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도구적 이성
이런 헤겔의 이성 개념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전후 서구철학사에서 등장했던 이성의 개념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려 합니다. 전후 서구철학에서 이성 개념은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68 혁명 이후 이성은 합리적 지배라는 개념과도 연결되었습니다.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나 관료적 지배가 이런 이성을 대변했지요.
이성 개념에 대한 비판을 주도한 두 개의 학파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바로 아도르노가 대변하는 푸랑크푸르트 학파이죠. 다른 하나는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였습니다. 이 두 학파는 공동적으로 이성을 ‘보편성’의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물이 지닌 보편적인 공통성, 추상적인 법칙을 인식하는 것이 이성이라는 거죠. 근대과학이 바로 이런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거죠. 자연을 인식하는 이런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 때 이성의 무자비함이나 보이지 않는 지배가 등장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개념은 매우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추상적인 보편성에 대한 인식은 지각(경험적인 귀납)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20세기 들어와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적 이론 또는 실존철학은 추상적 보편성으로서 이성 개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여주었죠.
현상학파는 사물은 질적인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사물에 고유한 것입니다. 이런 질적 고유성은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 연관성이란 기계적인 연관성을 넘어선 연관성이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적 연관성이죠. 이런 목적연관은 목적과 목적들 사이의 관계 즉 목적의 왕국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체험은 사물의 질적인 고유성 속에서 내재하고 있는 이런 목적연관을 직접적으로 파악하죠. 이걸 본질직관이라 합니다.
현상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은 이런 직접적인 체험을 추상화하여 사물을 보편적인 양으로 양화하죠. 이런 양화와 더불어 사물은 자기목적성을 상실하고 대상화가 되어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객관적인 존재자로 전락합니다. 이런 대상들 사이에는 목적연관성은 제거되고 인과적인 필연성의 관계가 출현하죠. 이게 바로 이성적인 과학의 세계입니다. 반면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간이 목적이고 대상이 수단이 합목적성의 관계(앞에서 말한 목적의 왕국과는 구별되는 것)가 출현합니다.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 실용적 수단을 제공해 주요. 고유한 체험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 사이의 구분 위에서 현상학과 실존철학은 은 ‘사태 자체’로, 또는 ‘직접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현상학적인 세계 인식으로부터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됩니다. 이 도구적 이성 개념이 이제 인간에게도 적용되죠. 인간도 다른 사물처럼 대상화되고, 인간들 사이에는 물질적 필연성의 연관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간과학이죠. 이 인간과학은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되죠. 도구적 이성이 인간 지배의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2)도구적 이성 비판
도구적 이성이 인간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대해 두 가지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오디세이 신화를 분석하면서 도구적 이성이 어떻게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지를 보여주요. 오디세이는 자연이 지닌 공포의 힘이 지배하는 바다를 떠돌면서 마침내 개인의 세계 지배가 완성되는 고향 이타카로 귀향합니다. 그는 이 도중에서 자연의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들과 싸웁니다. 이 가운데 아도르노는 특히 두 가지 이야기에 주목하죠.
하나는 키클롭스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오디세이는 키클롭스족속인 폴리페모스에게 잡혀 동굴에 갇혔다가 빠져나옵니다. 이때 오디세이는 자신의 이름을 ‘우디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아무도 아니다’라는 말이죠.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라’는 이 말을 믿고 오디세이를 놓아주었죠. 나중에 오디에이는 폴리페모스의 외눈을 찌르고 도망칩니다. 여기서 오디세이는 말을 사용합니다. 주술적인 단계에 있는 폴리페모스는 아직 이름과 대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성을 지닌 오디세이는 이름과 대상을 구분하고 그것을 통해 폴리페모스를 속일 수 있었죠. 이 단계는 이성이 추상적인 개념(곧 이름)을 통해 자연을 지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죠.
또 다른 이야기는 요정 사이렌 이야기입니다. 오디세이는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되지 않도록 선원들에게 자기를 돛대에 묶어 두라고 말합니다. 반면 선원들의 귀는 밀초로 막아 버립니다. 이렇게 오디세이아와 선원들의 협조에 의해 자연의 마술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도르노가 이 이야기에서 주목한 것은 지배자 오디세이와 피지배자 선원들 사이의 공모입니다. 피지배자는 배를 젓는 노동을 하고 오디세이아는 아름다운 노래를 향락하죠. 노동과 향락의 관계는 곧 지배와 종속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모하여 자연을 극복합니다. 이런 공모를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공생할 수 있었습니다. 아도르노는 이 이야기가 지배와 피지배라는 도구적 이성의 관계가 인간 사이에 어떻게 정착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푸코는 근대국가의 훈육적 체계 속에서 도구적 이성이 어떻게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훈육의 장치를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보여줍니다만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으니 대표적인 두 가지 경우만 설명해 보도록 하죠. 그것은 곧 생체권력이라는 개념과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이죠.
