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소개
영화 「토지와 자유」는 95 년 깐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은 문제작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좌파 로맨티스트’로 알려진 켄 로치(Ken Loach)로서 그는 96년 작품 「칼라의 노래(Carla\s song)」과 2000년 작품인 「빵과 장미(Bread and Rose)」에 의해 어느덧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졌다.
그는 36.6.17 영국의 근대산업의 발흥지인 버밍햄(Bermingham) 근처의 뉴니톤(Nuneaton)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속하는 노동계급에 봉사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영국 BBC 방송의 TV 연출가가 되었는데, 64년부터 96년까지 그가 만들었던 TV 드라마는 무려 32편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는 대중적인 경찰 드라마 「Z 카」와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이른바 다큐멘터리 드라마에 속한다. 그는 이런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통해서 영국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했고 그 속에 감추어진 문제들을 폭로했다.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66년의 작품인 「캐시 집에 오다(Cathy comes Home)」이다. 여기서 그는 가난해서 집세를 내지 못해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후의 고도성장에 가려진 사회적 문제를 고발했다. 이 작품은 당시 600 만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 무주택자(homeless)의 문제에 대한 활발한 사회적 토론을 야기했다. 이어서 그는 「두 가지 마음으로」에서는 여성의 문제, 「불쌍한 암소(67년)」에서는 노동계급의 문제를 다루어 나갔다. 그가 69년에 만든 작품 「케스」는 붕괴되는 탄광촌의 문제를 광부의 아들이 기르는 매에 대비하여 포착했다.
사회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드라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정부의 은폐된 검열기제인 방송 거부, 자금 지원 중단 등의 문제로 비틀거리기도 했으나 그 뒤로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81년의 작품 「외모와 미소」는 해고되는 철강노동자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리더십의 문제(80년)」,「너는 어느 편이냐?(84년)」에서는 귀족화되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는 노동조합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그의 관심은 영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조국(86년)」은 동독의 지식인이 서독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운데 겪은 서구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환멸을 다루었다. 그리고 90년 「숨겨진 비망록」은 영국의 식민지인 북아일랜드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 정부와 사법제도의 부패를 고발했는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서 깐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게 되었다.
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만들던 켄 로치는 90년대 들어 허구적인 극영화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해 왔던 다큐멘터리의 기법과 그의 불꽃같은 사회비판 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어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들이다. 이 가운데 우선 「하층민(90년)」은 80년대 대처리즘 치하에서 공사장에 모인 과거 식민지 출신, 또는 영국 내 아일랜드나 리버풀 등 경제적 공황지역 출신의 젊은이들의 삶을 그리며, 「레이닝 스톤(93년)」은 딸이 성령식에서 입을 옷을 살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가난한 가장을 다룬다. 그리고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94년)」은 미혼모의 모성애가 설 자리도 빼앗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환상의 도구인 사회복지 정책을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려는 영화 「토지와 자유(95년)」은 스페인 내전에 참여 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칼라의 노래(96년)」은 니카라과 내전에 희생당한 여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식민지 민중의 저항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빵과 장미(2000년)」은 불법 이민자의 노동운동을 다루고 있다. 켄 로치의 이런 작품들은 깐 영화제를 통해 이미 국제적으로 주목받았으며, 그는 「레이닝 스톤」으로 93년 깐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 그리고 「토지와 자유」로 95년 깐 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작업은 이제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런 켄 로치의 작품을 이해하는데서, 그의 드라마나 영화에 기초가 되는 다큐멘터리 개념과 그 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그의 다큐멘터리 개념과 기법은 영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잠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통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가 발생했을 때부터 영화의 기록장치로서의 탁월한 기능이 주목되었는데, 이로부터 허구적인 극영화와 분리되어 다큐멘터리 영화가 발전했다. 그 개척자는 플래허티(R. Flaherty )로서, 그는 20년 「Nanook」라는 작품에서 북극해 지역의 에스키모인의 삶을 통해 가혹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그려냈다. 그는 여기서 카메라를 사실적 소재 속에 깊이 침투시킴으로써 사실 속에 담겨져 있는 드라마적 요소를 발견해냈다. 이런 플래허티의 작업과 거의 동시에 이태리의 까발깐티(Cavalcanti)의 「시간 외엔 아무 것도(26-27년)」나 독일의 루트만(W. Rutmann)의 「베를린-대도시 교항악(27년)」은 낭만화된 자연보다는 현실적 삶에 눈을 돌렸는데, 그들은 도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면서 여기서 도시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서정적인 리듬을 발견해 냈다. 그들의 작품은 도시에 대한 일종의 인상파적 회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장치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잘 효과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 바로 러시아의 ‘영화의 눈(Kinoki)’ 그룹이었다. 베르토프(D. Vertov)를 중심으로 한 이 그룹은 현실의 다양한 다층적 모습을 인간의 눈보다 탁월한 유동성을 지닌 카메라의 특성을 이용하여 포착했다. 이들은 이런 단편적 이미지들을 몽타주를 사회에 대한 그들의 변증법적 분석과 연결시킴으로써 관객에게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개념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관객의 사유를 이미지의 힘을 통해 지배하고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미지의 단편들 속에 카메라의 운동을 직접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주어지는 이미지들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영화적 몽타주가 가진 힘은 관객의 사유를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므로, 러시아에서 개발된 몽타주 이론은 곧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기록장치로서 영화가 프로패간더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리펜슈탈(L. Riefenstahl)에 의해 만들어진 나치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36년)」 등에서 가장 잘 보인다 하겠다.
