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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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2 아침의 고요
이병창 2015.08.04 109
다시 헤겔로 2(15. 8.3)

1) 대화적 이성
헤겔 주석을 시작한다고 해놓고 또 오래 동안 내버려 두었군요. 내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밀려 어쩔 수 없었어요. 양해 바랍니다. 이번 주석은 지난 주석에 이어서, 이성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죠.

앞의 주석에서 이성의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인격이라는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이 인격 개념이 지닌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성이라는 개념이 곧바로 튀어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인격은 모든 사람들의 형식적인 통일성입니다. 그 속에서 각자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지니죠. ‘나와 타자의 형식적인 일치’가 곧 이성이죠.

‘나’와 ‘타자’의 일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때 우리란 ‘나’와 ‘타자’ 사이에 있는 공통성, 인간의 일반성으로서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라는 개념에는 인정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거죠. 이렇게 서로 인정하면서 생겨나는 우리가 헤겔이 말하는 이성입니다.

인간의 일반성과 상호인정의 차이점이 쉽게 파악되지 않지요? 예를 들어 볼까 합니다. 예를 들어 나와 타자가 모두 한국사람이라 하죠. 그러면 우리는 한국사람입니다. 그 한국사람이라는 특성은 나와 타자의 공통성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는 나의 노예가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본다면 공통성과 상호인정이라는 개념의 차이가 쉽게 발견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양자의 차이를 전제한다면, 헤겔이 말하는 이성이란 인간의 일반성이 아니라 상호인정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해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성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푸랑크푸르트 학파가 자주 사용한 두 이성 개념을 참조하려 합니다. 푸랑크푸르트 학파는 도구적 이성과 대화적 이성을 구분했습니다. 도구적 이성이란 사물의 법칙이나 개념을 파악하는 이성이죠. 반면 대화적 이성이란 서로 합의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구분에 따르자면 헤겔의 이성 개념은 이 두 가지 가운데 도구적 이성보다는 대화적 이성 개념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반면 사물의 일반성을 파악하는 도구적 이성 개념은 헤겔에게서는 지각의 단계에 나타나는 오성의 개념에 가깝죠.


2)세계에 대한 고요
헤겔은 이런 이성 개념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자기 자신을 확신하기에 세계에 대한 고요(Die Ruhe gegen sie)을 취했으며, 세계를 감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적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을 실재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132쪽

“자기의식적 이성에게 세계는 이제 막 그에게 생성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적 이성이 그렇게 파악하기 때문이다.”132쪽

“여기서 진리의 무덤을 상실한 이후, 현실의 절멸을 절멸시킨 이후, ... 비로소 자기의식은 현실을 그의 새로운 현실세계로 발견한다.” 132-133쪽

이런 얘기의 핵심은 단순한 자기의식 즉 개체적 자기의식은 대상을 부정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활동한다는 것이죠. 그에게서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고, 현실은 그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런 욕망은 현실의 즉 ‘진리의 무덤’이었죠.

그런데 이성적 자기의식은 서로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 대해서 어떤 것은 나의 것이고 어떤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세계에 대한 고요’을 얻게 됩니다.

이런 고요를 어떻게 이해할까요? 세계에 복종하여 자기를 버린다면 그것을 절망한 자의 고요라 하겠죠. 거꾸로 세계에 대립(gegen)한다면 그는 고요를 얻기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에게 늘 새로이 대항할 테니까요. 그런데 헤겔은 세계에 대한 고요를 얻는다고 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젊은 날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을 하더라도 나만이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나만이 그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라고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죠. 타인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런 타인이 존재한다는 무게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세계이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언젠가 그는 성숙하게 되죠. 그런 성숙은 자주 사랑의 파국에서 비롯된 고통을 통해 얻어집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는 비로소 이 세상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죠.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선이 놓아 보내줍니다. 바로 그때 그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를 떠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여전히 그 사람의 결정이 올바르고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의 모든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이제 그 사람을 인정하죠. 적어도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그는 그 사람을 놓아 보내 줍니다. 그때 분노 속에서도 어떤 고요가 얻어지지요. 그 고요는 고통을 앓다가 깨어난 새벽에 희미한 여명의 빛과 함께 다가오는 고요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새벽에 밖으로 나가면 부연 안개 속에서도 언뜻언뜻 나뭇잎이 보이고 그 위에는 이슬방울들이 맺혀 있죠. 그때 그는 인정합니다. 자기 밖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물론 그 이전에도 세계는 있었죠. 하지만 그는 세계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거꾸로 세계를 부정했습니다. 세계는 굴복이 아니면 정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부정의 대상도 아니고, 위협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 세계는 평화롭게 존재하죠. 바로 그 순간, 그의 앞에 “세계는 막 생성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안개 속의 나뭇잎이 그처럼 생생하고 이슬방울들은 영롱하지 않을까요?

무척이나 극적인 전환입니다. 우리가 타자를 인정하는 순간, 세계도 우리에게 생성된다는 주장이니까요. 이런 전환으로부터 관념론이라는 이성의 기본적인 세계관이 출현합니다.


