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칸트의 형식주의
앞의 절에서 인륜적 실체의 원리는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현실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법을 발견하려는 의식을 헤겔은 ‘입법적gesetzgebend 이성’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성이 발견한 법은 한편으로는 일반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법은 사회의 객관적 가치 곧 정의를 구현하는 법이지만 각 사회의 역사적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이런 식으로 발견된 법에서 나타나는 규정성을 본래의 법의 일반성이 실현되는 우연적인 조건(역사적 상황)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규정성을 추상한다면, 일반적인 법은 그저 형식적인 보편성만 가지게 되죠. 그것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추상적인 법이 되고 맙니다. 헤겔을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사상적 내용이 결여된gedankelose 무기력한 일반류Gattung”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법이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에서 이런 법을 추상하면, 추상적인 법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 법은 구체적 내용이 없지요. 그래서 모든 발언이 진리가 아닌 바가 없게 되며, 타인에 대한 어떤 행위도 사랑이 아닌 행위는 없게 됩니다.
법의 일반성을 확립하는 데에 이런 추상의 방법과 다른 새로운 방법이 가능합니다. 그 방법은 선험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죠. 바로 칸트가 시도했던 방법입니다. 헤겔은 이런 방법을 ‘검증하는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어떤 구체적인 준칙이 형식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면, 법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방법입니다. 형식적 무모순성이 법을 규정하는 선험적 원리가 된다는 거죠. 보편성이라는 것이 “특수성과 관계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위력이나 진리로서 여겨지는” 형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검증하는 이성의 선험적 원리로서 무모순성은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적인 합의 절차를 의미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알다시피 존 롤스는 합의론적 정의론을 전개하면서 칸트의 선험적 구성의 원리를 끌어들여 이를 민주주의적인 합의 과정으로 재해석했죠. 사실 칸트의 경우 선험적 원리는 <그 법이 적용되는 모든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롤스는 <그 법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으로 재해석했기에 엄밀하게 칸트적 원리를 지키는 것인가는 의심스럽지만 넓게 본다면 롤스적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2)무모순성의 원리
검증하는 이성에서 검증이란 곧 개별적인 준칙과 일반적인 형식(무모순성) 사이의 비교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비교는 앞에서 입법적 이성에서의 비교와 구별됩니다. 그때 법의 특수성이 추상되고 무내용적인 형식적 보편성이 획득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검증은 어떤 특수한 내용이 자체 내에 모순을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검증합니다. 즉 어떤 내용이 어떤 경우에 적용되었을 때와 다른 경우에 적용되었을 때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런 검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편자는 존재하면서 타당한 실체이거나 즉자 대자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다만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단순한 지식이나 형식을 말하며, 이런 지식과 형식은 내용이 동어반복적인지 아닌지를 고찰한다.”(232쪽)
여기서 검증되는 특수한 법은 일정한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법입니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준칙에 해당되죠. 이 존재하는 준칙은 객관적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죠. 그런데 이런 준칙이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서 무모순성이 입증되면 비로소 객관적으로 타당한 법이 되죠. 그것은 마땅히 지켜야할 법으로서 자격을 획득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롤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칸트에게서도 이성적 형식은 단순히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가치를 승인하는 절차라는 종속적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형식적 절차는 그 형식이 보편적이므로 객관적 가치는 이 형식을 통해 비로소 출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헤겔이 형식이 “특수성을 지배하는 위력”이라 말할 때, 이런 의미가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법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당연히 절차적 과정 자체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런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절차가 불공정하다는 말이 되고, 이 경우 결과적으로 발견된 보편적 법칙은 즉 무모순적 법칙은 진정으로 무모순적이라 볼 수 없으니, 법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되겠죠.
이런 의미에서 롤스는 공정한 절차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공정한 절차를 구성하는 데로 나가기보다 차라리 이런 검증이 정말 가능한가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물어봅니다.
3)소유의 법
헤겔은 이런 비판적인 검토를 위해서 <소유가 존재한다>는 법을 예로 듭니다. 헤겔은 이 법을 <단순한 규정성으로서 볼 때>와 <그 속에 내포된 계기들을 분석해 볼 때>, 두 경우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우선 단순한 고립된(eine isoliert) 규정으로서 소유라는 개념 자체에는 모순이 없으니, 이것은 법으로 성립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소유설Nichteigentum’, ‘무주공산설(Herrenlosigkeit der Ding)’, 또는 ‘주은 자가 임자라는 주장’이거나 ‘재산공동체설’, ‘필요에 따른 분배설’, ‘평등 분배설’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주장합니다. 하나의 고립된 규정으로 볼 때, 그 어느 것도 모순이 없다는 거죠.