영국에서는 30년대 그리어슨(J. Grieson)을 비롯한 탁월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출현하여 다큐멘터리의 이런 가능성들이 종합되었다. 이런 시도로서 대표적인 것이 그리어슨의 작품 「유망선(driftler, 29)」인데, 여기서 그는 청어잡이를 나선 어부들의 삶을 진솔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그의 작품에서 골격은 인간의 투쟁이지만, 여기에는 사회적 삶이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이 사회적 삶의 다양하고 다층적 측면을 몽타주에 의해 결합시켰다.
영국에서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통은 전쟁 중의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한 층 발전하여 마침내 50년대 이르러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운동을 발전시켰다. 이 운동은 56년 영국 국립영화극장에서 상연된 다큐멘터리를 묶어, 이를 기획한 앤더슨(R. Anderson)」이 붙인 이름인데, 이 운동에는 리차드슨 (T. Richardson), 라이츠(K. Leitz) 등도 참가하였다. 그 외 프랑스 및 폴란드 작가도 참가하였다.
프리 시네마 운동의 기본적 정서는 자유라 하겠다. 이 운동은 56년 스탈린의 헝가리 침략을 계기로 공산당에 대한 불신을 배경으로 하여 신좌파(New Left)가 등장하면서 촉발되었다. 실존적 마르크시즘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을 결합한 신좌파의 운동은 당시 전후 자본주의를 끌어왔던 수정 자본주의 체제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핵심은 바로 전후 자본주의가 물질적 풍요와 표면적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소외되고 관료화된 은폐된 억압 사회라는 점에 있다.
이런 신좌파의 비판은 후일 유럽에서 68 혁명을 초래하지만 이런 운동의 일환으로 영화에서 전개된 것이 바로 프리 시네마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영화가 상업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독립적인 작가의 작가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것, 영화가 사회의 소외를 극복하고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비판적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이를 위해 그들이 주력했던 것은 바로 다큐멘터리이었다. 그들은 그리어슨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휴머니즘적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플래허티나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투쟁의 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프리시네마에서 이제 강조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이다. 이런 점에서 프리시네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과 유사하다. 즉 개인은 그가 속하는 집단, 즉 계급이나 계층의 대변자 또는 전형으로서 관찰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카메라는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시선을 통해 사회를 관찰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 다큐멘터리가 사실적 소재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프리 시네마는 허구적인 방법으로 이런 사실적 소재를 재현하려 했다는 데 그 핵심적 차이가 있다. 그래서 대체로 프리 시네마 운동은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제작에 주력했는데, 사실 엄격히 말한다면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도 이미 어느 정도 재현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경우 이런 개입은 거의 극영화의 수준에 버금간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다큐멘터리 적인 것을 보존하려 한다는 점에서 프리 시네마는 근본적으로 허구적 드라마이면서 다큐멘터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적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이것은 드라마이지만 여기에 비-극적인 요소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극적 전개와 무관하지만 사실적 관심 때문에 카메라는 자주 빗나가며, 사실에 대한 설명 분석 토론과 같은 요소들이 과감하게 끼어든다. 또한 다양한 사실적 소재들의 콜라주도 주요한 그 다큐멘터리적 요소이다. 그래서 뉴스릴, 신문 쪼가리, 현장 사운드가 영화 속에 개입된다. 또는 재현된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록적인 흔적을 가진 것처럼 흉내 내는데, 단적인 예로서 거친 흑백 사진 같은 화면이 이에 속한다. 이런 가장된 다큐멘터리적 요소로서 그 외에도 주요 배역을 제외한 엑스트라를 현장에서 직접 구해 쓴다든가, 세트보다는 현장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더구나 여기서 카메라의 앵글과 거리, 그리고 움직임은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관찰자의 시선을 택한다. 카메라는 현장 속에 있으면서 그 사건과 호홉을 같이 하여 아주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사건을 관찰한다. 특히 마치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는 듯이 초점이 맞지 않고 프레임에 대상이 잘리는 듯한 흔들리는 화면은 가장 전형적인 다큐멘터리화 수법일 것이다. 거기다가 현장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듯한 롱테이크 기법, 카메라를 움직이면서 주변을 공평하게 훑어 나가는 객관적 카메라 수법 등도 전부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이런 수법들은 대체로 이태리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프리시네마를 이런 전통에 같이 분류하기도 하지만, 프리 시네마의 경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요소, 즉 인간을 계급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전후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네오리얼리즘의 정신과는 구별되는 요소라 하겠다.
