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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주석 C 절 도덕성(5) 율법주의자의 오만
이병창 2020.03.05 32
정신 현상학 주석 C절 도덕성(5) 율법주의자의 오만

1) 요청의 의미
앞에서 두 가지 요청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 목적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것이고(칸트의 완전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감성이 도덕 법칙에 적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칸트의 최상선). 헤겔은 전자를 즉자적인 요청, 후자를 대자적인 요청이라 합니다.

이미 말했듯이 이런 요청에 대해 도덕적 행위자 자신은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요청일 뿐이죠. 왜냐하면 한편으로 도덕이 현실에 실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도덕이 실제로 실현되면 또는 그것이 감성에 적한 것이라면 그런 도덕은 자연적인 존재이니 당위로서 도덕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욕망도 이성에 적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욕망이 이성에 적합하게 된다면 도덕적 느낌, 도덕성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선심에서 자선 행위를 했을 때 거기서 도덕의 성취라는 자부심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요청은 요청으로만, 과제는 과제로만 남아야 한다는 게 칸트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죠.

2) 추상적 도덕과 구체적 도덕
이런 두 가지 요청은 새로운 요청을 발전합니다.

“도덕적 의식은 .... 행위를 통해 순수한 의무를 다양한 경우를 지닌 현실에 관계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다양한 도덕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도덕 법칙은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를 하게 될 때는 구체적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구체적 현실은 다양한 경우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각각에게 적합한 구체적인 법칙이 필요하죠.

앞에서 추상적 도덕법칙은 주로 형식적인 도덕 법칙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외적인 현실은 도덕 법칙에 대해 무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체적 법칙은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법칙이지요.

“첫 번째 의식은(의무 의식) 순수한 의무 즉 규정된 내용에 대해 무차별한 의무를 간직한다. ..그러나 두 번째 의식은 행위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규정된 내용의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추상적 법칙에서 외적인 현실은 이제 구체적 도덕 법칙은 도덕 법칙 안으로 수용됩니다. 그것은 구체적 도덕 법칙의 내용이 되죠.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이제 의무에서 내용이라는 형식이 된다. 또는 특정한 의무에서의 특정성이 된다.”

구체적 도덕법칙에서 구체적 내용과 일반적 형식이 일치합니다. 추상적 법칙에서 도덕 법칙과 외적 현실은 대립했고 결과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구체적 도덕 법칙은 구체적 도덕 법칙 속에 외적 현실을 이미 고려했기에 이제 실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해졌습니다. 도덕 법칙과 그 현실이 여기서 통일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 세계의 지배자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의식에게 순수한 추상적 법칙만이 도덕적으로 느끼며 구체적으로 특정한 법칙은 실현가능한 것이므로 오히려 비도덕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현되기 힘들어야 도덕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도덕 의식에서는 구체적인 것은 도덕적으로 느끼지 않으므로 이 구체적 도덕법칙은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성스러운 존재인 신의 명령으로 간주되어야만 비로소 도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체적 도덕 법칙은 성스러운 도덕 법칙으로 간주되죠. 헤겔은 이런 성스러운 존재자를 “세계의 지배자, 주인”이라 합니다.

“특정한 법칙은 다만 하나의 도덕적 의식에 있을 수 있으니, 이 특정한 법칙은 앞의 것과 다른 어떤 것에 존재한다.”

“이런 의식은 이제 세계의 지배자, 주인이다....특정한 존재인 현실적 행위에서 특정한 법칙이 필수적이므로, 그 필연성은 특정한 의식을 벗어나 다른 의식에 속하게 된다.”

“행위 하는 자아는 행위 하는 자아이므로, 이 순수 의무의 타자[현실]는 직접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 순수 의무는 다른 의식의 내용이 되면면서 다만 간접적으로 즉 이 다른 의식 속에 있기에 이 행위 하는 자에게 성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신적 존재의 요청은 칸트가 도덕론의 토대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했던 것과 유사핮이다. 하지만 칸트는 최상선과 완전선, 즉 덕 있는 자가 행복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신의 존재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헤겔은 구체적 도덕이 성스럽게 느껴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신적 존재의 도덕적 의식을 가정했습니다. 앞에서 완전선, 최상선의 요청에서는 칸트와 평행하던 헤겔의 논의가 여기서는 조금 다른 길을 따라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4)은총인가 공적인가?
헤겔은 이런 신적 존재의 도덕적 의식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우선 순수한 의무만을 도덕적이라 보는 도덕적 의식은 이런 구체적 도덕 법칙조차도 심지어 신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어떤 구체적 도덕 법칙이 신의 명령이라고 보장하는 것 자체도 결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정은 율법 학자들이 예수의 새로운 복음에 대립했던 것을 보면 잘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우선 새로운 복음 즉 사랑이란 자기들의 일반적 율법에 어긋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도덕적이라 간주하지 않았죠. 예수는 자신의 복음이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했지만 율법학자는 예수의 복음이 신성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무를 고집하는 도덕적 의식에서는 구체적 도덕 법칙은 의심스러운 법칙이며, 결국 인간의 개별적인 자아에서 감각적 욕망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만일 구체적 도덕 법칙이 현실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달린 것이겠지요.

“지의 측면에서 개별 자아 자신은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지와 확신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그의 의지의 측면에서 그 의지는 감성을 통해 촉발된다. 자아의 이런 가치 없음 때문에 자아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기대할 수 없고 어떤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다만 은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구체적 도덕 법칙을 성스러운 것으로 알고 수행하는 자에게서는 그 행위가 현실에 실현되는 이유는 이것이 신의 명령이고 그가 그 신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답을 받은 거죠.

“따라서 절대적 본질은 다만 사유된 것이며, 현실 넘어 요청된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본질은 사상이고, 그 속에서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지와 의욕이 완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불완전한 의식이 절대적 본질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행복은 가치에 따라 즉 그에게 인정된 공적에 따라 분배된다.”

6) 신적 의식과 욕망하는 자아의 분열
구체적 도덕 법칙을 수행하는 자에게서 그 행위가 신의 명령인지 아니면 욕망하는 자아 사이에서 나오는지 모호할 때, 도덕의 실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문제됩니다. 그 관계는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또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구체적 도덕 법칙에서 도덕과 현실의 분열이 극복되고 통일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시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것은 구체적 도덕 법칙이 신의 명령인지 아니면 욕망인지 하는 분열입니다.

순수한 도덕 의식을 고집하는 자에게 구체적 도덕 법칙이란 의심스러운 것이며, 결국 욕망에서 촉발되는 것으로 간주되죠. 그러므로 그는 심지어 자기가 도덕적으로 느끼는 것만 즉 추상적인 도덕 법칙만이 진정한 신의 명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의식은 마침내 자신의 도덕을 신에게 강요하기에 이르죠. 그게 바로 율법주의자의 오만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체적 도덕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설정하더라도, 한편으로 그것은 관념에 불과한 순수 의무로 설정 되든가 아니면 현실적인 것으로 설정되면서 비도덕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도덕적 의식은 순수 의무를 관념으로서 설정한다..마찬가지로 도덕적 의식은 자신을 그의 현실을....지양된 것으로서 도덕성에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서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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