그러나 이런 다양한 소유를 그 내부에 내포된 계기를 분석해 본다면, 그 어느 경우에도 모순이 출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무주공산설’을 보죠. 물건은 단순히 쌓아두는 것이 아니고, 사용가치를 갖는 대상인 한에서 결국 누군가가 이를 소유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무주공산설은 물건이 본질적으로 지닌 사용가치와 모순되죠.
그러므로 무주공산설을 절대적으로 무소유라고 보지 않고, “필요한 자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자가 여럿 존재한다고 한다면, 필요한 자란 우연히 그 물건에 손이 닿은 자로 한정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필요한 자는 우연히 그런 물건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단순한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상 어느 때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필요를 충족시킬 가능성이 우연에 의존한다면, 그의 생존 자체가 우연적이니, 이런 생존의 우연성은 생존의 필연성과 서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무주공산설에 한정하여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이런 유사한 논의는 재산공동체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겔은 재산공동체설의 경우에도 결국 분배해야 하는데, 이런 분배는 필요에 따라서 분배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무주공산설과 똑같은 자기모순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적어도 소유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모순은 없을까요? 헤겔은 이 역시 그 속에 내포된 계기를 분석해 본다면 결국 모순에 부딪히고 만다고 합니다. 헤겔은 소유의 모순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소유의 대상이 되는 물건은 한편으로는 사용가치를 지니고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용의 측면에서 타자는 나의 소유를 인정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은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소유란 점유와 달리 타인이 나의 소유를 인정하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유라는 개념 속에 이미 다른 모든 타자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나는 물건 속에 타자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타자를 인정하고 있으니 자기 모순적이라는 거죠.
더구나 소유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물건은 사용가치를 지니는 것이니 사용에 의해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유물은 일반적인 존재물이므로 축적이 가능합니다. 헤겔은 이 두 성격 역시 서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제 이런 논의에서 헤겔의 결론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죠.
“소유이든 비소유이든 이런 규정성들을 단순하게 표상하고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그 규정성들은 이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마찬가지로 단순하며 즉 모순적이 아니다. 이성이 그 자체에게 적용하는 법칙의 척도는 모든 규정에 마찬가지로 잘 적용되며 따라서 사실상 이 척도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
결국 무모순성이라는 형식적 원리만으로 객관적으로 타당한 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헤겔은 ‘무모순성’이란 원리를 인식의 형식적 기준으로 볼 때, 진리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검증하는 이성이 실천적 진리의 경우에 이런 형식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것은 매우 ‘기묘하다sonderbar’고 말합니다.
4)법의 인식 가능성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타당한 법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걸까요? 헤겔은 이상에서 두 가지 방식 즉 ‘법칙발견(제정)적 이성’과 ‘법칙검증적 이성’을 검토했습니다. 전자는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후자는 형식적 무모순성에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두 계기를 각각 고립적으로 본다면, 법칙발견적 이성이 발견하는 법은 현실적인 법이지만, 각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죠. 이것은 “현실적 법의 부당한 제시이며 존재”입니다. 반면 법칙검증적 이성처럼 이성의 형식적 무모순성에 의존할 때, 그것은 법의 현실성을 무시하게 되죠. 즉 “현실적인 법으로부터의 마찬가지로 부당한 해방”이 됩니다.
이렇게 우연의 법을 현실적인 것으로 강요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의를 실정법으로 삼는 독재자의 불법”이 될 것이며, 형식적 무모순성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법의 타당성을 무시하면서 “부동하는 것을 운동시키는 것”이 되며, 이는 “지식의 불법”이 될 것입니다.
“의식은 그런 계기들을 여전히 고유한 직접성의 형식 속에서 받아들이니, 이 계기들은 한 개인의 의지와 지에 머무르거나 또는 비현실적 명령의 당위나 형식적 일반성에 대한 인식에 머무르게 된다.”(235쪽)
그런데 이 두 가지 방식은 그 각각으로 본다면 한계가 있지만, 양자를 종합적으로 사용한다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계기라고 말합니다.
“법칙발견과 법칙검증이 무의미한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가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인륜적 의식을 지탱할 수 없는 계기들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이 두 계기가 출현하는 운동은 이를 통해 인륜적 실체가 의식으로 현현한다는 형식적인 의미를 가진다.”(234쪽)
헤겔은 이 두 계기가 모두 필요하고 종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계기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인륜적 실체가 의식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두 계기를 종합적으로 사용하는 의식을 헤겔은 ‘성실성Ehrlichkeit’이라 말합니다.
