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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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5; 몽마르뜨 묘지에서
이병창 2015.08.22 75
유럽 여행 4월 22일
2)몽마르뜨 묘지

드디어 클리시 전철역 직전 오른 쪽에 몽마르뜨 묘지가 나온다. 아마 8시나 되었을까? 혹 여기 입장료를 받지 않을까, 묘지에 입장료 받는 곳도 다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좌우를 돌아봐도 입장료 받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육중한 철문이 빼꼼히 열려 있기에 그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순간 눈에 가득 들어오는 우중충한 묘지의 모습에 기분이 스산하다. 아침부터 묘지를 찾는 것은 역시 아니군. 이 무덤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석회석 광산터에 만들어 진 것이라 한다. 18세기 중엽 파리 시내에 무덤을 쓰는 것이 금지되자 파리 교외에 여러 무덤이 만들어졌을 때 함께 만들어 진 것이다.

입구에 이 묘지에 묻힌 유명인들의 묘지 장소가 그려져 있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찾아보니, 낭만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무덤과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무덤, <적과 흑>의 소설가 스탕달, 프랑스 영화감독 트뤼포의 무덤, 화가 에드가 드가, 초기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무덤 등이 보인다. 우리는 이 많은 무덤 가운데 두 군데만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각자 한 사람씩 고르기로 했다. 홍 교수가 우선 에밀 졸라를 골랐다. 나는 푸리에냐 하이네냐 고민하다 하이네를 고르기로 했다. 독일의 시인인 하이네가 파리에 묻혀 있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의 무덤을 찾기는 쉬웠다. 묘지 입구에서 가장 눈에 뜨이기 쉬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 앞에서 나는 그의 소설 <테레즈 라켕>을 생각했다. 이 소설은 얼마 전 영화감독 스트레이턴에 의해 영화화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상연한 적이 있지만 이 소설은 여러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그 가운데 1953년대 마르셀 카르네가 만든 영화가 아주 인상적이다. 카르네는 테레즈를 확고한 자의식을 가지고 인습에 대해 저항하는 영웅으로 그렸다. 반면 스트레이턴은 테레제를 욕망을 추구했으나 그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존재로 그려놓았다. 둘 가운데 에밀 졸라의 원작에 더 가까운 것은 스트레이턴의 영화이다.

반면 홍 교수는 에밀 졸라라고 하면 드레퓌스 사건이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진실을 택한 그의 용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볼테르에서부터 시작된다. 볼테르는 구교도에 의해 희생당한 신교도를 옹호했다. 내려가면 사르트르가 이어받는다.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지지하여 전 국민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볼테르에서 에밀 졸라로 그리고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정신, 진실에 대한 용기 앞에 나는 기꺼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에밀? 졸라의 무덤

우리는 그 앞에 묵념하기로 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에밀 졸라와 같은 예술가, 지식인이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종북몰이나 공작정치가 판을 치지 않을 텐데!

이어서 우리는 하이네의 무덤을 찾기로 했다. 그의 무덤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무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발견할 수는 없었다. 벌써 오래 걸은 탓인지 배도 고파온다. 아침에 무덤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포기하기로 했다. 구글에 실린 하이네의 무덤 사진을 여기 옮겨놓는다. 그 앞에 놓여 있는 저 많은 꽃들은 누가 바친 것일까?

?#?하이네의? 무덤

우리는 클리시 전철 역 앞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렀다. 레스토랑에는 아랍 흑인계로 보이는 남녀들이 아직도 어울려 놀고 있었다. 아침 빵과 커피를 시켜 먹으면서 보니, 거리에는 어느덧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보다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하이네를 생각했다. ‘로렐라이’의 원작자, 독일 낭만 시인 하이네가 왜 여기 묻혀 있는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이네가 1830년 7월 파리에서 혁명(7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 혁명을 기리기 위해 파리로 왔다는 것이다. 그는 브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이 혁명이 다시 또 다른 왕조(루이 필립의 왕정)로 변질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그 이후 부르주아의 기만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이때부터 생시몽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하이네의 열렬한 기대 때문에 1843년 파리로 망명한 마르크스를 만나게 된다. 하이네는 뒤셀도르프 출신이다. 마르크스는 트리에르 출신이다. 두 도시는 모두 라인강 하류에 있다. 둘 다 유태인이었고 1820년대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이 두 사람이 파리의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이 간 길은 서로 달랐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혁명의 길로, 하이네는 무정부적 공산주의와 시인과 철학자의 길로. 이 두 사람은 사회주의를 지향했지만 기질상의 차이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태주의를 비난했지만 하이네는 유태교 종교의 영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 북서울미술관에서 지난 3월, 독일의 민중화가 케테 콜비츠의 판화전시회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콜비츠가 제작한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 연작을 보았다. 그 연작은 하이네가 지은 서사시 <슐레지엔 직조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클리시 지하철 앞 카페에 앉아 출근하는 파리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 시를 생각했다.

<슐레지엔의 직조공>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허사가 되었다
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케테? 콜비츠,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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