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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루저와 위너, 그리고 사회적 약자
이순웅 2009.12.12 1014
루저와 위너, 그리고 사회적 약자  
[철학으로 세상읽기]

2009년 12월 11일 (금) 15:21:51 구태환 상지대 강사  webmaster@mediaus.co.kr  

최근 ‘루저녀’ 사건이 인터넷 공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영방송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대생이 “나는 신장 180cm 이하의 남성을 루저라고 생각한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사건이 커지자 그 학생은 주어진 대본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확산된 많은 남성 네티즌들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심지어 그 학생의 신상정보를 찾아내 인터넷 공간에 낱낱이 공개하기도 했다.
  
철학을 공부하는 동료들과 담소하던 중 이 사건이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런 것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우리 여성들은 늘 당해온 일이야” 남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젊고 예쁘고 날씬한 여자는 뭘 하건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던 남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강자인 남성들이 지금껏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저질러온 죄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들이 사회적 강자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러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남성들이 자신보다 더 약자인 여성들을 희롱해오다가 이제 그 희롱이 자신에게 가해지자 발끈한 것이다.

‘loser’의 사전적 의미는 손실자, 실패자, 패자이고, 그 반대말은 획득자, 이득자, 승자를 뜻하는 ‘gainer’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신장 180cm 이상의 남성들이 스스로를 ‘winner’라고 한다고 하니, 아마도 이 사건에서 ‘루저’는 게임에서의 ‘패배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특히 사회적 게임에서의 패배자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을 갖지 못한,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기회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의 그것과도 겹친다.

이 사건의 핵심은 ‘신장 180cm 이하’가 아니라 ‘루저’에 있다. 네티즌들이 분노한 것은 그 학생이 “키가 작은 남자는 싫다”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키가 작은 남자는 실패자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루저’를 양산하는 사회

‘루저’ 발언이 이처럼 파장을 일으킨 데에는 자신이 사회적 실패자일 수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루저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가 사회적 강자임을 자신하는 사람은 이처럼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의 여성들처럼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인지한 사람 역시 이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네티즌들의 과민 반응은 자신이 사회적 패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싫은 심리 상태를 드러내준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런 심리 상태를 조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이다. 그리고 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한 사람이 받는 임금의 양은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 ‘인간 홍길동’은 ‘연봉 3000만원 받는 사람’으로 대체된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성적, 대학은 연봉에 직결되는 요소로서, 이 역시 수량화되어 개인을 대체한다. ‘인간 홍길동’은 ‘전국 석차 1000등인 학생’, ‘수능 380점 이상이어야 합격 가능하고 졸업 후에는 3000만원의 연봉이 보장되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대체한 수량을 통해 타인과 비교되며, 순위가 매겨진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TV에서는 선남선녀들이 나와서 ‘위너’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구매하면 나 자신도 ‘위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위너’의 삶은 그가 소비하는 상품으로 상징되며, 그러한 상품을 소비하느냐 못하느냐가 개인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 홍길동’은 ‘200만원짜리 수트를 입은 사람’, ‘5000만원짜리 차를 소유한 사람’으로 대체된다. 여기에서 ‘신장 180cm 이상’이라는 기준은 지극히 사소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TV에서 보여주는 ‘위너’처럼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은 ‘위너’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즉 자신이 ‘루저’가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루저’임을 인정하기는 싫다. 그리고 대중 매체는 사람들이 ‘루저’임을 인정하고, 그대로 주저앉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TV 속 ‘위너’가 사용하는 상품을 소유하거나 소비하면 ‘위너’의 삶 전체를 가질 수 있다는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과는 걸맞지 않은 턱없이 비싼 명품 가방을 구입하며, 그도 안 되면 ‘짝퉁’이라도 구입한다. 그들은 점차 ‘된장남(녀)’가 되어 간다.  

공정한 게임은 애초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된장남(녀)’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된장남(녀)’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라고, 명품을 사라고 꼬드긴 것은 현 사회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위너’다. 소비량의 증가는 시장을 장악한 이들의 배를 채워준다. 그런데 어째서 과도한 소비를 조장한 ‘위너’가 아니라 그들의 꾐에 넘어간 ‘된장남(녀)’를 욕하는지 모르겠다. ‘된장남(녀)’를 그렇게 만든 ‘위너’는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왜일까? 많이 가진 자가 더 가지기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를 좋다고 할 자는 없는데 말이다. 혹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적 게임에서 승리한, 그야말로 ‘위너’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과연 게임이 있기는 했는지, 그리고 그 게임이 공정했는지가 의심스럽다. 게임이 치러지고 나서야 승자와 패자가 나뉠 수 있고, 그 게임이 공정했어야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이 있었는지 여부를 길게 따질 것 없이 하나만 묻자. 부모의 재산이 자손에게 상속되는 것이 인정되는 현 사회에서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겠는가?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가 한 인간의 삶을 바꾸다시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에 가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춰줄 부모를 가진 아이와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흩어지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 사이에 공정한 게임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사준 고급 승용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과 학비와 가족 생계비를 책임져야 하는 학생 사이에서 이뤄지는 게임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사이에서 공정한 게임이란 없다. 이런 게임은 무의미하다. 많은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도 전에 이미 ‘루저’로 결정되어 있었으며,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위너’가 될 수 없다. ‘위너’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회 성원 대부분은 ‘위너’가 미리 정해진 게임에 내몰려있다. 그처럼 승자가 이미 정해진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이고, 불공정한 게임은 당연히 무효다. 이러한 무효인 게임에서의 ‘위너’는 위너가 아니고 ‘루저’는 루저가 아니다. 불공정한 게임장인 현 사회에서 ‘위너(승자)’와 ‘루저(패자)’는 없다. 다만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는 게임에서 진 ‘루저’가 아니라 불공정한 게임의 피해자이다.

사회적 약자의 약하지 않은 삶

사회적 약자가 사회적 강자를 부러워하여 그들의 소비 행태를 모방한다고 해서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처럼 많은 임금을 받겠다고 노력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그들의 수입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사회적 약자가 사회적 강자의 삶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삶과 닮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적 강자의 삶은 더욱 부유해지고 사회적 약자의 삶은 더욱 가난해진다.

현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는 사회적 약자다. 그런데 그 사회적 약자 사이에도 층차가 있다. 그들 사이에도 정치적, 경제적 힘의 차이가 엄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침해는 그보다는 힘이 있지만 그 역시 사회적 약자인 사람에 의해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바로 옆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과 어울리기 싫다고 담장을 친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한참을 돌아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이것은 내게 채워져 있던 수량화라는 족쇄를 다른 이에게 채우는 행위다. 내가 사회적 약자임을 보여주는 족쇄를 말이다. 하지만 이 족쇄가 언제 다시 내게 돌아올지는 모른다. 그 30평짜리 아파트 주민의 아이들이 새롭게 들어서는 고급주상복합건물에 사는 주민들에 의해서 똑같은 경우를 당할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는 게임에서의 패배자가 아니라 불공정한 게임의 피해자다. 그들은 자신을 사회적 약자로 만든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고쳐야만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는 수량화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더 나아가 그 족쇄를 폐기하고, 다른 가치에 눈떠야 한다. 인간에게는 본래 수량화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가치에 눈뜬다면, 추운 겨울날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갈 곳 없는 이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양 과다를 걱정할 때 밥 굶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무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살던 집에서 내쫒은 이와 “학교가 무료급식소냐”고 외치며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급식 예산을 삭감한 이들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과 연민이라는 가치에 눈뜨고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사회적 약자들을 진정한 ‘위너’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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