2. 스토리 및 감상 포인트
프리 시네마의 이런 다큐멘터리화 수법은 켄 로치의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 자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직접 고백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우리가 만들고자 한 것은 뉴스와 같은 효과를 갖는 영화, 즉 픽션과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혼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점과 연관하여 왜 초기에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90년대 들어 영화 즉 극영화를 만들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60년대처럼 TV 채널이 둘 정도 있었을 때, TV 다큐멘터리는 전국에서 몇 백만이 동시에 시청하면서 하나의 전 국민적 사건이 야기되지만, 이후 다채널 시대에 들어와서 이런 효과가 사라진 마당에 다큐멘터리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고, 오히려 영화는 한꺼번에 관람하지는 않지만 오래 지속되면서 심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하여 전향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다큐멘터리가 빠른 시간 내 제작되는 일종의 팸플릿에 해당된다면, 극영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소설과 같은 것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극영화의 힘을 강조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를 위해 그는 영화의 형식 보다는 그 내용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60년대 누벨바그가 영화 형식의 조작을 우선함으로써 너무 인위적으로 보인다고 비판하면서 내용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단순하게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내용이 스타일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본다. 그리고 내용이야 말로 영화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 속에서 나온 핵심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다뤄져야 한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스트로서 그가 여기서 포착하려는 것은 계급적인 계층적인 객관적 현실이며, 만일 영화제작자가 이 현실을 이해한다면, 그는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잘 알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영화의 형식은 어떤 복잡한 계산 끝에 산출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직접적으로 포착되는 단순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이런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소는 바로 당파성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찰을 통하여 노동계급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형식에 대해 내용을 우선시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첨예한 분위기를 지니며 사실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는 사실적 연기가 필요”하다고 하며, 즉흥 연기를 강조하고, 심지어 스토리 보드를 거부하기도 했다. 또 촬영에서 스토리 순서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켄 로치의 프리 시네마적 영화기법은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에 기초하는데 그는 사회민주주의는 체제 내화되어 있으며 공산당은 더 이상 혁명적이 아니라 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신좌파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볼 수 있다.
그는 새로운 혁명을 위해 역사의 이해를 강조한다.
“역사는 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역사야 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다.”
그가 이처럼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절하면, 그들의 현재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 수 있고,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민중에게 과거를 제대로 파악하도록 하는데 영화가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실 영화는 우리에게 과거를 직접 생생하게 대면하도록 만드는데 그 어떤 예술보다 탁월하다 하겠다.
