다. 즉 그 기관 속에서 한 극단을 이루는 자기의식적인 개체는 그 자신에 대립하는 고유한 현실[외부 환경]에 대립하여 자기를 대자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외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행위 속에서 반성된 것이 된다.”(180쪽)

헤겔은 더 나아가서 정신이란 그런 신체의 활동이 지니는 자기반성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일단 정신이란 그런 신체적 기관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그런 활동은 다른 신체의 활동과 달리 반성적 측면을 지닌다는 것이죠. 우리가 정신이라 말하는 것은 그런 반성적 측면을 지시할 뿐입니다.

4)정신의 신체적 기관
오늘날에는 이런 신체적 기관이 곧 두뇌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사실이 역사적으로 명백했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 한 때 사람들은 정신의 신체적 기관이 심장이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헤겔은 우선 신체의 어떤 부분이 그런 정신적인 신체가 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습니다.

우선 다른 행위 기관(손과 성기 등)에 영향을 미쳐야 하니까, 행위의 기관 자체가 그런 정신적 기관의 후보가 될 수 없습니다. 하긴 예술가는 “손이 스스로 생각한다.”, “발이 절로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렀다”든지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에 지나지 않겠죠.

그렇다면 관상학의 대상이 되는 신체적 형태는 어떨까요? 그것은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기호입니다. 헤겔은 이를 ‘자기내적으로 반성된 것in sich reflectiertes’이라 합니다. 즉 내면의 의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관상학적 형태는 진정한 의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에 대한 주체 자신의 비평으로 간주됩니다. 즉 ‘행위를 비평하는 기관(das Tun besprechend Dasein)’이죠.

그러나 이런 관상적인 표현은 행위 기관인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얼굴에 쓰인 표정이 손과 발을 움직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더욱이 관상이 내면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 관계는 기호적 관계이며, 기호와 그 의미 사이에는 우연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신과 그 신체적 기관은 이런 관상적 표현의 관계와 다릅니다. 이때 정신과 그 신체적 기관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 신체적 활동의 반성적 측면이 곧 정신이니까요. 헤겔은 거꾸로 말하자면 이 경우 정신은 그 신체적 기관을 ‘비본래적인 대상적 존재’로 갖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내적으로 반성된 존재 자체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wirkend 되면, 이제 [기호적 관계에서의] 무차별성은 사라진다. 이를 통해 그런 현존[정신적 신체]은 자기의식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 자기의식이 그런 현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자기의식은 하나의 대상적인 존재를 갖지만 비본래적인 대상적 존재를 가져야 한다. 자기의식이 이런 기관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180쪽)

4)이자와 신경, 그리고 척수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이제 이런 정신의 신체적 기관은 두뇌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두뇌의 활동을 여러 가지 것과 비교하여 설명하려 합니다. 우선 헤겔은 정신과 두뇌 사이의 관계를 ‘이자와 담즙’ 사이의 관계와 비교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자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플라톤은 이런 이자가 “예언의 능력을 갖는다거나 성스럽고 영원한 것을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언표하는 재능을 가진다”고 말했으나 헤겔은 이런 주장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개체가 이자 혹은 심장 등등 속에서 갖는 운동은 개체의 전적으로 자기 내적으로 반성하는 운동으로 간주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 운동이란 곧 다음과 같을 뿐이다. 즉 그 운동은 개체의 신체에 이미 박혀geschlagen 있으며, 외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동물적인 존재를 갖는다.”(180쪽)

이자가 분출하는 것은 담즙입니다. 하나의 물질적 존재이죠. 거기에는 정신이 지칭하는 자기반성적 측면이 없습니다. 그것은 헤겔에 따르면 ‘신체에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또 헤겔은 단순한 신경체계와 두뇌도 구분하죠. 두뇌는 신경체제가 발전한 것이죠. 두뇌는 신경 체제처럼 단순하지 않고 고도로 ‘분절화된gegeliedert 것’입니다. 이런 분절화와 더불어 신경 연결 방식 자체가 변화하게 되죠.

“반면 신경체제는 그 운동 속에서 유기체의 직접적인 고정화Ruhe이다. 신경은 사실 외적인 것을 향한 그 방향 속에 침잠하고 있는 의식의 기관이다. 그러나 두뇌와 척수는 자기의식의 자체 내에 머무르면서-비 대상적이며 동시에 비외향적인- 직접적으로 현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81쪽)

즉 동물에서 발견되는 단순한 신경체제와 같은 것은 유기체의 운동방식이 고정화되어 육체에 새겨져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아마 헤겔은 신경과 신경의 연결이 고정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두뇌나 척수와 같은 신경체제는 유동성을 지닙니다. 즉 신경과 신경의 연결이 가변적이라는 거죠. 따라서 이런 유동적 신경연결은 외적인 존재로 석화되지 않고 ‘자기 내에 머무르게’ 되죠. 두뇌는 늘 새로운 가능성을 지니므로, 이런 가능성 때문에 헤겔은 이를 ‘자기 내에 머무르는 존재das in sich selbst sein’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내 존재는 그러나 개념상 유동성을 갖는다....정신 자체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이 아니며, 여러 계기들로 구분되고, 이런 구별 속에서도 자유로운 운동 체제이듯이 그리고 그 자신의 신체를 다양한 기구로 분절화하고 그 신체의 개별적 부분을 다만 하나의 기구에게 규정하듯이...마찬가지로 자기 내 존재의 유동적 존재(곧 두뇌)는 분절화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181쪽)

물론 이것이 발전되면 의식이 나오게 되죠.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신경체제에 의식이 침잠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죠.

이어서 헤겔은 척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정신이 혹 두뇌뿐만 아니라 척수에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척수를 통해 운동이 일어나고 또 외적 자극이 척수에 전달된다는 사실(예를 들어 무조건 반사, 감정)은 일찍부터 경험적으로 발견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뇌와 척수는 운동을 조절하는 유사한 역할을 하고 따라서 척수에도 정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되죠.

헤겔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이런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만일 척수도 정신의 활동 장소라면, “정신의 활동을 일깨우거나 억제하기 위해 정신의 활동에 접근하는 또 다른 많은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181쪽), 이는 잘못이라 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다른 길’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헤겔 당시의 두뇌과학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이 문제가 논점에 비추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으니 이 길이 어떤 길인지 문제 삼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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