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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철학콘서트 \아나코 생디칼리즘\ 관련 자료
이병창 2013.05.25 518
아나코 신디칼리즘( Anacho-Syndicalism))-이병창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나코 신디칼리즘은 대두하는 노동계급의 사상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과 같은 라틴국가에서 그러했다. 이곳은 일찍부터 무정부주의 혁명가 바쿠닌이 활동해 왔고 무정부주의적 뿌리가 깊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아직도 대공장 체제가 확산되지 못하고, 소공장 체제가 지배적이어서, 여전히 직인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정부주의 사상의 기초는 바쿠닌의 혁명적 실천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러시아 사상가 크로포트킨이었다. 그는 아나코 코뮤니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 이론의 핵심은 생단수단의 소유뿐만 아니라, 분배도 집단적이라는 데 있었다. 즉 노동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것이다. 아나코 코뮤니즘은 중앙집권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콤뮨의 연방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자 했다. 크로포트킨의 이론의 바탕은 사회진화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 경쟁보다는, 협조가 보다 자연적이며 일반적인 태도로 형성되었다라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은 이론적이었지만 실천력이 결여되었다. 박애와 사랑의 정신으로 부르주아의 노골적 야만적 지배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1876, 이태리 아나키스트 엔리코 말라케스타(Enrico Malacesta)는 직접적인 봉기가 선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주장하면서, 아나키즘에 적극적 행동주의적 요소를 가미시켰다. 그의 영향을 받은 아나키스트들은 우선 농촌에서 봉기하여, 이태리 농촌의 문맹대중을 혁명적으로 추동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런 실패 이후, 이들은 개인적 테러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테러가 억압적 사회의 취약성을 입증하며 자기 희생에 의해 대중들을 고무시킨다고 믿었다. 1890-1901 사이에 오스트리아의 황후였던 엘리자베스, 프랑스의 대통령 카르노, 미국의 대통령 매킨리, 스페인의 수상 카스티요 등이 이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개인적 테러는 한계에 부딪혔고, 그 후에는 스페인이나 러시아에서만 제한적으로 나타났다.
아나키스트들은 전통적으로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개인주의의 과잉이 대중으로부터 혁명가들을 유리시킨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들 사상의 속성상 속수무책이었다. 1881 아나키스트들의 국제회의가 런던에서 열렸지만 세계적인 조직을 창조하지 못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조직은 취약했고, 소그룹의 형태로 존재했다. 1900년대 들어와, 프랑스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에 침투했으며, 특히 상호부조의 조직인 직업소개소에서 적극 활동했다. 1892 직업소개소의 전국연맹이 창립되었고, 1895 펠라티에(Fernand Pellotier), 푸제(Emile Pouget), 드라사유(Paul Delasalle)의 주도로 아나코 신디칼리즘이 발전되었다. 그 이론의 핵심은 이렇다. a. 노동조합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불충분하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와 억압적 국가의 파괴에 전투적으로 되어야 한다. b.노동자들은 공장과 시설을 접수하여, 직접 경영하여야 한다. c. 노동조합은 현재의 조건하에서는 투쟁의 조직이며 혁명 이후에는 사회를 관리하는 조직적 근간이 되어야 한다. d. 전투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선동과 투쟁의 분위기가 도출되어야 하며, 전국적으로 동시에 벌어지는 총파업이 자본주의와 국가를 최종적으로 해체시킬 수 있다. 이런 혁명은 소위 ‘연대에 의한 혁명(the revolution of folded arms)’이라고 불려졌다.
아나코 신디칼리즘은 무정부주의의 속성인 개인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대중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테러나 시대적 한계에 이른 봉기의 방식을 지양했다. 동시에 아나코 신디칼리즘은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면서, 적극적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경제적 공황에 부딪혀, 노동조건이 악화되고 자본가가 잔인하게 노동 조합을 탄압했던 상태에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에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프랑스에서 아나코 신디칼리즘이 주도하는 CGT(노동총동맹)이 1895년 창립되었다. 1894 드레퓨스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급진파와 지식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고, 이 연합은 1899.6 공화정을 방어하기 위한 연립정부 구성으로 발전하였다. 1905 통합 사회당이 창립되어, 노동총동맹의 지원 하에 의회에 적극 진출하였다. 마침내 1920년대 장 조레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민전선이 확립되어 프랑스에 대두하는 민족주의적 우파, 파시스트들의 준동을 방어할 수 있었다. 아나코 신디칼리즘은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로니아에서도 성공적이었다. 1909 총파업을 전개했다. 1910 스페인노동조합평의회가 열렸으며, CNT(전국노동총동맹)이 창립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30년대 인민정부가 세워졌으며, 프랑코의 쿠데타에 의해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희생적으로 인민정부를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본성 속에 어쩔 수 없이 녹아들어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전선은 분열되었고, 급진적인 사회개혁 특히 토지집단화는 인민정부를 지지하던 소농, 쁘띠 부르주아 층을 혁명으로부터 이반시켰다. 결국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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