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자유주의는 왜 국가적 폭력에 기생하게 되었는가?
이병창 2013.10.03 262
자유주의들은 왜 국가적 폭력에 기생하게 되었는가?



1.히피의 자유주의

언젠가 K. H(미안하지만 이름은 생략하겠다)라는 문화평론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관여했던 어떤 연구소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그의 얘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컴퓨터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면서 퍼즈널 컴퓨터라는 것이 미국 서부 히피 정신에서 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난하고 애플을 찬양했다. 애플이 히피 정신의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K. H는 6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히피 정신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중에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관한 질문이 그에게 던져졌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은 미국의 의무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미국이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인가? 히피 정신을 배운 그가 그렇게 단호하게 국가적 폭력을 옹호하는 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히피주의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를 그토록 고양시켰던 정신이 아닌가? 히피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고 모든 일은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해결되었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의 전범이 있다면 그게 바로 히피라 하겠다. 그런 히피가 어떻게 해서 국가적 폭력을 옹호한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니 히피에는 흑인이 없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히피의 마지막 음악축제가 결국 백인 히피가 흑인 히피를 살해하는 것을 통해 끝났던 역사를 상기해 보라.



2.진중권의 자유주의

자유주의자들이 국가적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이 땅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가장 잔인한 말이 곧 종북주의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빨갱이로 몰아서 처단했던 반공보수가 만든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다름 아닌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말이다. 그 원조가 누군지 몰라도 이 말을 퍼뜨린 자는 자유주의자 진중권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그들이 악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자유주의가 기꺼이 국가적 폭력을 환영한다는 것은 자유주의자 진중권의 최근 말 속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최근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검찰이 이 사건 피해자들을 기소하였을 때, 증거는 달랑 의심스러운 녹취록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를 평가하면서 이런 녹취록뿐이라면 내란음모로 피해자들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그는 국정원과 이석기 의원이 공생관계라고 말했다. 조작과 탄압을 일삼는 국정원이 있기에 이석기나 진보당과 같은 투쟁적 혁명가들이 출현하는 것이며 거꾸로 이석기나 진보당과 같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국정원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말은 바로 이 뒤의 말이다.



국정원이 정당화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석기나 진보당에게는 국정원의 조작과 탄압도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말에는 제발 국정원이 나서서 이석기와 진보당을 을 제거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 들어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갈망은 마치 현실에서 대중들이 그렇게 요구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천만 번을 양보해서 이석기나 진보당이 잘못된 진보라 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라도 그것은 진보의 내부에서의 차이이다. 그들은 파렴치범도 아니며 독재자 편에 서서 자유주의자들을 한번이라도 탄압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민주 진보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고난의 투쟁에 함께 나섰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과 대립된다고 해서, 심지어 자신이나 진보의 발전에 방해된다고 해서 조작과 탄압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너무나 태연히 국정원이 그런 사람들을 제거해 주기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다.



3.자유주의의 전락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 평화주의라 한다. 반전 시위대를 막아선 경찰들의 총구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면서 꽃을 꽂아 주던 히피야 말로 자유주의자들의 표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국가적 폭력을 갈망하는 것일까? 왜 이들은 자신의 반대파의 피를 요구하는 것일까? 평화주의자의 이런 전락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전락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철학적 관점들이 도입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관점 중의 하나로서 자유주의의 논리 내에서 타자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자유주의자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그는 타자를 처음에는 막연하게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 본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메리카노야 다방 커피냐 하는 차이일 뿐이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야. 내가 자유를 욕망하듯이 그 역시 자유를 욕망하지. 자유란 보편적 가치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처음에 너무나도 관대하게 말한다. 차이를 인정하자. 그리고 서로 대화하자. 그리고 합의하자.



실상 이들의 관대함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관대함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곧 자기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에 부딪히게 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슬람 종교적 독재에 부딪힌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북한의 세습에 부딪힌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낯선 타자에게 강제적으로 투사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이슬람 국가와 북한의 국민들은 독재자의 억압에 의해서 자신의 근본적인 욕망을 말도 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억압된 국민들을 자기가 대변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판단하는 독재자에게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슬람이나 북한의 통치자들이 독재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하고자 하지 않는다. 문제는 독재자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개념틀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의 개념틀이 모든 나라에서 유효한 틀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을 보자. 자유로운 선거는 있지만 수십 년간 자민당의 집권이 이어지는 나라는 독재국가인가 아닌가? 중국을 보자. 중국은 일당독재를 표방하는 나라이다. 정치적 자유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중국을 독재국가로 비난하지 않는다.



4.

문제는 이렇게 자유주의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에 부딪힐 때 자유주의자들의 심리이다. 그들은 낯선 타자에 부딪히게 되면 곧 이어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심연 앞에서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섬뜩한 두려움은 두 가지 조건에 부딪히면 폭발적으로 증폭한다. 하나의 조건은 사회의 구조적 붕괴가 발생한다는 조건이다. 이런 붕괴는 사실 그 사회 구조에 내재하는 대립으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지만 평소에는 잠재적이어서 눈에 띠지 않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이 누적되면서 마침내 폭발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붕괴가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의 시장의 불균형이 축적되어 마침내 공황으로 폭발하는 경우이다.



바로 이런 경우 구조적 붕괴는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므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외적인 적대 세력의 침투라는 가설이 도입된다. 다시 말해 내적 원인의 외적 원인으로의 전치이다. 나치즘이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유대인의 음모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 이런 전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조건은 낯선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낯선 타자는 섬뜩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낯선 타자에게서 조그마한 위협적인 징조가 출현한자고 하여 보자. 이런 위협적 징조는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실제적인 위협으로 증폭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만나게 되면 외부의 조그마한 위협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험으로 느껴진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의 증오감은 폭발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출발점이 평화였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차이를 인정하자는 그들의 근본입장조차 망각한 채 ‘적들에게 죽음을’이라는 목쉰 절규를 외치는 것이다. 이제 국가적 폭력이든 나치적 폭력이든 무엇이든 적들만 제거한다면 기꺼이 환영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이 낯선 타자 앞에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의 원인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성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제한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선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식과 이성을 벗어나는 반성이 필요하다. 이런 반성이 곧 진리를 향한 추동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 진리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부정 변증법의 반성적 진리는 가능하다. 이런 진리, 반성적 진리, 부정 변증법의 진리에 기초하는 민주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