바로 이런 혁명과 역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스페인 내전을 다루는 영화 「토지와 자유」이다. 이 영화는 1936.7.17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여, 여기에 지원한 영국 사회당 당원 데이비드 카의 눈을 통해 그 내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주로 1935.9 결성된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 당(약칭 POUM)\의 민병대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데, 이 POUM은 무정부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당으로서, 카는 이들의 진한 동지애와 자유로운 정신 불꽃 튀는 투혼에 감격한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살리려 노력한다. 영화 속에 여자 민병대원이었던 블랑카가 바로 그 상징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와 블랑카의 짧은 사랑을 꼬지로 하여, 민병대원으로서 훈련과 전선의 진지에서의 그들의 삶, 그리고 파시스트가 장악했던 마을을 해방하고 토지혁명을 수행하는 과정, 스페인 남부 카탈로니아 지방의 중심도시 바로셀로나에서 벌어진 공산당과 POUM 사이의 도시내전, 마지막으로 민병대 전투의 혼란상과 공산당에 의한 민병대의 해체라는 역사적 과정을 꿰어 내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앞에서 설명했던 켄 로치의 다큐멘터리화 기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당시의 내전을 생생한 현실로서 관객에게 제시하려 했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겠는데, 아주 다양한 요소들이 이런 다큐멘터리화 기법에 이용되고 있다.
①비-극적 요소; 이 영화는 당시 특히 논쟁의 대상이 된 토지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긴 논쟁 장면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민병대를 공산당 휘하의 민중부대에 통합하느냐의 문제를 둘러싸고 민병대원끼리 논쟁을 벌이는 데, 어쩌면 지루하다 싶은 이런 논쟁 장면 자체가 극적 재미의 요소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이를 집어넣어서 극적 긴박감을 약화시켰는데, 이는 오히려 당시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목적에 나왔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다큐멘터리적 요소라 하겠다.
②비-극적 구조; 이런 비-극적 요소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가 비-극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핵심적 스토리라 할 카와 블랑카의 사랑의 드라마와 무관한 요소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주요한 요소들에 카메라는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므로, 그러므로 기승전결이라는 드라마적 구조는 약화되고, 오히려 마치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③ 콜라주; 이 영화는 카의 외손녀가 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발견한 편지나 사진 신문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래서 일종의 회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편지나 사진은 과거의 현실의 일부로서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특히 타이틀 롤에서 켄 로치는 당시의 뉴스릴을 이용하여,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간략하게 스케치하는데, 이처럼 현실의 사물이나 기록들을 재현의 이미지 속에 집어넣는 기법을 콜라주라 할 수 있다.
④객관적 카메라; 앞에서 논쟁 장면에서 켄 로치는 논쟁에 참여한 각 계층의 입장을 공평하게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이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화자는 카인데, 그는 무정부주의에 공감하므로, 이들의 입장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할 거 같다. 물론 신좌파에 속하는 켄 로치의 입장도 그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카메라를 배분하여, 마치 카메라가 그들 모두를 훑어 나가는 듯하다. 이와 같은 객관적 카메라는 뉴스에서 보여주는 그런 객관성을 흉내 낸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화의 기법에 속한다.
⑤심도 깊은 카메라; 사건을 리얼하게 기록하는 장치로서 카메라는 사건의 다양하고 다중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위해 심도 깊은 화면, 롱 테이크(long take), 그리고 사건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카메라의 거리나 앵글을 택하는데, 이 영화 역시 이런 기법들을 잘 보여준다. 대체로 카메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기다리고 있으면서 사건의 뒷모습까지 넉넉히 바라본다.
⑥흔들리는 카메라; 이 영화에서 급격한 전투 신들은 거의 대부분은 이런 흔들리는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촬영되었다. 그래서 프레임 속의 대상이 중심에 오지 않으며, 대상 이미지가 잘리고 , 심지어는 다른 대상에 의해 피사체가 가려지는 등의 장면들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마치 현장 속에 우리가 뛰어 다니면서 관찰하는 듯한 생생함이 전달된다 하겠다.
이런 기법은 특히 파시스트가 장악한 마을을 민병대원이 공격해 들어가는 시퀀스에서나 마지막 시퀀스 즉 공산당 휘하의 부대에 의해 민병대원이 무장해제 당하는 시퀀스에서 아주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3. 영화로 사유하기
1) 스페인 내전의 배경
앞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하여 무정부주의자의 사상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러면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의 흐름에 대해 간략히 알아 볼 차례이다.
