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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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소송 한철연 학술상 선정 사유
이병창 2009.05.29 1407
소송 한철연 학술상 선정 사유.

1.
먼저 선정과정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지난 3월 13일, 1차 심사위원회가 열렸고, 여기서 형식적 기준을 마련해서 그 기준에 따라 15편의 논문과 책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회는 분야 별로 심사평자를 채택해 평가했고, 지난 5월 24일 제2차 회의를 통해 이상 15편에 대한 각 심사평자들의 논평을 들어본 이후, 이정은 선생의 논문과 현남숙 선생의 논문을 수상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5월 26일 밤에 인터넷을 통한 투표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이정은 선생의 논문 \감성과 이성의 관계를 통해 본 칸트의  악 개념(이하 ‘칸트 악 개념’)\을 수상 논문으로 선정했습니다.
이정은 선생의 논문에 대한 심사평을 제가 썼기 때문에, 심사위원회는 저에게 선정사유를 작성하라고 명하였고, 그것에 따라서 이렇게 선정 사유를 밝히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당시 나온 의견을 종합해야 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결국 저의 의견이 중심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2.
선정 사유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소송 한철연 학술상의 평가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학술상이란 학문적 차원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지요. 그런데 철학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학술상을 제정하면서, 여러 가지 절차는 마련되었지만, 이런 탁월성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논의가 결여된 결과 1회도 그렇고 이번 2회에서도 최종 단계에서 민주적 투표라는 방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민주적 결정이란 엄밀한 기준이 결여된 것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요?  그래서 솔직히 이번 결정이 정말 잘 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학술상도 그렇고,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소송 한철연 학술상에서도 역시 오랜 풍파가 지나가야 좀 더 엄밀한 기준이 마련될 것이고, 이를 통해 학술상의 본래적 역할도 더욱 고양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술상의 선정 사유가 공개되고, 이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이미 결정된 것이 다시 번복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다음번의 더 발전된 학술상 심사를 위해서 이 논의가 결정적으로 도움이 될 것으로 믿기에, 비판을 무릅쓰고, 선정사유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3.
이정은 선생의 ‘칸트 악 개념’ 논문은 그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돋보이는 연구입니다.  논문의 서론에서 이정은 선생은 이 개념을 다루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정은 선생은 최근 사회적으로 만연하는 근본악의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경향은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근본악이라 합니다. 이런 근본악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 근본악의 문제이지요.  이정은 선생은 현재 세계에서 이런 근본악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점차 강화되는 자살을 그 대표적 현상으로 간주합니다. 이정은 선생은 이런 근본악의 현상을 해결하는데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하여 칸트의 근본악 개념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이정은 선생이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런 근본악의 현상이 부시의 이라크 침략을 비롯한 많은 최근의 현상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이미 지젝은 이런 근본악의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대표적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정은 선생의 문제의식이 매우 돋보이는 거죠.