“이 두 계기들이 사상 자체에 대한 의식의 더 세부적인 규정들인 한에서, 이 계기들은 성실성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형식들은 그 이전에 형식적 계기들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선과 법의 존재해야 하는 내용과 그리고 고정된 진리의 검증과 관련되고 있으며, 건전한 이성이나 합리적인 통찰에서 명령의 힘과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성실한 의식은 앞에서 사상자체가 출현하는 때 다루어졌습니다. 시장적인 교환을 모델로 한 사회에서 출현하는 것이 성실한 의식이었습니다. 헤겔은 성실한 의식은 주관적으로 판단한 가치가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의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이 출현하는 성실한 의식은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입니다.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이죠. 헤겔은 이런 ‘성실한 의식’을 ‘순수한 의지’라고 말하거나 ‘인륜적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5)현상에 대한 동태적 분석
생각해본다면, 결국 법의 인식에 관한 헤겔의 요구는 두 가지입니다. 법의 역사성과 법의 민주성이죠. 법은 우선 역사적인 겁니다. 이미 객관적으로 법이 존재한다는 거죠. 즉 이미 효력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효한 법은 아직 직접적으로 눈에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죠. 법은 인식에 감추어져 있지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독특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재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본질이 현상에 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 본질은 항상 현상 너머에 있으므로, 우리는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또 다른 내재성이 있습니다. 그 내재성은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가상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외재적 현상의 자기부정, 파국을 통해서 표현되는 내재성입니다.
이런 파국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상과 내재성 사이의 차이가 점차 강화, 심화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죠. 이런 경향성이 최종적으로 폭발한 것이 파국입니다. 따라서 파국에서 출현한다는 말은 현실 속에 내재하는 부정적 경향성을 통해 출현한다는 말이 되겠죠. 사실 최종적 파국은 항상 연기됩니다. 다만 부정적 경향성만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죠.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는 가치의 객관적 원리가 시장을 통해서 이미 형성되었죠. 이미 이 객관적 원리가 유효하게 작동하죠. 하지만 상품의 현재적인 시장가격이 이런 객관적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품의 시장가격은 항상 이런 객관적 가치로부터 분리되죠. 그러므로 이 가치의 객관적 원리는 유효하지만, 내재적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은 항상 시장 가치와 분리되어 있지만, 그 덕분에 공황이 생겨나게 되죠. 공황이라는 파국적 상황을 거쳐 상품의 시장 가격이 조정되어 객관적 가치에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공황은 이미 현상 속에 축적되는 괴리가 출현하는 것이므로, 현상 속에 파국의 경향성을 통해 상품의 객관적 가치가 출현하고 있죠. 법의 내재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내재성입니다. 감추어져 있지만 현상의 자기부정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내재성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파국은 언제나 연기되고 결국 남는 것은 파국으로의 경향성 뿐이죠.
그렇다면 이런 내재적 법칙을 우리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현상을 넘어서 초월적인 본질이라면 우리는 이런 본질에 영원히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헤겔적인 내재성, 즉 현상의 자기부정성, 파국의 경험이라면 우리는 접근 가능합니다. 이 접근은 현상의 운동적인 경향성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죠.
현상에 대한 정태적 분석과 현상에 대한 동태적 분석이 구분됩니다. 현상에 대한 정태적 분석에서 내재적 본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상의 동태적 과정을 본다면 그 과정 속에서 현상을 지배하는 객관적 원리가 드러나게 되죠. 자본주의에서 가치 법칙은 시장의 동태적 분석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헤겔이 말하는 객관적 원리로서 법은 바로 이런 동태적 분석에 의해 드러나게 되죠.
이런 동태적 과정은 다시 민주주의의 과정과 비교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앞에서 검증적 이성의 무모순성을 민주주의의 합의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합의란 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민주적 법은 주관적 당위를 낳을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주관적 욕망에 기초하고 있으니 현실적인 합의는 불가능하며, 합의는 항상 주관적 당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반면 민주주의를 동태적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동태적 과정에서 민주주의란 두 세력의 대결의 과정입니다. 이 두 세력의 대결은 결국 현실 속에 존재하는 외재적 현상과 내적 원리 사이의 갈등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합의 과정을 정태적인 분석이 아니라 동태적 과정을 통해서 분석해 본다면 현상을 지배하는 내재적 원리가 밝혀지게 되죠. 민주주의를 이렇게 평면적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6)순수의지와 절대적 의식
법의 유효성과 동태성이라는 이 두 가지 요구를 헤겔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즉 헤겔은 법은 “즉자 대자적이며, 즉 모든 사람의 절대적인 순수의지이며 직접적인 존재의 형식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또한 이런 순수의지는 존재해야 하는 명령 즉 ‘추상적 당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면서 타당한 것’(“ist und gilt”)이라 합니다.
