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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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 4강 이성의 도착
이병창 2015.08.31 83
다시 헤겔로 4강 9월1일

1)객관적인 관찰과 경험
이성의 개념은 상호 인정, 다만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상호 인정에서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이성의 운동은 이런 형식적인 인정에서 내용적인 상호 인정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발전과정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곧 전적인 실재성이라는 확신이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죠.

“오히려 처음에는 전적으로 실재적이라는 확신에 불과하더라도, 이 확신은 이런 개념[이성의 추상적 개념] 속에서 자기 자신이 확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자아로서 아직 진정으로 실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확신을 진리로 고양시키고, 나의 것(Mein)의 비어있는 내용을 채우도록 떠밀린다.”

이런 내용을 채우는 운동 과정에서 이성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운동과정을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됩니다. 앞에서 사념(감각적 확실성), 지각, 오성을 거쳐 자기의식에 이르렀듯이 이성은 이제 이런 운동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그러나 되풀이 한다고 해서 과거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형식적인 상호 인정이라는 이성이 전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감각적 확신과 지각은 객관적 관찰과 객관적 경험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인정하는 감각과 지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히 내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동일하게 감각하고 지각되어야 하죠. 이런 관찰과 경험의 객관성을 헤겔은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념과 지각은.. 이제 의식에 의해 의식 자체에 대해서 지양된다.; 이성은 진리를 알고자 wissen한다; .. 개념으로 발견되어야 하며, 물성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따라서 이성은 이제 세계에 대해서 일반적인 관심을 갖는다.”(137쪽)

“모든 봉오리와 모든 심연 속에서 자기의 주권Souverainitaet)의 징표를 이식한다.”(137쪽)

‘안다’ 라든가 ‘일반적인 관심’은 객관성을 말하겠죠. ‘의식 자체에 대하여 지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자기의 주권’이란 형식적 인정이라는 것을 뜻하겠지요. 객관적인 것 그것은 형식적으로 인정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이런 객관적 관찰과 경험을 찾아 세계로 나아갑니다. 객관적인 것이란 곧 자기 자신 즉 보편적 형식으로서 이성이 깔려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관찰과 경험이란 사실 어떤 것입니까?

2)두 가지 객관성
이런 객관성이 근대과학의 근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을 통해 근대 경험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환상을 과학의 토대로부터 배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객관성을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근대과학은 누구나 되풀이 할 수 있는 실험을 통해 발견된 객관적 사실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실험이란 이미 일정한 도구를 사용하여 일어나는 것이죠. 망원경이 없었다면 행성은 관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실험은 이미 일정한 이론적인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라브와지에가 질량은 불변한다는 이론적인 전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연소(즉 산소와의 결합)이라는 경험을 할 수 없었겠지요. 행성의 관찰과 연소라는 경험이 객관적인 것은 이런 도구와 이론이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만일 이런 도구나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런 관찰과 경험은 주관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 하겠죠.

이런 예를 생각해 본다면, 두 가지 객관성을 엄밀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인정으로서 객관성과 실재로서 객관성, 전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성에 불과하죠. 비록개인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시대나 사회(과학의 발전 정도)에 의해 제약된 것이니 이 역시 주관적인 것입니다. 반면 후자가 진정으로 도달해야 하는 진리에 해당됩니다. 헤겔이 도달하려는 목표는 이런 객관적 진리이죠. 이성은 아직 이런 실재적 객관성을 인식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실재성은 이성에게 낯선 타자,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면, 헤겔이 곧 이어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요?

“이런 피상적인 나의 것이 이성의 궁극적인 관심은 아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것(소유하는 것Besitznahme)에서 얻는 기쁨도 잠깐, 곧 그가 소유한 것에서 여전히 낯선 타자가 발견된다. 이 낯선 타자는 추상적인 이성이 그 자체에서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138쪽)

“이성이 사물의 창자를 샅샅이 뒤지고, 모든 핏줄을 열어서 이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마주칠 수 있다 하더라도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먼저 자기 자신의 삶이 끝나지 않고서는 자기의 탐구에서 완성을 경험할 수 없다.”

여기서 ‘나의 것’이라든가, ‘자기 자신에 마주친다’는 말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러면 위의 구절은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성으로서는 실재적 객관성, 진리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3)이성의 도착
실재로서 객관성과 인정으로서 객관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라면 실재 자체이라고 생각하죠. 이런 혼동으로부터 이성의 모든 역설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성은 객관적 실재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정으로서 객관성이죠. 한편으로 그는 이런 인정으로서 객관성을 실재로서 객관성을 간주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스스로 인정으로서 객관성과 실재로서 객관성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도착이라 합니다. 프로이트는 물신론에서 도착증자를 확신과 회의가 번갈아 나타나는 상태 즉 부인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원초적인 경험에서 어머니에게 팔루스가 없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하지만 곧 이를 부정하죠. 부정했다간 긍정하고, 긍정했다간 부정하는 게 도착증의 특징입니다. 우리도 이런 부인 상태를 자주 경험하죠. 나뭇잎을 뜯으면서 그가 나를 사랑할까 아닐까를 반복하는 사랑에 빠진 자가 바로 그런 도착의 일종이죠.

헤겔이 이성에게도 이런 도착이 나타난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 통찰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헤겔 자신의 말을 들어 보죠.

“직접적으로는 전적인 실재라는 대상적 의식의 확신으로서 등장하는 이성은 그 실재성을 존재의 직접성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며, 마찬가지로 나와 대상적 존재의 합일을 직접적인 통일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인다.”(138쪽)

“따라서 이성은 관찰하는 의식으로서 사물에 다가가면서, 이런 사물을 진정으로 감각적인 사물로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성의 실제 행동을 보면 이런 생각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물을 인식하며, 감각성을 개념으로 즉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인 것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성은 사유를 존재하는 사유 속으로, 또는 존재를 사유된 존재로 변화시킨다.”(138쪽)

여기서 존재와 사유의 통일은 진정한 개념적인 통일(분리되고 다시 결합하는 통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존재를 나로 파악하다가(형식적 인정) 어떤 때는 존재를 나를 넘어선 것으로(존재의 직접성) 파악해서 통일과 대립이 동시에 번갈아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죠. 이런 교체가 직접적인 통일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성의 이런 도착에 관하서는 여러 가지 예들이 있지요. 가장 간단한 예는 이렇습니다. 제국주의자가 식민지인들을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경우를 보죠.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계 시민이다. 서로 동등하고 차이가 없다. 우리는 서로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너희의 문화는 내용상으로 볼 때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이다. 너희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의 권리이다. 그러나 너의 문화가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것만은 알아야 한다.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너희에게 충고, 권고, 아니 설득하고 싶다.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거부하는 이런 태도가 바로 이성의 전형적인 태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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