4.
이렇게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주제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은 선생의 논문 자체는 칸트의 근본악 개념에 대해 칸트가 제시하는 논의방식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정은 선생은 시야를 넓혀서 근본악 개념에 대한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끌어들이거나, 또는 라캉이 칸트와 사드의 비교 연구에서 시도하듯 프로이트의 죽음에의 본능과 연결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논의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이 논문이 학술상에 가장 적합한 탁월한 논문이 되었을 텐데, 이점은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심사위원회에 참여한 여러 심사위원들은 이정은 선생의 수상자 선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마땅히 학술상은 탁월한 논문에게 우선 주어져야 하겠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만일 그러한 논문들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탁월한 논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아마 차선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폭넓고 깊이 있는 시야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아마 이러한 기준에 가장 가까운 논문을 찾으라고 한다면, 저는 오히려 박영균 선생의 논문들(3편이 동시에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이 아닐까 합니다. 박영균 선생의 논문 역시 제가 일차적으로 심사평을 하게 되어서 저는 이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박영균 선생은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무정부주의적이며, 낭만적인 들뢰즈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 재해석에 끌고 들어옵니다. 그의 이런 시도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직성을 타파하고 현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절한 마르크스주의를 찾는 작업입니다.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영균 선생의 논문들의 경우, 이런 재해석의 시도가 아직은 불안정하고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재해석의 시도에서 박영균 선생은 아직 깊이와 폭을 확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박영균 선생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적극적 수용의 대상이 된 들뢰즈적 관점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박영균 선생의 시도가 가진 가능성에 대해 높이 기대합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을 통해 새로운 철학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박영균 선생의 더욱 치열한 정진을 위해서 저나 다른 심사위원들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5.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이정은 선생의 논문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학술상 수상작으로서 논의대상이 되었던 현남숙 선생의 논문도 살펴보았습니다. 이 논문의 주제는 해러웨이라는 여성학자의 주장과 관련됩니다. 논의의 초점은 생식기술이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해러웨이는 생식기술에 의해 여성의 몸이 사이보그화 되어 가는데,  몸과 기계의 통합체인 사이보그란 문화적 의미를 담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이를 물질-기호라 하죠. 그러므로 사이보그에 어떤 문화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생식기술이 해방에 기여하는지 아닌지 판단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기술 중립론에 가까운데, 전통적 중립론자가 기술이  주체나 사회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따라 판단하려 합니다만, 해러웨이는 기술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판단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 제가 현남숙 선생의 글을 읽고 이해한 정도라,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좀 자신이 없습니다만 논문의 수준을 평가하는 데서는 이 정도 천박한 이해라도 큰 문제는 없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남숙 선생의 논문의 주제는 여성의 현실에 비추어 긴박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기술의 발달이 더욱 강화되고 만연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논의는 실천적인 대안의 마련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한철연이 지향하는 실천적 철학에 적절한 주제라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남숙의 논문은 논의가 너무 실천적인 것에, 그리고 헤러웨이의 입장의 소개에 제한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분야에 대해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과학기술과 사회, 문화에 관한 더 폭넓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페미니즘의 문제에서 볼 때도 생식기술이라는 기술적 맥락이 페미니즘 전반의 논의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현남숙 선생의 논문을 통해 이론적으로 제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 즉 해러웨이에서 사이보그라는 개념과 물질-기호라는 개념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분석해 주었더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그렇게 보니, 현남숙 선생의 논의도 이정은 선생의 논의처럼 특정한 철학자의 특정 개념을 서술하는데 한정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둘 다 학술상에서 요구되는 기준 즉  제가 설정한 폭과 깊이를 보이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본다면,  논의의 대상이 된 두 분의 논문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처럼 오래 동안 연구를 한 사람조차, 아직까지 특정 철학자의 특정 개념의 이해에 매달려 있으니까요. 그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헛돌고 있는 딱한 사정을 생각해 보면, 이 두 분은 그래도 저보다 수준이 높다 생각됩니다.

6.
이런 사정 때문에, 저는 탁월성의 기준 다음의 차하의 기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차하의 기준으로는 논문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또는 치밀하게 서술했는가 하는 서술 또는 논증의 능력을 들어 볼 수도 있고, 논문의 연구에서 얼마나 많은 글들을 참조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했는가 하는 성실성의 기준도 들어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심사위원회의 일차 회의에서 제시했듯이 한철연에 대한 헌신의 정도와 같은 학문 외적인 요소도 있겠죠.
차하의 기준으로 매우 다양한 기준들이 있지만 그 어느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두 분의 논문에서 우열의 차이점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고려 끝에 결론적으로 두 분의 논문의 차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주제의 선정에 있어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현남숙 선생의 논문의 주제는 매우 실천적이고 긴박한 문제입니다. 반면 이정은 선생의 논문 주제는 현실적이거나 실천적 관련성 보다는  철학적이고 이론적 수준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제한된 영역에 걸친 그러므로 다른 문제와의 관련성이 결여된 고립된 문제입니다만, 후자는  많은 문제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는 문제이고,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입니다. 또  해러웨이라는 현대의 여성학자는 상당한 영감을 주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가능성이 전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학자이고, 반면 칸트는 고전 철학자입니다. 칸트가 고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칸트가 현대에 와서도 다시금 되돌아가서 천착해 보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자는 철학연구자로서 조금은 가볍게 연구해 낼 수 있는 문제이고, 후자는 철학 연구자로서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이해되는 묵중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논문 주제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서, 저는 만약 다른 차이점이 없고, 오직 이런 차이점만 있다고 한다면, 저로서는 아무래도 후자의 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물론 한철연의 지향점은 실천적인 철학입니다. 그러나 한철연은 이런 실천적인 문제들을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 머물러 분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론적 분석을 철학적인 수준에서 심화시켜서, 한정된 특정 문제들을 넘어서 보편적 개념의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렇게 보편 개념의 철학적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전반적인  문화비평, 또는 전체 사회비평의 수준에까지 육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현남숙의 논문의 문제의식은 기초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이정은 선생의 근본악 개념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편적 철학적 수준에 육박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문제의식에 있어서 이런 보편적 개념의 차원에 이른다면,  이 보편적 개념에 대한 깊이 있고 폭넓은 연구는 멀지 않아 도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그런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정은 선생의 논문은 비록 깊이나 폭에 있어서 부족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가야만 얻어낼 수 있는 득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한철연 학술상의 선정을 통해 우리 한철연에서 실천에 대한 관심에 못지않게, 이를 철학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개념에 대한 연구가 강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철학적 일반화는 무겁고 조금은 지겹기도 합니다만, 철학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한 단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정은 선생의 덕목은 이런 지겹고 무거운 작업을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용기와 그가 겪는 고통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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