생체권력은 권력이 신체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해서 신체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신체를 재구성하는 자는 국가의 권력입니다. 신체가 효율적으로 된다는 말은 곧 신체가 국가 권력의 효율적 수단이 된다는 말이죠. 이를 통해 피지배자는 스스로는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권력의 수단이 됩니다. 권력이 이미 자기의 신체 내부에 들어온 것이니까요.
판옵티콘의 개념은 곧 감시자는 피감시자를 보고, 반면 피감시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는 구조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감시자는 감시자가 없어도 자기가 감시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스스로 자기를 감시하게 되죠. 이제 감시가 자기 내부에 들어오기 때문에 피감시자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도 권력에 복종하죠.
아도르노나 푸코는 모두 도구적 이성이 어떻게 지배의 수단이 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그 원칙은 곧 자연의 지배를 위해 나온 도구적 이성이 인간의 지배에 사용된다는 겁니다. 아도르노와 푸코의 이런 비판 이후 대부분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과학적 이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성 개념은 거슬러 올라가면 추상적 보편성으로서 이성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성 개념은 헤겔로 볼 때는 지각적 일반성의 능력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성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3)이성의 한계
헤겔의 이성 개념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권으로서 자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자기의식이 서로 인정하게 될 때 이성 개념이 출현합니다. 이런 인정은 형식적인 차원에서만 일어납니다. 즉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인격이라는 점에서만 서로 인정하죠. 이런 의미에서 앞에서 말했듯이 이성은 비판이론가들이 말하는 대화적 이성 개념에 가깝습니다. 비판이론가들이 말하는 대화적 이성 역시 순수한 자율적 결정의 주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성의 세계가 곧 시민사회입니다. 로마 시대 이른바 만민법, 자연법이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이성의 세계가 출현하였죠.
헤겔은 이런 이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고요가 출현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곧 이어서 헤겔은 이런 형식적 이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헤겔은 이성이 지닌 모순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제 이런 범주는 또는 자기의식과 존재의 단순한 통일은 그러나 그 자체에서 an sich 구별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 본질은 바로 이런 것, 즉 타자적 존재 속에 또는 절대적 구별 속에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존재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투명하며, 동시에 아무 구별도 아닌 구별로서 존재한다.”(134쪽)
흥미로운 말이죠. 이 말에서 헤겔은 구별과 통일(자기의식과 존재 사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통일의 측면은 형식적 차원 즉 모든 자기의식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자기의식이라는 측면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두는 동등하죠. 반면 구별의 측면이란 이런 자기의식에 의해서 결정된 내용이 지니는 차이를 말합니다. 각자가 선택한 내용은 서로 차이를 지닙니다.
여기서 차이를 지닌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내용상으로도 자기의식은 서로 공존할 수 있죠. 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서는 이런 공존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 어디까지인지가 확정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타인이 가진 것조차 자기의 것처럼 간주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마치 주인과 노예의 단계에서 자기의식이 서로의 자유로운 결정권 자체를 부정하려 하였듯이, 이제 내용을 둘러사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려 하는 대립, 갈등이 생겨나죠.
이런 관계 형식적으로는 서로 인정하면서도 실질적 내용을 두고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이성의 세계이죠. 그런데 이 관계가 기묘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이성에게 형식적 동일성은 본질적 차원이죠. 반면 내용적 차이는 비본질적입니다. 그것은 “아무 구별도 아닌 구별”에 불과하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본다면 형식적으로 서로 인정한다는 것은 말에 그칠 뿐이죠. 실질적으로 이 세계에는 여전히 투쟁으로 점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의 전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예를 생각해 보세요.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노동자가 실제로 자유로운가요? 그는 실질적으로는 노예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약자이므로 계약관계에서 자신의 것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죠.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이번에는 자본가가 계약위반이라고 말합니다.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내용이란 형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연 이런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4)이성의 전이
헤겔은 이런 이성은 이런 통일을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본질(absolut negative Wesen)’로서 파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절대적 본질’이란 “그 자체에서 부정, 규정 또는 구별을 갖는 것”(135쪽)입니다. 다시 말해서 칸트적인 선험철학에서처럼 형식 자신으로부터 그 내용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통일은 ‘단순한 통일’에 불과하죠.
