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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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함성: 종미파와 친북파
류종렬 2012.05.29 695
종미파와 친북파:

시절이 수상하니 담론 아닌 별라별 아이러니가 떠돈다. 인문주의자(humaniste)들이 이전에는 좁은 이성으로 세계를 동서로 납북으로 분할하더니, 결국에는 제국주의 주구(똘만이)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이에 반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의 삶에 공감하고 공명하며 살아가는 인도주의자(le humanitaire)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도주의자는 상대에 부정이 아니라 부정도 긍정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또한 인민은 인간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좋아하는 자유주의자(liberaliste)를 싫어하고, 누구에게나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le libertaire)을 좋아한다. / 중국의 종속에서 노론파, 일본 제국를 이어서 미국 제국주의 똘마니들인 종미파보다 인도주의 편에선 친북파에게 연민과 배려의 맘을 살피는 자들이 철학사에서 “말하지 않은 자”(le non-dit)편에 선 이들이다. (45PMI)



참조: 존재의 함성 즉 인민의 함성(la clameur de l\être(ou du peuple)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김상환역, 민음사, 2004.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철학사는 폐쇄적이고 고착적이라 형이상학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형이상학(심층형이상학)을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파랭이(상층) 시대는 가고 빨강이(심층) 시대가 이미 도래했지만 오랜 타성으로 제자리 걸음 중이다. 이 점을 두 방식으로 전개해 보자.

하나는 존재도 아닌 것을 존재로, 이야기를 신앙(신념)으로 믿는 것인데, 그 정도는 개인의 소양이니 이해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경증 환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보자, 5살짜리 어린애가 산타클로스 할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런데, 10살이 되어도 산타클로스 할배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 애는 바보일 것이다. 세상을 만든 신이 있고 그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어린 시절 믿는 것을 무어라 하겠는가마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신이 세계와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멍청이가 아닐까?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정신적상흔(trauma)이 발동하여 신경증환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런 신앙의 반복은 편집증환자의 반복과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구가 생기고 나서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에, 지구가 동일한 적은 없다. 지구의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이질적 반복 즉 (내가 만든 용어로)“반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제국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반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격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반본”이 있다. [필자: 반복에 ‘ㄱ’자를 ‘ㄴ’으로 바꾸어 용어가 다름(‘반본’)을 표시했다. 차이와 ‘차히’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한 인간이 자기가 존재하며, 그리고 다른 존재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도 나무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사물이 기준이 되고 그리고 그 인간에게 차이가 있다고 하면 전혀 다른 말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A가 B와 다르고, B가 A와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각자는 기준이 있고 기준 밖에 있는 것을 차이라 한다. 이때 차이란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것, A에 포함 안 되는 B의 부분, 또는 B에 포함되지 않은 A의 부분을 말한다. 그러면 이미 서로에 공통하는 것이 없는 다른 부분(“차히”)들이 있다. C 의 부분에서도.. 등등. 다른 부분으로 “차히”가 있다. 차이는 대상들 사이에서로 다른 부분들로서 차이이고, “차히”는 대상들 사이에 이 차이가 있게 하고 또한 대상들의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차이를 말하는 것, 그것은 배제한 부분을 제외하는 것으로 자기만을 맞다고 주장하는 동일율의 다른 형식일 뿐이다. 이에 비해 “차히”는 마치 두 개의 공집합 부분처럼 토대로서 다른 것(이질적 흐름처럼)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A와 B 각각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자기들만의 경계 안에 있을 경우에만 동일성이고 자기 이외 다른 것을 차이라고 한다. 즉 기존의 차이 개념은 남을 배척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차히”란 배척 이전의 바탕, 깊이이다. 대상 각각은 “차히”에서 메커니즘의 일부만으로 자기 현존방식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 일부가 다른 부분들에 대해 우월, 중심, 모델, 표본, 전형 등으로 진리의 형상화를 한다는 것은 자기부조리에 귀착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를 예수가 다시 올 것인가에 대해 적용해보자. 한마디로 동일한 예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실재에는 동일성의 생산도 동일성의 반복도 없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과 차이 있지만, “차히”로부터 등장한 것이고 동일 반복을 하지 않는 “반본”이다. 그래서 유일자이다. 70억 인구 중에 어느 사람도 동일하지 않으며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 반복도 하지 않는다. 차이의 배제에 비해, 차히의 고유성 생산을, 반복의 타성에 비해 “반본” 창의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것이 들뢰즈의 의도이다. 들뢰즈에게서는 생명체도 세계도 “차히”의 생산이고 “반본”의 생성이다.

이 책은 차이와 반복이라기보다 “차히”와 “반본”을 알리고자 하는 철학사의 재해명이다. 들뢰즈는 「머리말」에서 간단히 주장한다. 하나는 다른 것에 대해 경계를 긋지 않는 “부정 없는 차이 개념” 즉 “차히”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동일성으로는 어떤 사물도 인격도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동일성을 무시하는 반복 개념”, 즉 “반본”을 말한다. 들뢰즈는 “차히”이면서 “반본”하는 다양체의 역동성 자체가 “존재의 함성”이다. 이 존재가 표현하고 그리는 운동의 모습을 리좀이라 부른다. 이 존재를 정치적 함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민의 함성인 셈이다. 그가 쓰는 이념, 존재 등의 개념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형상적(상층) 개념과 달리 깊이에서 솟아나는 흐름적(심층) 개념이다. 개인이란 각 인격은 다양체의 가지에서 한 계열이지만 다양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유적으로 하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번개와 같다. 번개는 하늘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으나 항상 하늘 속에 있을 뿐이다. 게다가 차이와 반복을 실행하면서 그것에 매여 있는 자들은 신경증 환자이며, 나아가 그 차이와 반복의 상흔에 굴종하여 동일자를 갈구하며 기도하는 자는 파라노이아(편집증자)라고 한다. 이에 비해 “차히”와 “반본”을 생성하려 욕망하는 자들은 스키조(분열증자)이며, 새로운 생성을 끊임없이 불굴의 투지로 노력하여 만들어가는 자야말로 혁명가라 한다. 그처럼 인민의 함성을 표출하려는 자야말로 예술가이며 발명가이며 철학자이다. (45P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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