대체로 1880년 이후, 유럽 자본주의는 제2차 산업혁명 즉 중화학 공업의 혁명을 토대로 점차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대규모 공장에 밀집한 단순 육체노동자들이 출현하면서, 이들의 자연발생적 노동조합 운동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활기를 띠고 전개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만 해도 사회주의 사상이라 한다면 다양한 사상들이 경합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세 가지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유럽을 지역별로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적 사회민주주의는 유럽 중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합법저인 노동조합 운동을 혁명 전략과 연결시키려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독일사회민주당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도하게 합법운동에 몰두하여, 결국 사회혁명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이런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성을 비판하면서 무장 혁명적 전략을 강조했던 것이 바로 러시아의 레닌주의이었다. 레닌은 17년 러시아가 일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그 전후의 혼란을 혁명으로 연결시켜 세계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른바 유럽의 라틴 지역(이태리, 프랑스 남부, 스페인)에는 일찍부터 바쿠닌(M. Bakunin)의 무정부주의의 싹이 널리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는 19세기 말에 테러전술에 의존했으나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운동과 결합하여 새로이 성장했다. 그것이 바로 아나코 생디칼리즘, 즉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운동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조합 운동을 토대로 총파업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사회를 전복하여 새로운 사회는 무정부주의적 원리에 따라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조합이 자기들이 존재했던 공장이나 농장 및 학교 등 사회의 조직을 자주 경영, 자치 관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되었다. 이런 아나코 생디칼리즘은 특히 라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이미 19세기 말 노동조합 운동을 바탕으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사회당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이들과 대립하여 10년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의 조합인 CNT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독자적 정당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성공하고 21년 세계대전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새로운 제 3차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창립되자, 여기에 참가 여부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파들이 형성되었다. 우선 사회당 내에서 청년동맹과 좌파는 코민테른에 가맹했으며 이들은 코민테른의 일반적 결정에 따라 공산당을 만들었다. 반면 CNT 내부도 다시 분열하여, 22년 6월 가맹파가 따로 분리되어 나왔지만, 31 년 코민테른이 스탈린 중심체제로 바뀌자, 코민테른을 탈퇴하여, 35년 9월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 당(POUM)을 만든다. 바로 이 두 정당 즉 공산당과 POUM이 이 영화에서 주요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36년 1-2월 스페인 공화국이 위기에 직면하여 인민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는 35년 7월 코민테른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통일전선 이론에 기초한 것인데, 공화국의 위기에 직면하여 스페인의 좌파 세력이 대동단결하여 만들었던 것이다. 36년 2월 16일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좌파 부르주아 공화파인 아사냐를 중심으로 정부가 구성되었다. 공산당과 아나키스트(CNT 및 POUM)는 직접 정부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인민전선 정부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드디어 36년 6월 군부의 수장 모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런 쿠데타는 스페인 본토에서는 대부분 인민전선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식민지 모로코에서 프랑코가 이끄는 군대는 봉기에 성공하여, 독일과 이태리의 측면지원을 받아 군대를 본토에 상륙시켜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2)내전의 초기양상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히틀러의 독일은 비행기 전차를 지원하고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지원했다. 이태리 역시 군수물자를 지워했다. 그런데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은 없었다. 오히려 불간섭을 선언하면서도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막지 못해 방조한 거나 다름없었다. 반면 사회주의 소비에트는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비행기 탱크를 지원했고, 직접 군대를 보내지는 안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여 스페인에 파견했다. 이 영화에서 영국 사회당원 데이비드 카 역시 이런 지원 프로그램의 요청을 받아 파견되었다. 이들 외국지원병들은 영화에서 카가 바르셀로나에서 참가했던 국제여단을 형성하여 전선에 파견되었다.