서로 구별된 내용은 통일적인 형식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즉 우연적인 것이 되죠. 다시 여기서 자기의식은 스스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의 내용은 알고 보면 외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욕망을 선택하는 경우,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믿었지만 실제로는 어떤 유혹에 이끌려 그 욕망을 선택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죠.
“그러나 다수성의 범주가 어떤 방식으로 다시 하나의 우연한 발견물(Fund)로 예를 들자면 [지각] 판단들로 나온 발견물로 받아들여지며 그러한 것들로 시인된다는 사실은 사실상 학문[필연성을 따르는 학문]에 대한 치욕으로 간주되어 질 수 있다; 오성이 그 자신에게서 즉 순수 필연성에서 이런 필연성을 제시할 수 없다면, 어디서 필연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135쪽)
[여기서 ‘단순 범주’는 단순한 통일의 형식적 측면을 말합니다. 반면 다수성의 범주는 그 형식을 채우는 구별된 내용의 측면을 말하죠]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고,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것, 한편으로는 전자가 본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자가 본질이라는 사실로부터 헤겔은 이성이 전이되는 도식을 하나 그려냅니다. 그 도식은 마름모를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 범주(자기의식과 타자의 통일)->다수 범주(구별)->외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자기의식에 대해 대립)->내용의 정립->단순 범주
이상의 도식을 헤겔의 말로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순수한 본성은 그 구별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속하므로, 도대체 사물[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에 대해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다수의 범주들은 순수한 범주의 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수의 범주들은 이미 그 자체로 동시에 그 자신의 다수성 속에서 순수범주에 대립하는 타자성을 갖는 애매한 것이다.”(135쪽)
여기서 다수성을 범주라고 말할 때는 순수 범주인 통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는 의미이며, 반면 ‘타자성’을 갖는다 할 때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내용은 이제 ‘개체성’으로 규정됩니다.
“개체성은 개념으로부터 외적인 실재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의식이면서 동시에 ....타자로 전이(verweisung)하는 것에 대한 순수한 도식이다. ...이런 개별성, 바로 타자의 정립 또는 타자 자체 속에서 의식은 동시에 그 자신이다.”(135쪽)
이런 개체적인 내용은 자기의식의 타자,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순수한 자기의식, 즉 형식적인 통일이 다시 본질적인 것으로 등장하죠. 헤겔은 이렇게 내용이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타자의 정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립gesetztsein’이라는 것은 ‘타자가 바로 그런 타자에 불과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의미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마름모를 통해서 이행이 이루어집니다.
“이 다양한 계기들 각각은 자기와 다른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각각의 계기 속에서는 자기와 다른 어떤 것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135쪽)
“우리는 여기서 순수의식이 이중적인 방식으로 정립되는 것을 보다. 즉 한번은 모든 계기를 지나가는 부단한 요동hin und her gehen으로서 나타난다. 이 하나의 계기 속에서 다른 계기가 어른거리며, 다른 계기가 포착되는 순간 스스로 지양된다. 다른 한번은 고요하게 자기 자신의 진리를 확신하는 통일로서 나타난다. 이런 통일에서 본다면 앞에서의 요동이란 남의 일처럼(das Andre) 보인다. 이런 운동에서 본다면 그런 고요한 통일이 남의 일이다.”
바로 이것이 이성의 전이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성의 모순을 간단히 말하자면 형식적으로는 통일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서로 대립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겠죠.
5)이성과 회의주의
이성이 가지는 이런 두 측면 즉 통일과 구별, 형식과 내용의 측면 때문에 헤겔은 이성을 ‘공허한 관념론’이면서 ‘절대적 경험론’이라고 말합니다.
“공허한 관념론은 동시에 절대적 관념론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의 것으로 결정된 공허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즉 나의 것이 지니는 내용적인 구별과 발전 형채를 위해서 이성은 외부로부터의 충격Anstoss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36쪽)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성이 회의주의와 같은 자기모순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회의주는 자기를 유지할 수 없죠. 왜냐하면 회의주의는 회의도 회의해야 하니까요. 마찬가지로 공허한 관념론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채우는 경험론을 필요로 하니까, 자기모순입니다.
이하에서 헤겔은 137쪽까지 거듭해서 이성이 가지는 서로 모순적인 이중적 측면을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이런 내용은 반복되니까 설명에서 생략하도록 하죠. 다만 아래의 구절은 표현이 흥미로워서 인용해서 소개합니다.
“이런 관념론의 순수이성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기에게 본질적이고 즉자적이지만 그 자신 속에는 들어 있지 않은 타자에 이르기 위해서 진리가 아닌 지식에 이른다. 이성은 지식와 의지를 통해서 비진리인 지식에 이르도록 저주받으며, 사념과 지각을 내버릴 수 없다.”(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