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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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만주 기행 1
이병창 2013.07.14 292
6월 29일, 토요일, 한국 시간 12시 50분, 마침내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동만 기행이 시작된 것이다. 전체 여정은 꼭 일주일, 금요일 귀국이란다.



동만이라면 바로 간도 땅이다. 우리 민족의 피와 한이 배인 땅, 2008년 7월 초, 남만 기행에서 백두산을 오른 다음 반드시 동만 기행을 하리라 결심했었다. 그런데도 남만 여행 이후 무려 5년 만에 결심을 이루었으니, 비행기 안에서도 감회가 새로웠다. 비행기는 정확하게 중국 시간 2시 20분, 목단강 비행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연변 중국여행사’ 가이드가 반긴다. 조선족 여성이다. 나이는 30대 후반, 단번에 그녀의 온 몸에 활기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조선족 여성이야! 그런데 그녀의 첫 인사는 ‘이상해요’이다. 우리가 탄 중국 남방여행사 비행기가 제 시간에 도착한 것은 정말 드믄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런 인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귀국 시 그 말을 실감했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가이드는 이 버스가 보기는 그래도 독일 벤츠사 거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 눈에 이 버스는 그저 지리산 오지를 떠도는 버스나 마찬가지로 생겼다. 하긴 우리의 여정도 지리산보다 더 엄청난 오지를 떠도는 것이니, 정말 어울리는 차이다. 벤츠 사 거라니 오지를 떠돌더라도 멈춰서지는 않겠지! 제발!



첫날은 목단강 시에서 자기로 했다. 목단강 시는 원래 목단강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중국이 동북 지역을 개발하기로 하고 그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라 급격하게 발전했다. 인구는 400만이라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약 100만 되는 창원이나 울산 정도의 도시처럼 보였다.



여정의 출발점은 ‘팔녀 투강비’이다.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고사를 연상시키는 이름 때문에 우리 모두 호기심이 돌았다. 도착해보니, 사실은 동북 항일연군과 관련된 비석이다. 8명의 여성 모두 항일 파르티잔들이다. 이들은 바로 목단강에서 일제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는 인민들을 구하기 위해 여기서 마지막 후위를 담당했다고 한다. 장렬하게 전사한 8명의 여성 대원들 속에 2명이 조선족 여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목단강 시에서 하루를 숙박하기로 했다. 비행기가 정시에 도착한 결과(?), 호텔에 바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좀 남았다. 우리는 시내 관광에 나섰다. 가이드가 마침 목단강 시에는 조선족 민속거리가 있다고 해서 그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민속거리에 내려 조금 걷는데, 하늘이 우리를 반기는 건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느 건물 처마에 비를 피했다. 한 30분 정도일까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막걸리와 빈대떡 생각이 사무치는데, 설마 이곳에 그런 걸 팔지는 않겠지? 빈대떡, 빈대떡 하면서 두리번거리는데 활달한 가이드가 우리의 심정도 모르고 우리가 비를 맞지 않도록 버스를 몰고 들어왔다. 가이드가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이국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역사학자과 철학자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역사학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은 역사상 영웅호걸들을 주로 다루므로, 그들이 다루는 대상들을 닮아서 사람들이 다 영웅호걸 타입이라고 자랑했다. 발끈한 철학자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주로 신의 창조물을 다루어 왔기에 우리는 거의 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이렇게 서로 주고 받거니 하면서 이국에서의 하루밤이 지났다.



이튿날, 6월 30일 오늘은 경박호를 들러보고 발해 석등이 있다는 흥륭사 절과 발해의 최후 도성인 동경성 궁궐터를 찾아갈 예정이다. 차는 금방 경박호에 도착했다. 거울 같이 고요한 호수라는 경박호는 국내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소개를 생략한다.



그런데 이곳 인근이 독립군의 역사가 깔려 있는 곳이라는 점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다. 간단하게 독립군의 승전보를 소개한다.



하얼빈 등 북만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군사위원장 이청천, 약 150여명 정도)은 31년 9월 만주 사변이 자행되자, 중국 항일군 부대와 합작하였다. 한중연합군은 1932년 9월에 하얼빈 근처 쌍성보전투에서 대승전을 거둔 뒤 중국 구국군 사령 고봉림이 일본에 투항하니 독립군은 연길, 왕청, 동녕, 훈춘, 영안 등지에 분산되어 훈련하면서 힘을 길렀다. 1933년 2월에 한국독립군 부사령 황확수와 중국구국군 14사단장 시세영 사이에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경박호 일대에서 재편 훈련중 일,만군이 대거 진격하여 왔다. 일본군은 소북호로부터 진격하고 만군은 돈화로부터 진격해 오는 남북협공의 양상에 처해 있었다. 한중연합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먼저 전투력이 약한 만군 100여명을 섬멸하니 나머지 만군과 소북호로부터 진격하던 일군은 혼비백산하여 발해, 영안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경박호대첩\" 이라고 한다. 일군이 한중연합군을 토벌하러 사도하자 방면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수집한 한중연합군은 먼저 사도하자 현지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사도하자대첩\" 까지 거두었다.(인터넷 자료 참조)

사도하 대첩 이후에 이 부대는 한중 합작, 좌우익 합작 동녕현성 전투에 참가하여 대첩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아쉽게도 (역사적 고증의 부 족으로)경박호 대첩의 승리의 전장을 직접 찾아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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