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철학으로 세상읽기] 서로 다른 체제는 공존이 불가능한가
이순웅 2009.10.01 1054
서로 다른 체제는 공존이 불가능한가?  
[철학으로 세상읽기]흡수통일론은 제로 섬 게임

2009년 10월 01일 (목) 09:02:05 이병수 경남대 연구교수  webmaster@mediaus.co.kr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런데 현 정권의 대북정책이 지난 정권과 가장 다른 특징은 흡수통일을 공공연히 거론한다는 점에 있다. 지난 정권은 비록 흡수통일의 속내는 있었을지언정 북한 체제와 이념을 존중하는 포즈를 취했다. 북한 정권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남북 쌍방은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속내에 간직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공공연히 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올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을 선언함으로써 흡수통일의 속내를 전 세계를 향해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또 얼마 전 보수 진영의 한 이론가는 북한의 장점과 남한의 장점을 아우른 제3의 체제란 종교적 관념적 수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북한의 수령 절대주의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중간이란 없다고 확신에 찬 발언을 하였다.

흡수통일의 공공연한 천명은 남북의 대화와 화해를 부정하겠다는 말과 같다. 만약 북한 정권이 적화 흡수통일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면, 과연 남한 정권이 북한 정권을 대화의 상대로 볼 것인가를 자문해 보면 명백하다. 더욱이 남한에 비해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는 북한의 처지에서 보면, 남한 정부의 공공연한 흡수통일 선언은 단순히 분노를 넘어 체제 위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2000년 6.15 선언 이후 남북 사이의 경제적  사회문화적 교류는 꾸준히 증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군사적 신뢰는 여전히 과거 냉전 시대에 머물러 있다. 남북 사이의 실질적인 군비축소를 위한 대화와 협상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한 정권의 흡수통일 천명은 지난 경제적 ․ 사회문화적 교류를 무위로 돌리는 한편,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을 불러와 전쟁의 가능성마저 높이는 위험천만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남북 관계는 체제 선택이 되는 즉시, 양자 사이의 제로 섬 게임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북의 평화공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사회과학적 검토와 이에 바탕을 둔 일관성 있는 정책적 대안의 제시가 무엇보다 시급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원하게 여겨질지라도 남북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행위주체들의 인식과 삶의 태도에서 질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인문적 성찰 역시 절실하다. 어떻게 적이 아닌 동반자로서 북한과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

한반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오랜 기간 동안, 그것도 배타적이고 치명적일 정도도 지속되어온 대표적 지역이다. 60년이 넘는 체제의 골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국가를 한반도에 세워 놓아 이념적 적대를 부추겨왔다. 또한 탈냉전 이후 북한의 체제 위기는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좌로 여겨졌다. 흡수통일론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이렇듯 냉전 시대의 이념적 적대와 90년대 이후 북한의 체제위기라는 분단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념에 따른 대립을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북한은 실패국가이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특히 흡수통일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이들은 북한을 동족이 아니라 적으로 느끼는 배타성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와 이념을 존중하자는 말은 곧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즉 대한민국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대한민국을 대한민국답게 만드는 본질적 요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근본이념을 부정하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의하면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은 북한의 체제와 이념을 인정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다. 흡수통일론자들이 2000년 6.15선언을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뒤흔든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6.15선언에서 표명된 북한 체제와 이념의 존중이 곧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인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가? 북한에 대한 인정이 곧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부인한다는 논리는 북의 인정이 곧 남의 부정이라는 배타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이분법은 차이의 인정이 다른 견해에 대한 동의와는 다르다는 기본적 상식을 위배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배타적 이분법이야말로 오히려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를 민주화의 맥락이 아니라 오직 반공의 맥락에서만 이해한다. 이들은 그 동안 사상, 언론, 양심의 자유를 확장해온, 그리고 남북 화해와 평화공존을 부단히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헌법적 이념 속에서 배제하려고 한다. 민주화와 남북화해가 진전되면서 이에 부정적 입장을 지닌 이들이 내건 표어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데서도 이는 입증된다. 지난 시절 동안의 민주화를 향한 실천적 노력과 결실을 뺀 채 이야기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결국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와 미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상호인정의 진정한 의미

지난 2000년,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는 형태의 통일을 약속했다. 사상과 제도를 초월해 남북이 교류와 소통을 통해 체제 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막고 평화공존하면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지향하자고 약속했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입씨름은 굳이 필요가 없다. 자유민주주의적 통일과 사회주의적 통일을 말하는 즉시 서로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체제 문제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해서 남북 쌍방이 흡수통일의 속내를 진심으로 버렸다고는 보기 힘들다. 서로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믿으면서 상대방이 변화하여 자기 체제로 동화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위선적이라고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까지는 없다. 전쟁의 위험을 막고 평화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현실적인 방안이기 때문이다. 원래 차이의 인정이란 견해의 대립이 전쟁과 같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만드는 ‘평화의 장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잘못된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만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러한 방식이 진정한 의미의 인정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남북 사이의 진정한 인정은 상호 정체성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남한 자신을 변화시킬 의지가 없는, 북한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다. 남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분단구조 속에서 이루어져 온 남한의 생활방식에 대한 성찰과 변화의지가 없이 북한에 대한 인정이 진정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호인정의 진정한 의미는 상대를 자기와 동일화하려는 유혹을 극복하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변화시켜 나가는 데 있다. 오늘날 북의 사회주의 현실과 남의 자본주의 현실이 누구나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인간다운 공동체의 모델에 비추어 함량미달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남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의 전망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좁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남과 북의 화해와 교류, 나아가 통일은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방향성, 남북한 사회 자체를 좀 더 민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생태적인 사회로 만들려는 방향성을 지닌다. 지금의 남북한보다 더 우월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한 지식인이라고 해서 남한에 익숙한 관점을 긍정할 것이 아니라, 장차 통일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전망을 펼치는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남한 자본주의 혹은 북한 사회주의를 준거로 하기보다 남북의 미래지향적 통일사회를 준거로 삼아 남북을 보는 입장이 타당하지 않을까? 누군가 말했듯이 분단시대를 살면서도 통일시대를 사는 것 같은 사상적 포즈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사회와 삶의 방식에 대한 결의

분단의 고통은 비단 이산가족의 아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생활세계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골육상쟁의 참화 말고도 자유와 인권의 제약, 민족자존의 손상, 반세기 이상 지속된 정신적 동맥경화, 군사‧외교적인 경쟁과 체제수호를 위해 소모해야 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분단비용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분단 역사를 전제로 놓고 보면, 남북의 대화와 소통 노력은 숱한 갈등과 동일화의 유혹을 극복하는 험난한 길,  희망을 약속하기보다 차라리 고통스런 짐에 가까울 것이다. 전쟁의 체험과 이념 대립이 빚은 적대감과 증오, 생활양식과 가치관 등 문화의 격차와 갈등은 통일 전이나 통일 후를 막론하고 우리 삶의 불편함과 부담으로 계속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편과 부담을 견뎌야 하는가? 이는 원래 같은 민족이므로 합쳐야 한다는 단순 발상을 넘어,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적 결의와 관련된다. 우리는 20세기 전반기에 제국주의 시대를 또 20세기 후반기에는 냉전시대를 살아왔다. 그리고 21세기 우리의 삶 속에는 20세기 제국주의와 냉전의 유산이 강력한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기를 희망하며, 또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20세기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있는가? 지금의 남북한 사회, 삶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바란다면, 낯설고 싫은 상대와의 공존과 화해 그리고 소통노력은 견뎌야 할 짐인 동시에 희망을 향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