전쟁의 초기에 인민전선을 지원했던 각 정파 및 조합들은 각자 독립적인 민병대를 조직해서 프랑코의 연합된 정규군과 싸웠으며, 대체로 지역별로 할거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카는 열차에서 만난 POUM 소속 노동자 및 지원병들과 더불어, 아나키스트 세력이 강했던 지역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스페인 정치 중심지 마드리드 지역에는 점차 공산당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강력한 조직력과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그래서 내전 직후에는 2만 정도였다가 내전을 거치면서 30만 당원을 지니는 조직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부의 좌파 부르주아 공화파와 연합을 이루면서 점자 인민정부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아나키스트들은 원래 스탈린주의를 싫어했으며 그러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기 꺼려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충분한 무장을 얻지 못했고, 또 자유주의적 독립심이 강해 강력한 조직체를 형성하지도 못했다. 영화에서도 보면 이들 민병대는 목총을 들고 훈련을 받으며, 전선에 파견되어도 19세기 식 장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혁명에 대한 헌신적 의지와 투철한 동지애가 있었으므로 온갖 난관을 무릎 쓰고 프랑코의 정규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가 토지 혁명
그런데 공산당은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좌파 세력과 연합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혁명에서 핵심적 문제인 토지혁명을 일정한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체로 프랑코 반란군과 가까운 귀족 신부 부재지주의 소속 토지만을 대상으로 몰수하며 이를 다시 토지가 부족한 소작농과 무토지 소유 농업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려 했다. 이들은 자기경영하는 부르주아 지주들의 토지는 방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전쟁의 과정 중에 동시에 혁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것도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 이상을 바로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부르주아 지주의 토지까지 몰수하여 집단화하기를 요구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면서도 토지경영의 대규모화의 이점에 의해 농업생산력을 증대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인민정부를 지지하는 부르주아 지주의 이해와 직접 부딪히게 되면서, 여기에 혁명세력 내부의 분열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이런 아나키스트의 모습은 영화에서 마을에 파시스트들을 몰아내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 토지혁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린 토론 가운데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도주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그러나 몰수토지를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집단화와 분배의 주장이 대립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농민들은 집단화를 찬성한다. 반면 오직 자기 땅을 가진 자작농 한 사람만이 집단화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집단화하게 되면 자기의 토지 역시 몰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농민들의 토론에 지원병들의 주장까지 겹치게 되는데, 유독 나중에 공산당으로 넘어가는 로렌스만이 인민정부의 안 즉 공산당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별분배하자고 주장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농민들과 아나키스트적 성격이 강한 지원병의 주장에 눌려 토지혁명은 집단화로 결론지어진다. 그들은 이런 혁명적 결론을 내리고, 공산주의 이상의 실현에 대해 환호했지만 사실 바로 이것이 혁명세력 내부의 분열의 싹이 되었다. 토지혁명을 계기로 부르주아 좌파가 프랑코 반란군 쪽으로 넘어가면서 혁명세력은 초기의 압도적 우위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나 교회 문제
영화는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교회와 여성의 문제가 어떤 모습을 지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유럽의 경우 사회주의 혁명 뿐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에서도 가장 어려운 장애가 바로 교회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봉건제의 가장 강력한 지원군인데 왜냐하면, 사회의 구석구석에 까지 뿌리를 내리고 학생들의 대부분의 교육을 장악하고, 여성들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반종교개혁의 십자군인 제수이트 신부회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스페인에서 교회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토지, 심지어 수많은 기업조차 직접 소유하면서, 반란군에게 직접적으로 봉사했다. 영화에서도 그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마을의 신부가 반란군에게 밀고하여 마을의 아나키스트 5명을 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심지어 총을 들고 혁명군과 싸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교회의 책동은 오히려 대부분의 인민들의 반감을 사서, 혁명은 반종교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종교를 비과학적 미신으로 몰아 붙였다. 그 결과 아나키즘의 영향이 미친 지역에서는 강력한 반종교 투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파시스트들로부터 해방이 되자 마을 주민들은 교회의 성상을 꺼내어 불태우고, 신부를 사살하고 만다.
다 여성문제
또한 여성의 문제도 혁명에서 주요한데, 아나키즘은 다른 사회주의보다 더욱 강력하게 여성 및 성을 해방시키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긍정, 그리고 인도주의 정신, 개인의 자주독립성과 상호부조의 연대라는 원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며, 결과적으로 봉건적 사회에서 자주성이 억압되는 여성의 해방을 전면에 들고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나키즘은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본성을 지니므로, 양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안했다. 비록 여성의 자주적 결정권을 인정하고, 자기의 고유한 욕망의 충족을 통한 행복추구권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성으로서 본성을 살리는 과정이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종류의 일에서 동등한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각자는 자기의 능력에 맞는 서로 다른 활동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 욕망은 동일하므로,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심지어 성적 욕망을 추구할 권리조차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에서 여성 해방의 문제는 성해방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성의 해방은 여성의 기본적 욕망의 해방이므로 인도주의적으로 당연한 권리일 뿐만 아니라, 특히 아나키즘은 여성의 억압과 착취는 성적 지배가 매개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점을 더욱 강조했다. 즉 여성의 성적 억압이 여성의 인간성의 사물화 내지 대상화를 가져오고, 이를 통해 사회적 억압이 유지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여성의 해방은 무엇보다도 적극적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성적 해방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여성해방의 문제는 영화에서 공산당 지역에서와 달리 아나키스트 지역에서 민병대에 적극적으로 여성이 참가하는데서 볼 수 있다. 영화에서도 블랑카와 마이테가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남성과 더불어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여성에게는 무장투쟁이 금지된다. 블랑카가 말하듯이 여성은 민병대 내부에서 간호원이 될 수도, 요리사가 될 수도 있지만 총을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아나키즘의 독특한 여성해방의 입장을 보여준다.
