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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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만주 기행 2
이병창 2013.07.14 794
경박호에서 버스는 남쪽 연변시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한다. 역사기행의 자료 조사를 책임 맡은 분이 버스 안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토로하였다. 시간이 없어서 중요한 사적지를 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경박호 남쪽에 있는 남호두라는 곳이다.



그곳은 1936년 2월 26일부터 3월3일까지 만주의 주요 지도자(동만의 인민혁명군 2군과 북만의 인민혁명군 5군)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그동안 동만의 조선족 인민혁명군을 핍박하던 반민생단 투쟁과 같은 좌경화된 투쟁노선이 철폐되고, 조선족 인민혁명군에게 조선 해방을 위해 독자적으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인민혁명군을 위시로 하여 광범위한 항일 연합군(독립군, 구국군 등과 합작)을 형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1935년 7월 제7차 코민테른에서 확정된 인민전선 노선이 마침내 만주 지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투쟁의 결정적 전기가 마련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곳에는 ‘남호두 회의장소’라는 한글로 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북만의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 넓은 평원이 모두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제주도와 유사한 환경. 이 땅이 발해의 중심지였다 하는데, 그렇다면 발해는 화산재 위에 세워진 나라였을까? 화산재 때문에 이곳이 비옥했을까? 중국 대륙과 겨누었던 거대한 국가가 세워질 만큼? 이건 역사를 잘 모르는 나의 상상일 뿐이다.



목단강시에서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는 목단강은 여기서도 우리를 놓치지 않고 둘러싼다. 어제부터인데, 목단강을 보면 서글프면서도 반갑다. 강 이름이 왠지 정겹다. 목단강, 그런데 가이드가 우스개 소리를 한다. 중국에서 제일 무서운 강, 무서운 도시가 어딘지 아세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목 딴 강’과 ‘목 딴 시’예요.



원래 발해의 고도로 가던 중 발해의 유적인 석등이 있다는 흥륭사를 들렀다. 발해 시대 절이었으나 건물들은 청나라 시대 전부 새로 지은 것들이다. 절의 가장 뒤쪽 사원 앞에 발해 석등이 놓여있다. 여행기에서 자주 본 석등이라 반갑다. 석등이라기보다는 석탑이라고 해야 될 정도로 크다.



발해의 절이나 석등 등의 양식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에 발해사 전공자가 몇 명이 될까? 문외한의 눈에는 석등에 소원을 빌기 위해 동전을 던지는 습관이 더 재미있다. 로마의 분수에도 동전을 던져 넣는다더니, 모든 소원에는 동전이 필요한 것인가? 꼭 동전일 필요는 없겠지. 지폐도 받으니까. 그러니까 모든 소원에는 돈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나 신들은 그 돈을 받아 어디에 쓰는 것일까?



흥륭사를 출발해서 얼마 못가서 발해의 고도 동경성이 나온다.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이 그곳이다. 막막하게 넓은 평원이다. 그때는 못보았지만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 보니 평원 주변 저 멀리 마치 벽처럼 둘러싼 산들이 보인다.



자료 조사에 따르면 이 동경성 안에 상경 용천부 성터가 있다. 이곳이 발해의 마지막 도성이었다 한다. 이곳을 찾아 들어가 보니, 지금 내성 터와 건물 기단만이 남아 있다. 내성은 드넓은 평원 한 가운데 있다. 이런 곳에 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을까?



산성이라도 있어야 위기 시에 도피하여 저항하지 않을까? 고구려 이래 내가 아는 우리의 전투는 산성 방어전투이었다. 하지만 산성에 도피한다는 것은 대륙국가로서는 쩨쩨하게 보였던 것일까? 저 평원을 배경으로 일대 회전을 치룬 다음, 지는 자는 그저 사라지는 것이 대륙의 법칙인가?



성의 가운데 건물 기단 위에 올라서 우리는 사진을 찍은 후, 내성을 끝까지 걸어 가보려 하였는데, 그 끝이 아득한 것 같아 대부분 포기하고 말았다. 오직 한 분의 역사가, 박준성 선생은 자기가 저 끝까지 뛰어가서 사진 찍어 오겠다 한다. 그 끝에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데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있기 뭐가 있어? 있으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사진 찍어 보고했겠지. 그런데 그분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걸 역사가의 책임의식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역사가의 ‘쓸 데 없는 양심’이라 해야 하나. 우리는 그 한 분의 역사가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같은 동료 역사가들은 그 책임의식 때문에, 반면 우리 철학자들은 미련한(?) 역사가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박수를 쳤다. 우리는 뛰어서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그 분에게 시원한 목간물을 선사했다.



그런데 발해라? 유감스럽게도 나는 배운 적이 없다. 내가 배웠던 고등학교, 대학교 역사 교재에는 발해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발해는 서태지가 불렀던 노래 ‘발해를 그리며’ 라는 노래일 뿐이다. 요사이 역사 교재에는 발해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일까?



또 한 가지, 철학자의 기괴한 상상력 때문에,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왜 발해는 나라 이름에 바다 해자를 집어넣었을까? 발해라는 바다는 여기서 아득히 먼데, 그 때문에 발해라 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대륙국가인 당, 청 같은 이름도 아니고 신라나 조선과 같은 멋진 이름도 아닌데, 굳이 발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발해는 통칭이고 진짜 이름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 넓은 들판에 살아서 바다가 그리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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