3)관념론
헤겔은 이런 관념론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유는 직접적으로 그의 현실이다; 이성적 자기의식은 세계에 대해 관념론으로서 관계한다.”132쪽

“나는 나이다. ...오히려 그 말의 의미는 대상적인 나가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대상이며, 따라서 유일한 대상이며 모든 실재이며 현재라는 것이다.”133쪽

이상 인용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사유’와 ‘현실’이 일치한다는 주장이죠. 그런데 이런 일치는 이미 자기의식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때 나는 곧 대상이었죠. 자기의식에서 나와 대상은 모두 개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개체적 나는 개체적 대상이죠. 하지만 이성적 자기의식에서 이런 일치는 ‘보편성’을 전제로 합니다. 즉 보편적인 자아가 곧 보편적인 현실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보편적 자아는 형식적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보편적 현실 역시 형식적인 것입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다시 인격이라는 개념을 빌어 설명하자면 추상적 인격이 곧 추상적인 법의 세계이죠. 이때 인격이 보편적 나에 해당된다면 법이 보편적 대상이 될 것입니다.

추상적 인격 아래 구체적 인격은 무의미하듯, 추상적인 법 아래에서 모든 구체적인 현실은 무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헤겔은 이렇게 보편적인 형식인 사유의 현실화로서 보편적인 형식적 대상 앞에서 나머지 모든 구체적 현실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보편적 현실은 ‘유일한 대상’이며, ‘모든 실재’입니다. 여기서 ‘유일’이라든지, ‘모든’이라는 표현 속에는 실질적인 내용을 따지지 않는 다만 형식만이 중요하다고 보는 형식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성의 관념론은 이런 의미에서 형식적 관념론입니다.

이런 형식적 관념론의 세계에 관해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음양이론을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음과 양은 세계를 보는 우리의 보편적인 인식틀입니다. 이런 인식의 틀로 보면 세계는 모두 음가 양으로 이루어집니다. 산에도 음의 산인 옥녀봉과 양의 산인 장군봉이 있죠. 집에도 무덤인 음택과 주거지인 양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음양이론은 이런 사실들을 경험적으로 귀납하여 얻은 법칙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음과 양이라는 인식틀을 가지고 세게를 본 것이죠. 바로 여기서도 인식틀과 세계가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 일치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치일 뿐이죠.

4)열림의 자세
헤겔은 보편적 관념론이라는 측면에서 이성을 모든 실재‘라고 규정하지만 이런 관념론이 다만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성을 ’확실성‘이라 규정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규정은 "모든 실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die gewissheit alle realitaet zu sein)"이라고 말합니다.

왜 다시 감각적 확실성의 단계에서 출현했던 ‘확신’이라는 것이 등장한 걸까요? ‘보편적 사유가 곧 보편적 현실’이라는 관념론은 다만 형식적인 차원에서만 성립하므로 거꾸로 내용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대립을 면하지 못합니다. 내용적인 차원에서 구체적 현실과 나의 현실은 대립하죠. 마찬가지로 나는 타자와 구체적으로는 대립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대립의 측면에서 본다면 형식적으로 사유가 곧 현실이라는 것은 내적인 확신에 불과하죠. 마찬가지로 현실적 대립 역시 하나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전자와 구분하나면 외적인 확신이라 할 수 있겠죠. 형식상의 일치에 불과했던 보편적인 이성이 내용적이고 구체적인 면에서까지 일치에 이르게 된다면 이런 내적 확신은 진리로서 출현하게 될 겁니다. 헤겔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성은 각자의 의식이 지닌 자기의식에 호소한다. <나는 나이다. 나의 대상과 본질은 나이다.> .... 이성이 이런 호소에 근거하여 그런 진리를 주장하므로 이성은 또 다른 확신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나에 대해 타자가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나와 다른 것이 나에게 대상이며 본질이다.>”(134쪽)

새로이 생성된 이 세계, 관념론의 세계로부터 이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오성 장에서 이성 장으로의 이행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그 때 나는 개미를 예로 들었습니다. 개미는 방을 기어갑니다. 그리고 방의 끝에 이르면 세계가 끝나는 줄 알고 있어요. 개미는 세계의 끝가지 가보자 하고 기어갔습니다. 그때 벽이 나타납니다. 만일 개미가 방의 끝까지 가보지 않았다면 그런 새로운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벽이 나타나자, 개미는 세계의 끝에 도달했다는 기대가 깨어져 절망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용기 있는 개미는 다시 세계의 끝에 이르기 위해 벽을 기어갑니다. 평면의 방에 대해 수직의 벽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개미는 여전히 방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벽을 기어가려 하겠죠. 개미는 조금 기어올랐다가 미끄러지겠죠. 이때 ‘실존적 개미’는 수없이 떨어지면서도 시지포스적 노력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 이 반복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반복입니다. 이 벽은 수직의 벽이죠. 그 벽을 기어오르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해요. 우리는 지금까지 방을 기어왔습니다. 이 벽을 기어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가 요구될까요? 자기의식의 지금까지의 운동에 의해 새로운 벽이 나타났습니다. 이 벽이 곧 보편적 사유가 보편적 현실이라는 이성입니다. 아직은 이런 일치는 추상적인 형식적인 일치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성은 그 이전 자기의식에 비해 어떤 새로운 열림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열림은 나중에 보면 결국 ‘정신’으로의 열림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열림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열림이, 희미한 빛이 그 속에 있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하죠. 바로 이런 열림, 희미한 빛이 주관적 확신으로서의 이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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