3) 공산당과 POUM의 대결
영화 「토지와 자유」에서 파시스트의 지배 하의 마을이 민병대에 의해 해방되고, 마을 주민들에 의해 토지혁명이 수행되자, 혁명적 환희가 최고조로 이른다. 그래서 주인공 카는 영국에 남은 애인 키티에서 “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느낌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해서 이제 서서히 혁명군의 앞길에 암운이 드리워지게 된다. 이런 전환점에서 공산당과 POUM의 내분이 벌어지게 된다. 이 내분의 기초는 토지혁명의 문제에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 이상으로 정규군인 프랑코 반란군에 맞서서 싸우는 전술적 문제도 주요했다.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정부는 분산되어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각종 민병대를 통합하여 정규군 화하려 시도했으며, 소련이 제공하는 지원을 바탕으로 아나키스트 계열에게 이런 시도를 강요하려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에게 이런 시도는 공산당이 혁명군 전체를 지배하는 결과가 될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주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이런 시도를 반대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제공되는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 분산 고립된 투쟁만으로 조직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순적 상황이 중첩되어,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공산당은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한 POUM의 지도자를 반란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동시에 부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아나키스트 계열의 민병대를 해체하여 그들이 조직한 민중부대에 통합시켜 나갔다.
영화 「토지와 자유」는 이런 혁명군 내부의 혼란의 모습을 부상당하여 바르셀로나에 머무른 카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카는 거기서 공산당이 조직한 외국지원병 부대인 국제여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나, 실제 반란군 진압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벌어진 아나키스트들과의 내전에 동원되었다. 그는 결국 이를 박차고 나가서, 본래 민병대를 찾아 나섰으나, 거기서 그들은 반란군에 대해 고립적이며 결국은 무용한 싸움에 참가하게 된다. 마침내 혁명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 민병대를 해산시키고 말았고, 거기서 카는 자기의 애인 블랑카를 잃게 되었다.
켄 로치는 이런 공산당과 아나키스트들의 갈등에서 명백히 공산당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즉 혁명군이 반란군에게 결국 무너진 것은 공산당이 강제적으로 민병대를 해체 통합하여서 혁명군의 내적 활기를 약화시켰다는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56년 이후 관료주의화된 스탈린주의에 대해 신좌파 지식인이 가지고 있었던 반감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민병대 내부의 급진화된 혁명 열기나 혼란스러운 비조직적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일정한 정도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당시 내전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당의 주장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반란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공화파와 협력해야 했으며, 또 민병대는 통합되어 조직화되어야 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카는 이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다시 민병대를 찾아가고 말았다. 거기에는 아나키즘이 온갖 정치적 혁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어떤 엄청난 매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4. 결론
영화 「토지와 자유」는 한편으로 스페인 내전을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아나키즘의 매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실 아나키즘은 사상적으로는 합리적 이성주의, 도덕에서 자연주의, 사회적으로 소공동체의 연합과 자주관리를 뼈대로 하는 사상이다. 아나코 생디칼리즘이란 이런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전술적으로 조합주의를 결합시킨 것이다. 아나키즘을 사상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20세기 초 공장의 밀집 단순 육체 노동자의 개념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 더 가깝다. 아나키즘은 오히려 상당히 지적이고 또 자유로운 지식노동자, 그러니까 20세기 이전에는 직인들이며 20세기 후반에는 전문기술노동자와 잘 연결된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그때까지만 해도 직인체제가 남아있었던 유럽의 후진 자본주의 지역인 라틴지역에 주로 분포되었으며, 20세기 중반에 대규모 공장체제가 발전하자 쇠퇴하였고, 다시 20세기 후반에 전문기술노동자의 등장과 더불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나키즘은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기독교적 이상주의에 기초한다. 자신에 대한 금욕주의, 타인에 대한 헌신적 사랑의 정신이 사상적 아나키즘의 밑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개 아나키즘의 사상가는 기독교, 그것도 이상주의적 기독교 전통에서 발생했다. 