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동북 만주 기행7
이병창 2013.07.22 268
두만강 가의 도문에서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 연변까지는 얼마 멀지 않다. 버스로 한,두 시간 정도 거리란다. 나는 버스 안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소왕청에서 살아남은 유격대는 어떻게 되었나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사학자들조차 그쪽에는 연구가 부족해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소왕청을 탈출한 유격대의 앞날에는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중공당의 급진좌경 분자에 의해 반민생단 투쟁이 벌어졌다. 일제의 간계에 넘어간 이 반민생단 투쟁으로 동만의 한인 유격대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김일성조차 위험을 느꼈다. 다행히 북만의 중공당 지도자 주보중의 요청으로 그는 35년 여름 북만원정을 떠났다. 그 덕분으로 그는 동만에서의 위험을 회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누가 얘기했던가? 역사는 생물과 같다고. 소왕청 근거지 방어의 실패, 그리고 반민생단 투쟁의 폐해에 대해 반성으로 역사의 새로운 전기가 펼쳐졌다. 그런 전환이 앞에서 언급한 36년 3월의 남호두 회의에서 일정한 결론을 얻었다 한다. 그 결론은 정치적으로 본다면 ‘동북항일 연군’이며 또한 조선해방을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이다. 그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소왕청 근거지 방어전투의 실패 이후 유격전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정한 지역적 근거지를 옹호하면서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그런 근거지가 없이 전적으로 유동적인 유격전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런 근거지 없는 유격전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새로운 형태의 유격전이 아니었을까? 나의 부족한 역사 이해 능력으로는 유감스럽게도 과연 그런 유격전이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이야 후일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점차 잠에 빠져 들어갔다.



멀지 않아 버스는 연변에 도착했다. 거리에 가득한 한글 간판을 보니 가슴이 시원했다. 우리는 연변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새로 지은 호텔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은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항상 그래 왔듯이 저녁 8시에 다시 만났다. 낮에 술을 너무 먹은 탓으로 다들 다시 술을 먹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누가 이 근처에 연변대학이 있으니 밤이지만 구경 가자고 하였다. 다들 학자라서 그런지 선뜻 동의한다. 호텔에서 걸어서 한 십분 거리에 연변대학이 있었다. 그 사이 거리는 새로 지은 웅장한 건물과 그 건물을 밝히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했다. 연변대학 역시 네온사인으로 본부 건물을 밝혀놓고 있었다.



연변대학 본부 건물은 유럽의 대학처럼 보였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만드는 건물의 전면으로 보아서 전형적인 르네상스 식 건물이다. 그것은 이성을 상징한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가 중국의 도시에서 자주 보아왔던 전형적인 건물들은 소위 사회주의 양식이다. 이 사회주의 양식의 특징은 항상 고딕 사원을 닮은 탑을 건물 한가운데 세운다는 것이다. 이 고딕적 탑은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르네상스식은 바다의 수평선을 닮았다. 사회주의 양식은 수직적 숲을 닮았다. 수직적 숲 가운데 수평적 바다를 보니 갑자기 가슴이 후련해진다. 연변대 건물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연변대학 정문의 오른쪽 벽에는 부조가 있었다. 그 오른 쪽에는 평양 김일성 대학교의 건물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인물상이 있었는데 아마도 연변대학을 상징하는 모습 같았다. 그런데 그 왼쪽에 언뜻 낮 익은 기호가 보였다. 서울대 관악 캠퍼스 정문의 이상한 철탑이 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1975년 우리가 처음 그 관악 캠퍼스에 입주했을 때 그 철탑을 보고 정말 기가 막혔다. 조잡한 철탑의 모습은 박정희의 중공업 개발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걸 유신 공산당(ㄱ ㅅ ㄷ, 국립서울대학교) 마크라고 불렀다. 아직도 가끔 서울대에 들어가다 그 이상한 철탑을 보면 대체 유신 공산당 마크가왜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거지 하고 의아해 한다. 서울 대학생들은 박정희의 정신이 새겨진 그 마크가 자랑스러운 것일까? 그런데 이 유신 공산당 마크가 여기 연변대학 벽에서 다시 있다니?



나중에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연변대학은 원래 해방 이후 북한의 지원을 받아 세워졌다. 항일 투쟁에서 연변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그 참담한 고통과 희생을 기리면서 북한이 지원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지원을 받아 연변 과학대학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대학은 연변대학과 자매대학이라 한다. 이 지원을 기리기 위해 정문의 벽에 이런 부조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적어도 연변대학에서는 남과 북이 통일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유신 공산당 마크가 약간 정겹게 보이기도 한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