즉 법은 한편으로 이미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하면서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순수의지’를 통해서 발견됩니다. 이 ‘순수의지’란, 현상적인 의지가 아니라 내재하는 의지입니다. 내재적이지만 유효하려면 그것은 정태적 과정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태적인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헤겔은 ‘순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의 자의적인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또는 각 개인의 민주적 합의에서 보는 것처럼 주관적 의지의 추상적 종합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넘어서는 객관적인 의지입니다만 이미 주관의 내적인 본질과 합치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지는 자기의식적이죠. 그래서 헤겔은 법을 “고유한 절대적 의식이 지니는 사상”입니다. 또는 추상적 당위와 구별되는 인륜적 의식이라고 말하죠.
이렇게 객관적인 법의 원리를 발견하는 ‘순수 의지’라든가, ‘절대적 의식’이라는 개념은 신앙이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보이는데, 헤겔은 이를 ‘신앙’이라는 것과 구분합니다. 신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원리를 <표상의 방식>으로 즉 초월적인 대상으로 경험하는 의식입니다. 이런 신앙에게서 초월적인 존재는 영원히 다가가지만 결국 다가갈 수 없는 초월 속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나 내재적 법의 원리를 발견하는 인륜적 의식은 동태적 과정을 통해 알려지며, 자기와 본질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법의 일치를 이루는 자기의식적인 의식입니다.
“인륜적 의식은 그의 자아의 일반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본질과 일치한다. 그에 반해서 신앙은 개별적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앙은 개별적 의식이 이런 통일에 끊임없이 다가가지만 그 본질의 현재에 도달하지 못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인륜적 의식은 개별자로서 자기를 이미 지양했으며 이런 매개는 이미 수행되었고 이 매개가 수행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그것은 인륜적 실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자기의식이 된다.”(235쪽)
7)법의 객관성
순수의지에서 자기의식과 본질, 주관적 가치와 객관적 법은 서로 합일합니다. 그런데 법은 구체적인 상항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법칙발견적 이성은 이때 나타나는 차이를 외적인 상황에 의존하여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결과 법칙발견적 이성은 차이를 제거하고 추상적인 법의 원리에 이르지만 이는 내용이 없는 무의미한 일반성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제 순수의지, 인륜적 의식에서는 법의 차이라는 것은 법의 본질이 그 스스로 전개하는 차이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수의지, 인륜적 의식에게서 법은 추상적인 일반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인 법으로 나타납니다. 즉 법의 차이란 법의 본질이 동태적인 과정을 통해서 운동할 때, 어떤 단계에서 드러나는 법의 형태라는 것이죠.
“이런 차이는 분절화되면서도 그 가운데 생명성이 관통하는 집합체이며, 스스로에게 명료한 비분열적인 영혼들이며, 차이 속에서도 신성모독을 모르는 순진무구함과 그 본질의 합심을 유지하는 흠결 없는 천상의 형체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차이를 주관이 어떤 상황에 의존하는 우연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이는 주관을 절대시하고 이런 차이를 상대화하는 것이므로, 헤겔은 이를 주관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륜적 의식은 법을 동태적인 것으로 파악하므로, 이런 법의 차이는 동태성의 양상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주관이 오만을 범하지 않으며, 법 자체에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이며, 모든 주관적인 상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법의 객관성 그리고 법의 유효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 법을 역사적 현실 속에서 발견하려는 시도나 법을 주관의 형식적 무모순성에서 구성하려는 시도는 법의 본질을 위배하는 것입니다만, 거꾸로 본다면 이 두 계기는 법의 두 계기를 표현합니다. 법의 유효성은 법의 역사성에서 나옵니다. 법의 무모순성이란 형식은 내재적 법을 발견하는 동태적인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떤 것을 자기 모순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것이 법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법이므로 그것은 법이다.”(236쪽)
법은 그 자체로서 자기를 정당화한다는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출현한 현실적인 법의 무조건적인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헤겔에게서 법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미 내면적으로 출현한 것입니다. 법이 이런 내면적 존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으로 보입니다.
“법이 즉자 대자적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체Ich는 인륜적 실체 속에 존재한다. 인륜적 실체가 자기의식의 본질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은 인륜적 실체의 현실성이며, 그 현존이고, 그것의 자아이며 의지이다.”(237쪽)
이상에서 이성 장에 대한 전개는 끝났습니다. 헤겔은 이제 정의의 객관적 원리를 인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관과 객관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일치하게 됩니다. 즉 구체적인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죠. 그러나 지금까지는 인식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헤겔은 실천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론적 이성이 실천으로 넘어가면서 정신이 됩니다. 정신의 장에서는 실천적 의지가 과연 객관적 정의의 원리를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자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라든가 “햄릿은 인식은 갖고 있지만 의지는 없다”고 말하는데 이제 정신장은 이런 이론과 의지의 괴리를 다룬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