러시아의 크로포트킨과 톨스토이, 영국의 고드윈과 로버트 오엔,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는 모두 이런 기독교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기독교 이상주의의 전통은 앞에서 말한 아나키즘의 과학적 합리주의와 도덕적 자연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의 인간성 속에 이 양자는 무리 없이 결합되어 있었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무한성조차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보았으며, 도덕적 세속주의는 공공의 이익을 절대적 신앙의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이런 기독교 이상주의는 이 영화에서 바로 여 주인공 블랑카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애인과 더불어 직접 총을 잡고 싸우는 파르티잔, 애인을 잃고 슬픔에 잠겨서도 죄책감에 사로잡힌 동지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동지애, 자신의 애인을 땅에 묻으면서도 혁명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혁명적 낙관주의, 벌거벗은 채 “오늘은 ...총알 참호 정치 살상 배반 대신 인간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는 그 휴머니즘, 그리고 사상적 차이를 발견하자 가차 없이 사랑의 결별을 선언하고 등을 돌리고 뛰어가는 그 치열함,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녀의 이미지인데, 그게 바로 아나키즘적 인간상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나키즘은 비록 사상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이런 정신적인 측면에서 많은 지식인들, 즉 자유롭고 정의감이 넘치고 투쟁적인 지식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참고서적
Paul Rotha, 기록 영화론-영화이론총서 제7집, 유현목 역, 영화진흥공사, 1982
이 책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각 지역별로 살펴보면서 다 큐멘타리의 기본 개념들 그 기법들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齊藤孝 편, 스페인 내전 연구-인민전선 붕괴와 프랑코의 집권, 이호웅 윤언균 역, 형 성사, 1981
이 책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일본인들의 연구서로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유일한 서 적이다. 여기에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략한 약사가 들어 있으며, 특히 내전사에서 농업혁명의 문제, 그리고 지역적으로 아스토리아의 혁명에 대한 세부적 연구가 들 어 있으며, 팔랑헤당에 대한 연구 및 프랑코와 독-불-일 사이의 방공협정에 대한 연구도 들어 있다. 특히 1930년대 아나키스트들의 대중소설을 연구하여 그 속에 담 긴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소개는 아나키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병창, 20세기 사상사, 천지, 2001
이 책의 앞 부분에 20세기 초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 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나키즘 사상을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제 3장 노동계급의 성장 부분을 참조할 것.
박홍규,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
아나키즘이나 페미니즘, 에콜로지 등 현대 사회의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를 고찰한 인문서적으로 아나키즘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역사적으로 훑어 나갔다. 동시에 아나 키즘의 사상, 예술론, 교육론을 차례로 살펴나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나키즘에 대해 부정적인 일반적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과도한 국가권력과 천민자본주의 등의 병폐에 시달리는 현대 사회에 대안으로서 아나키즘을 들고 있다.
폴 에브리치, 아나키스트의 초상, 하승우 역, 갈무리, 2004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의 삶과 개성을 드러낸 책. 러시아의 유명한 지식인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포트킨부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 레일리아의 제화공이자 급진적인 연설가였던 플레밍까지, 정치적·사회적 부조리에 맞섰던 전 세계적인 아나키스트의 삶과 기록들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전성 기를 누렸던 아나키스트 운동의 영향력과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저항운동의 참 여자들의 호소력 등 그 시대의 독특한 향기를 포착해냈다.
이영미, 「결코 내리지 않는 깃발- 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키노 , 97.9 호
이 논문은 켄 로치와의 대담이 실려있다. 그래서 그의 육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는 점에서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효인, 「반제 반자본의 전사 감독 켄 로치」,
이 효인은 영화평론가로서 계간 「독립영화」를 편집하고 있다. 그가 켄 로치를 평한 이 글은 인터넷 문서이지만 국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켄 로치에 대한 평론이므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켄 로치의 영화 「칼라의 노래」에 대해 주로 평하고 있다. 그의 논평 가운데 다음 같은 구절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영화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교만하게 내뱉는 말, \"더 이 상 새로운 영화는 없다.\" 따위를 단번에 통렬하게 반박한다. 그는 영화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싸울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싸우는 것이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의지 와 희망을 강조하지만 그의 인물들은 승리하기보다는 패배하는 편이다. 그리로 영 웅적이거나 독보적인 인물보다는 평범한 패배자, 집단 중의 한 명이다. 이것은 그 가 견지하고 있는 끝없는 비판정신과 현실주의에 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주 어진 좌파 로맨틱 아나키스트란 칭호는 철없는 이상주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